'피감기관' 아닌 '국가 서비스 고객'으로 대우하는 규제 철학
EU 라이선스 한번에…5억명 시장 공략하는 최적의 전초기지
"韓 핀테크 퀄리티 높아…'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와서 보길"
유럽의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가 글로벌 핀테크와 디지털 자산 시장의 허브로 급부상하며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유럽 진출의 관문'으로 어필하고 있다. 놀랍게도 '기업 유치 세일즈'의 전면에 나선 곳은 리투아니아 금융당국이다. 기업들을 감독·통제하는 규제기관의 역할보다는 기업 유치와 성장 지원에 초점을 둔 서비스 마인드로 무장하고 세계적인 핀테크 기업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한국 시장의 높은 잠재력을 확인하고 이달 방한한 이들은 이제 '리투아니아가 어떤 곳인가'를 알리는 단계를 넘어 '어떻게 한국 기업의 유럽 시장 성공을 도울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들고 왔다.
지난 12일 데일리안과 만난 루카스 야쿠보니스 리투아니아 중앙은행 최고사업책임자(CBDO)와 엘리유스 시빌리스 리투아니아 투자청 대표는 "리투아니아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하면 5억 인구의 유럽연합(EU) 전역에서 사업할 수 있다"며 "한국 핀테크 기업이 유럽으로 향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환영받는 전초기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규제기관이 직접 '기업 유치'에 나선 나라
리투아니아가 단기간에 유럽의 핀테크 허브로 자리 잡은 비결은 '역발상'에 가까운 정부의 태도에 있다. 야쿠보니스 CBDO는 "리투아니아 중앙은행은 사업 유치 기능을 가진, 세계적으로 드문 규제기관"이라며 "우리에게 라이선스를 받은 기업은 단순한 피감기관이 아니라 국가 서비스의 '고객'이다. 그들의 여정이 최대한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리투아니아 정부는 핀테크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명확히 설정했다. 시빌리스 대표는 "국가 전략상 핵심 분야가 생명과학, ICT, 첨단제조인데, ICT 안에 핀테크, 사이버보안, 소프트웨어 개발이 포함된다"며 "최근 '리투아니아 핀테크 확장 가이드라인'을 여러 기관이 합의·채택해 무엇을 중점 추진하고 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명시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리투아니아 중앙은행은 신규 기업이 라이선스를 신청하기 전 단계부터 소통하며 컨설팅을 제공하는 '뉴커머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다. 야쿠보니스 CBDO는 "서류만 내고 2년 동안 소식이 없는 '깜깜이' 절차가 아니라 전담 케이스 매니저가 배정돼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리투아니아 라이선스 = 유럽 전체 통행증
리투아니아의 가장 큰 경쟁력은 'EU 단일 시장 접근성'이다. 야쿠보니스 CBDO는 "EU 어느 한 나라에서 라이선스를 받으면 다른 회원국에서 추가 허가 없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며 "리투아니아에서 약 4개월(결제기관 기준)이면 라이선스를 받고 5억명 규모의 시장을 한 번에 공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환경 덕분에 리투아니아는 발급 라이선스 수 기준 유럽 1위, 282개의 핀테크 기업이 활동하는 중심지로 성장했다. 세계 최대 디지털 은행 중 하나인 레볼루트(Revolut)와 최근 유럽 진출 거점으로 리투아니아를 선택한 미국의 로빈후드(Robinhood)가 대표적 사례다.
다른 EU 핀테크 허브와 비교할 때 리투아니아의 차별점은 비용과 관심도다. 야쿠보니스 CBDO는 "룩셈부르크·네덜란드·아일랜드 등은 인건비·법무비용 등 사업 비용이 2~3배 비싸다"며 "그 지역에는 구글 페이·아마존 등 거대 플레이어가 이미 자리 잡아 신생 기업이 주목받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반면 리투아니아에서는 작은 규모의 신생 기업도 규제기관으로부터 초기부터 맞춤형 자문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韓, 산업구조·비즈니스 문화 잘 맞아
리투아니아 측은 싱가포르와 대만도 방문했지만 현재는 한국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방한에서만 12곳의 한국 핀테크·블록체인 기업과 만났다. 한국 금융당국과도 접촉해 의견을 나눴다. 시빌리스 대표는 "한국에 집중하는 것은 우리의 핵심 전략"이라며 "산업 구조와 비즈니스 문화, 가치관이 리투아니아와 잘 맞는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한국 금융산업의 '퀄리티'가 매우 높다"며 "한국에서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이라면 어디서든 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쿠보니스 CBDO는 한국 당국의 규제 운영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동남·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규제가 엄격한 편인데 이번에 만난 한국 금융당국은 한국 금융기업의 해외 진출을 매우 환영하고 있었다"며 "현재로선 훌륭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 기업들에게 직접 리투아니아를 방문해 볼 것을 권했다. 시빌리스 대표는 "첫 방문이 리투아니아를 알리는 단계였다면, 지금은 기업이 해외 스케일업을 결심하는 순간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논의하는 실질적인 단계"라며 "마케팅 자료만으로는 현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백문이 불여일견(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처럼 직접 와서 확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야쿠보니스 CBDO는 한국과 리투아니아의 역사적 유대를 언급하며 "과거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가스 의존에서 벗어날 때, 한국이 제작한 LNG 선박 '인디펜던스'가 결정적 도움을 줬다"며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닮아 있고 비슷한 가치를 공유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다른 유형의 규제기관이고, 다른 문화를 지녔다"며 "금융·핀테크 사업을 진행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리투아니아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아직 구체적 사업계획이 없는 아이디어 단계여도 괜찮다. 돕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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