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경우가 있다. 주몽의 부인 소서노 입장에서는 갑자기 부여에서 온 유리왕자가 굴러온 돌이었을 것이고, 그 돌에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뽑혀나가는 걸 보고는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내려간 소서노의 두 아들 중 온조는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한성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박힌 돌이 있었다. 바로 삼한 중 하나이자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마한이었다. 54개의 소국으로 구성된 마한의 중심 국가는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에 자리 잡고 있던 목지국이었다.
처음에 온조가 한성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목지국이 허락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백제는 초반에 목지국의 눈치를 봤다. 그래서 공물을 바치거나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길 때 미리 통지했다. 통지라기보다는 사실상 허락을 받아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굴러온 돌답게 굽히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온조왕은 너무나 야망과 꿈이 큰 존재였다.
한성백제 박물관의 위례성 모형 (직접 촬영)
백제가 서서히 자리를 잡고 영역을 넓히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서기 6년에 온조왕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자 목지국의 왕이 항의를 한다. 처음 남하했을 때 불쌍한 사정을 봐줘서 땅을 주었는데 이렇게 함부로 영역을 침범해도 되는냐는 내용이었다. 항의를 받은 온조왕이 부끄러워하면서 목책을 허물었다는 기록을 보면 목지국의 왕이 한 말이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웅천은 마한과 백제의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백제가 그곳에 목책을 쌓았다는 것은 마한을 경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온조왕은 마한의 항의를 받고 한발 물러난다. 하지만 북쪽의 낙랑과 말갈의 침략을 막아내고 형인 비류의 세력까지 흡수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자 박힌 돌인 마한을 뽑아낼 궁리를 한다.
서기 8년 10월, 온조가 백제를 세운 지 26년째 되던 해, 드디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남쪽으로 군대를 진군시킨다. 그리고 종주국인 마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멸망시킨다. 정확하게는 목지국을 멸망시킨 것으로 보인다. 원산성과 금현성만이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다음 해 4월에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물론, 마한이 이때 완벽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목지국은 큰 타격을 받거나 사라졌고, 나머지 국가들 역시 백제에게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영역으로 완전히 흡수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백제는 목지국이라는 박힌 돌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목지국의 영역 근처에 대두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바로 나오는 걸 보면 통치나 감시를 위한 거점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종주국인 백제에게 고개를 숙이고 복종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품은 건 아니었다.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을 근거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친히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온조왕의 재위 34년째인 서기 16년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이다. 우곡성은 백제와 말갈과의 충돌하는 장소로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백제의 동북방인 경기도 동북쪽에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옛 장수이면서 우곡성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뜻은 몇 년 전 백제의 마한 기습공격 때 항복했거나 방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곡성이 원래 근거지였는지 아니면 마한이 멸망한 이후에 새로 배치받은 곳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문맥상 처자가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는 근거지였거나 휘하세력들이 통째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온조왕이 직접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벌에 나선 것을 보면 꽤 큰 규모의 반란으로 추정된다.
백제 초기 기록에 동원되는 병력은 수 백명 수준이 많았기 때문이다. 반란을 일으킨 주근의 병력도 최소한 1,000명은 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곡성의 뿐만 아니라 마한의 멸망 이후 백제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세력들이 모두 결집했을 수 도 있다. 일본 전국시대 후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정하지 못한 낭인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성에 모여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처럼 말이다.
우곡성의 주근은 아마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반란은 마한의 목지국을 기습 공격한 백제가 일으켰다. 목지국 국왕의 호의를 받아서 한수 유역에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게도 은혜를 베푼 목지국을 멸망시켰으니 말이다. 백제 본기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지만 아마 기습공격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목지국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을 했을 것이다. 저항하는 성들은 본보기삼아 심하게 파괴하고 학살을 저질렀을 수 도 있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주근과 마한 잔당에게는 이 싸움은 정의를 실현하는 싸움이자 잃어버린 목지국을 되찾는 올바른 일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마음은 온조왕이 이끄는 5,000명의 진압군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주근은 절망감에 목을 매어 자살했지만 시신은 두 토막이 났고, 가족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반란에 가담한 우곡성의 백성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온조왕에게는 가혹한 본보기를 보여줄 대상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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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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