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품격 [조남대의 은퇴일기(75)]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6.17 14:02  수정 2025.06.17 16:38

아내는 틈만 나면 “남자도 요리 한 가지쯤은 할 줄 알아야 해요”라고 말한다. 라면은 끓일 줄 안다며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마음은 떫은 감을 씹은 맛이다. 은퇴 후 아내가 외출할 때면, 집에 남겨진 남편의 식사를 걱정하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곤 한다. 웬만큼 요리할 수 있으면 혼자 남겨질 때 서로 편할 텐데.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한 달간 요리 강의를 듣게 되었고, 인생 칠십여 년 만에 생애 최초로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주부는 단순한 살림꾼이 아닌 끼니마다 창조와 헌신을 반복하는 위대한 예술가임을 알게 되었다.


완성된 ‘봉골레 파스타’ ⓒ

집 근처에 ‘여성가족프라자’라는 문화센터가 있다. 이름 그대로 여성 중심의 문화공간이다. 아내는 그곳에서 요가를 배우고 하모니카도 불며 삶의 여백을 채운다. 어느 날 다음 분기 강의 일정표를 가지고 오더니 “여보, ‘남자의 품격’ 이라는 고상한 명칭의 강의가 개설되었는데 참여해보지 않겠어요”라는 것이다. 저녁 시간에 아버지들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 강좌라며 들뜬 목소리로 배워 볼 것을 권유한다. 요즈음 남자들도 요리 몇 가지쯤을 할 수 있어야 대접받는다나. 괜찮을 것 같아 그러겠다고 하자 대신 등록까지 해준다. 개강할 때쯤 문화센터에서 ‘지원자가 적어 폐강되었다’라는 연락이 왔다. 아직도 남자들에게 요리는 여전히 문턱이 높은 세계인가 보다. 아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앞선다.


잡채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준비하는 작가와 짝꿍 ⓒ

요즈음 맞벌이 부부가 대세다 보니 남자들도 자연스레 주방에 들어선다. 딸이 해외 연수를 가자 사위도 육아휴직을 내어 같이 떠났다. 사는 모습을 볼 겸 여행 삼아 딸네에 가 보았다. 아침을 분주히 준비하고 아이들을 챙겨 등교시키는 사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들의 부엌 출입을 금기시하던 시절에 자라난 나이 든 세대는 생각도 못 했던 모습이 아니던가. 딸 부부가 각자 할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나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형태가 아니던가. 주부 노릇 하며 고생하는 사위를 보니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나는 어린 시절에는 배고프고 고생하며 보냈지만 좋은 시절에 태어난 행운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리하기 전 강사로부터 방법에 대해 설명 듣는 수강생들 ⓒ
강의실의 조리대 모습 ⓒ

한동안 잠잠하던 아내는 이번에는 인근 열린문화센터 아버지교실에서 요리 강의가 있다며 등록해 보라고 한다. 아내는 왜 요리를 배우라고 할까. 나이가 드니 은퇴한 남편 밥 해주는 것이 버거워진 걸까. 친구들과 마음 놓고 여행하고 싶은데 식사 챙겨줘야 하는 남편이 있으니 미안해서일까. 문득 뒷방 늙은이 취급받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강의 첫날, 16명의 정원은 꽉 차 있었다. 낯설어 하는 나와는 달리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듯한 재수강생들은 서로 인사도 나누며 익숙해 보였다. 조리 테이블마다 인덕션과 싱크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두 사람씩 짝지어 요리하는 시스템이다. 오십 대 직장인부터 칠십 대 느긋해 보이는 어르신까지 앞치마를 두르고, 눈빛은 반짝인다.


‘시리얼 샐러드’ 재료 ⓒ
‘시리얼 샐러드’ 완성된 작품 ⓒ

첫 수업은 ‘시리얼 샐러드’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다. 먼저 강의를 듣고 조별로 음식을 만든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팀은 호흡이 잘 맞는다. 짝꿍이 결석한 나는 혼자 맞은편 팀이 하는 것을 보며 고군분투했다. 옆 팀의 진행 상황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채소를 썰고 드레싱을 버무린다. 여기저기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다. 첫 작품을 아내에게 선보였더니 맛있다며 환하게 웃는다. 만족해하는 모습에 낯선 요리 여정의 고달픔이 덜어지는 듯싶다. 두 번째 수업은 ‘봉골레 파스타’다. 재료도 복잡하고 순서도 까다로웠다. 프린트한 노트를 보며 만드는데도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다. 세 번째 ‘단호박 해물찜’은 생각보다는 간단했지만, 완성된 요리는 어디에 내놔도 품격이 있어 보였다. 마지막 수업은 집에서 자주 먹어본 ‘잡채’ 다. 흔한 요리 같아 얕잡아 보이지만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요리다. 여러 재료를 한데 어우르는 그 정성 속에서 요리는 ‘손맛’ 뿐 아니라, ‘마음의 맛’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단호박 해물찜’ 속 재료를 넣는 장면 ⓒ
완성된 ‘단호박 해물찜’ ⓒ

한 달이 훌쩍 흘렀다. 다음 달 수업을 늦게 등록하는 바람에 정원이 차 나의 요리 강습 일정은 일단락되었다. 아내는 요리를 배웠으면 솜씨를 보여줘야 할 것이 아니냐며 재촉한다. 일요일 저녁에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어주겠다고 하자 아내는 조개와 파스타면 같은 기본 재료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둔다. 소금물에 조개를 해감하며 자신 있게 시작하였지만, 실습 때와는 달리 쉽지 않았다. 준비된 재료도 배울 때와는 다를 뿐 아니라, 함께할 동료도, 조언해 줄 선생도 없는 부엌에서 나 혼자 하려니까 무엇부터 해야 할지 어리둥절하다.

‘봉골레 파스타’ 조리방법 설명서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고 있는 작가 ⓒ

파스타는 먹을 때는 간단해 보이지만 재료가 동죽조개, 스파게티면, 파슬리, 마늘, 페페론치노와 함께 올리브유와 소금, 설탕, 후추 등 재료가 다양하고 만드는 순서도 복잡하다. 조리 방법과 순서를 필기한 강의 자료를 식탁에 펴놓고 면 삶고, 프라이팬에 오일 두르고, 볶다 보니 조리 순서가 엉키고 부재료도 빠지는 등 뒤죽박죽이다. 아내가 옆에서 도와준 덕분에 겨우 마무리하여 식탁에 올릴 수 있었다. 배울 때 만들었던 것보다 맛이 덜 한데도 아내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싱긋이 미소 짓는다.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가지 요리하는데도 이럴진대 매일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내는 주부들은 어쩌면 신이 빚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지 싶다. 아내는 사진을 찍어 딸에게 보여 주며 아빠의 생애 첫 요리라며 자랑까지 해주어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졌다.

설명서를 보며 요리를 하는 작가 ⓒ

아내가 매일 밥상을 차려 놓고 밥 먹으러 오라고 몇 번을 불러야 식탁에 앉았다. 종종 “겨우 이거야”라며 떨떠름했었다. 시답지 않게 구는 나에게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서운했을까. 늦은 감은 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요리 몇 가지쯤은 할 줄 아는 품격있는 남자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주방 문턱을 드나드는 나를 상상해 보지만, 글쎄다.


즐거운 마음으로 요리하는 작가 ⓒ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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