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2' 촬영 중
2006년 단편영화 '진실, 리트머스'로 데뷔한 이후 '파수꾼', '건축학개론', '박열',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탈주'를 비롯해 '시그널', '모범택시', '협상의 기술' 등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오가며 섬세한 연기력과 폭넓은 스펙트럼을 쌓아온 배우 이제훈이 신작 '소주전쟁'으로 돌아왔다.
'소주전쟁'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국민 소주 회사를 둘러싼 인수 전쟁을 그린 작품으로, 이제훈은 성과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글로벌 투자사 직원 인범 역을 맡아 냉철한 이성과 균열을 마주한 내면의 복합성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이제훈은 처음에는 인범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또렷한 목적의식과 효율 중심의 사고에 매력을 느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유해진이 연기한 종록이란 인물에 마음이 기울었다. 배우 뿐만 아니라 컴퍼니온 매니지먼트 수장으로써 대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기에 와닿는 지점들이 많았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인범 역할을 제안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인범은 요즘 세대가 생각하는 마인드와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느꼈어요.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캐릭터일 거라 생각했고요. 하지만 유해진 선배님과 대본 리딩을 하면서, 또 장면들을 하나씩 촬영해가면서는, 어느 순간부터 종록이라는 인물에게서 제가 겪어왔던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 투영되더라고요. 그래서 실제로 연기할 때 많이 동요 됐어요. 인범을 연기하면서도 점점 종록의 입장이 더 깊이 다가왔죠. 매니지먼트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종록이란 인물이 어떤 무게를 지고 있는지를 공감하고 있거든요."
인범은 겉으로는 부드럽고 논리적인 태도로 종록에게 접근하지만, 이면에는 철저히 계산된 판단과 전략이 깔려 있는 인물이다. 이제훈은 이러한 양면성을 지닌 캐릭터를 표현하며 복잡한 내면의 균열에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인범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강한 인물이에요. 동시에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컨설팅에 들어간 것이지, 처음부터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다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뭐든 상관없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문제였죠. 그 안에는 또 복합적인 감정이 있어요. 종록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위로해주고 싶으면서도 결국엔 배신하는 이중적인 감정이 있어요. 그래서 인범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요. 이 감정이 연기하면서도 강하게 다가왔고 시나리오 읽을 때도 가장 흥미로웠어요."
이제훈은 인범이라는 인물을 단순한 냉혈한으로 그리지 않기 위해, 종록과의 관계 안에서 점차 흔들리는 감정을 세밀하게 쌓아올리려 했다. 하지만 최종 편집 과정에서 일부 장면이 빠지며 그 서사가 온전히 담기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사실 인범이 종록을 만나 점차 가까워지고, 함께하면서 생기는 인간적인 순간들이 많았어요.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 종록이 실망하고, 인범이 죄책감과 갈등에 빠지는 장면들 등이 있었는데 많이 편집됐어요. 그래서 관객 입장에선 인범의 갈등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범을 연기하며 1997년 외환위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체화해 온 그는,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화두로도 기능하길 바라고 있었다.
"제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관객분들에게도 전해졌다면 의미가 있어요. 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시고, 그 안에서 공감도 하고, 다양한 이야기들도 끊임없이 나눠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소주전쟁'이라는 영화가 IMF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지금과 비교해보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해요."
드라마 '모범택시' 시리즈, '수사반장1958', '협상의 기술'부터 영화 '탈주'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쉼 없이 소화해온 이제훈은 이제 연기뿐 아니라 매니지먼트 운영까지 병행하며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진 채 지내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음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예전엔 작품이 끝나면 쉼을 요청했어요. 몰입했던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근데 요즘은 매니지먼트를 운영하다 보니, 일이 있다면 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바뀌었어요. 일에 대한 온오프가 예전엔 명확했는데, 지금은 그런 말조차 스스로에게 못하겠어요. 일이 곧 제가 된 거죠. 주변에서는 '열심히 일하시니 좀 쉬셔야죠' 하시는데, 전 벌써 내년에 일이 없을까봐 걱정하고 있어요. 저 스스로도 어떻게 컨설팅해야 할지, 조언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이제훈은 유튜브 콘텐츠 '제훈씨네'를 통해 전국의 독립예술영화관을 찾아다니며 그 공간이 지닌 매력과 독립영화의 생태를 조명하고 있다.스크린 안팎을 넘나들며 영화와 관객을 잇는 역할에도 애정을 드러낸 그는, 극장이야말로 영화가 가장 온전히 경험될 수 있는 공간이라 믿고 있었다.
"저도 이동하면서도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콘텐츠를 챙겨보지만,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온전한 경험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어둡고 집중된 공간에서 두 시간 동안 몰입할 수 있는 건 오직 극장에서만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영화관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요."
tvN 10주년 기념작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시그널'이 어느덧 20주년을 맞아 시즌2로 돌아온다. 현재 촬영에 한창인 '시그널2'에서 다시 한 번 과거와 현재를 잇는 형사 역할로 복귀한 이제훈은, 대중의 기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치열하게 촬영에 임하고 있다. 그는 긴 여운을 남겼던 전작의 감동을 다시 한번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시즌2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는 것 자체가 작가님 입장에서도 엄청난 부담일 거고, 출연한 배우로서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정말 흥분됐고, 이건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지금 정말 치열하고도 행복하게 촬영 중이에요."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