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 소리도 듣고 꼴통이란 욕도 먹으며 지난 5년 동안 아스팔트에서 뛰었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않습니다. ”
진보 매체와 진보 혹은 좌파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은 10년만에 다시 기지개를 편 보수우파에 대해 의혹을 눈길을 던졌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보수우파가 과연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었다. 대세는 보수우파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지만 내부에서는 갈등과 분열의 마찰음이 들려온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결국 내분으로 보수우파는 갈라지고 또다시 진보좌파가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이같은 추측에 불을 당긴 것은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과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출마선언이었다. 승부가 나있는 듯 보이던 선거는 대선을 1달여 남기고도 한나라당 내부의 끊임없는 잡음과 ‘정통우파’의 인증을 확실히 받은 이회창 총재의 출마로 보수우파 전체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수우파는 권력을 되찾았고 6개월이 지났다. 예측도, 기대도 했지만 ‘가능하다’고 자신할 순 없었던 결과였다.
하지만 권력의 달콤한 맛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보수우파는 또 한번의 위기에 처했다.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공고히 하고 법치주의와 공권력을 확립시켜 주리라 기대했던 이명박 정부는 소극적이었고 다소 무기력하기까지 했다. ‘당선만 하면 혼란했던 사회도, 심각했던 갈등과 대립도 종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보수우파가 너무도 순진했던 것일까. 취임 100일도 지나지 않아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능력은 끊임없이 심판대에 올랐다.
덩달아 ‘잃어버린 10년’이라 규정하며 절치부심했던 기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동안 보수우파는 흔들렸다.
그 때문일까. 11일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한 오피스텔에서 만난 강승규씨(51)의 표정은 편안한 듯 보이는 한편으로는 불편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지만, 그의 표정은 큰 시험을 치르고 난 뒤 애써 초조함을 감추는 수험생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강승규씨는 ‘아스팔트 우파’로 분류되는 정통우파 출신이다. 정통우파 출신은 장차관급의 고위직 출신이나 법조인, 학자 등이 많다. 그럼에도 ‘보수우파 단체의 진로를 묻는다’는 주제를 생각했을 때 그를 떠올렸던 것은 보수우파의 밑바닥부터 훑어온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라이트코리아’ 공동대표를 지냈고 보수인터넷 매체의 성장과 구심점을 모으기 위해 처음으로 탄생한 보수인터넷언론단체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반김정일, 반노무현 기조가 뚜렷했던 탓에 ‘호전적이고 냉전적인 사고를 지녔다’ ‘극단적인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공격도 당했다.
2006년에는 전시작전통제권 단독 행사가 시기상 이르다며 이에 반대하는 가두활동을 벌이고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는 15일간의 단식을 벌이는가 하면 북한 핵실험 때는 금강산 및 개성관광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선을 앞둔 2007년에는 ‘친북좌익 척결’과 ‘대한민국헌법 수호’ ‘서민의 정치혁명’ 등을 내걸고 ‘바른한국당’이라는 군소정당을 창당했고, 노무현 정부 및 진보좌파 세력에 노골적인(?) 반대를 표시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대선 후보에 대해서도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고 북한의 우리민족끼리식 통일지상주의를 담은 민중가요를 어린이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토록 맹렬했던 강씨는 바른한국당 창당 이후 ‘조용히’ 지내왔다.
“1년에 평균 120회 가량 시위를 했더군요. 3일에 1번꼴인 셈이죠. 그렇게 3년쯤 지나니 기력이 소진했나 봅니다.”
멋쩍은 웃음으로 말을 넘기던 강씨는 “정말 몸과 마음을 불살랐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 때는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이 있어서 추운줄도, 힘든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뉴욕중앙일보 기자였던 강씨가 아스팔트 보수 투사로 변신한 계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기사를 쓰면서부터였다. 김 전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쓰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진보좌파의 실체를 접하는 일도 늘면서 ‘우리 사회가 이랬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북한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모양새를 그대로인데도 이를 ‘평화’라 부르는 것에 반발심도 느꼈다. 술에 취하듯 국민들은 자유와 평화의 단 맛에 빠졌고, 권리는 주장하지만 의무는 없는 기이한 현상도 늘어갔다. 자유와 자유가 부딪치고 거리로 나와 구호를 외치는 게 훈장이 됐다. 그래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고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그에게 “편협하다”고 질타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 자만심은 없었습니다.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는 건 막아야겠다, 길고 긴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기초가 확실히 서는 사회가 되게 하자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처럼 그렇게 원칙은 통하는 사회가 되게 하자고 보수쪽 인사들과 많이 얘길 나눴지요.”
강씨는 “꼭 투사가 될 마음은 없었는데 어느새 투사처럼 돼 있었다”고 웃었다. “아무리 말해도 위에까진 들리지 않으니 점점 더 강한 액션을 취하게 됐고 점차 보수우파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것에 비례해서 투쟁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씨는 “보수우파는 노무현 정부에 ‘법치’와 ‘원칙’을 요구했지만 노 정부와 우리의 지향점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며 “그러다 보니 점차 ‘반정부’의 색채가 더욱 강하게 나타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보수우파=반노무현 세력 또는 반진보좌파세력으로 도식화되어 활동 반경은 오히려 좁아졌다.
“그때는 ‘보수우파 정권 창출’이 염원이자 목표였죠. 그러다 보니 반노무현의 공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요. 그런데 문제는 ‘포스트 노무현’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만 정권이 바뀌면, 보수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잘해주리라고 믿고 낙관했던 모양입니다.”
강씨는 “좀더 폭넓고 깊게 봤어야 했다”며 “정부에 대한 반발이 많았던 만큼, 반노무현 기조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를 포괄할 수 있는 큰 의제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보수우파는 이를 놓쳤다”고 말했다.
이념 외에 정책개발이나 비전제시, 시민사회단체로의 변모나 다양한 실험으로 내적인 공력을 쌓는 것에는 소홀했다는 지적.
강씨는 “우리의 목적은 굉장히 정치적이었지만 ‘정권 교체’라는 단순한 논리만큼이나 준비도 단선적이었다. 정권 창출 이후의 위치나 정부와의 관계, 중립성이나 객관성 확보의 방안은 이론적이고 막연했다”면서 “지금 ‘편향적’이라든가 ‘정부 나팔수’ 등의 비난은 보수우파의 준비 부족에서도 어느 정도는 기인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 시민사회세력이 치면 정치권이 이를 받고 정부가 다시 이를 토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았고 이를 비판했습니다. 물론, 현대의 정치라는 것이 정파에 관계없이 국민의 동의만으로 국정을 움직이는, ‘이상적인’ 형태가 되긴 어렵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와 비슷한 부분도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변단체나 정부 대변인으로 전락한 채 5년을 보내는 일은 적어도 없으리란 게 제 생각입니다.”
강씨는 현재 보수우파가 지리멸렬해 보이는 요인으로 ‘건강한 견제’ 관계를 유지해줘야 할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는데다 보수우파의 구심점이 없는 점을 꼽았다. “보수우파의 세력은 강해졌지만 아직 10년 간의 진보좌파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보수적 가치를 통합하고 창조해 낼 인물이 없다. 질보다 양, 컨텐츠보다 외형에 의존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강씨는 “단일대오도 누군가 중심에 서야 한다. 누군가가 선봉장에 서길 기다리다간 깊은 감정의 골만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우파는 대선과 총선을 치르면서 싱크탱크형 지식인 그룹과 투사형 그룹으로 분화, 자리를 굳히고 있다. 뉴라이트와 중도보수에 해당하는 그룹은 전자라면 아스팔트 우파와 정통우파는 후자다. 그러나 양측은 상대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들은 상대방을 ‘꼴통보수’(정통우파) ‘빨갱이’(뉴라이트 빛 중도보수)로 간주한다. 심지어 뉴라이트 및 중도보수는 “길에서 투쟁만 했다”고 정통우파는 비판하고 반대로 정통우파는 뉴라이트 및 중도보수를 향해 “탁상공론 외에 뭘 했나”고 일침한다.
강씨는 “보수우파는 ‘돌아온 탕자’에 관대하지 못하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현대사의 험난한 시기를 거쳐 온 정통우파 입장에서는 흑백논리가 원칙이었을 수 있다”며 “이젠 서로의 반목을 끝내고 단일대오가 절실하다는 것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으니,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씨가 생각하는 보수우파의 내일은 결국 단일대오다. 이는 이미 대선을 앞둔 2006년부터 지속적으로 나왔던 주제다. 그러나 번번히 느슨한 연대에 그쳤고 그나마도 명목에 불과했다.
“진보좌파의 ‘으샤으샤’하는 분위기는 없습니다. 나이가 많아서라고요? 뉴라이트나 중도보수쪽에는 젊은 친구들도 많아요. 그런데도 정체된 느낌이 듭니다. 보수우파 운동은 그동안 자기를 희생하고 불이익을 감수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비교적 경험과 연륜이 많고 인내심도 강한 ‘어른’들은 남아 있고 젊은 친구들은 한쪽발만 담그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상운동이나 투쟁은 본질적으로 좌우의 형태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보수우파에 대한 선입관도 상당히 남아 있어요. 또 어르신 중에는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며, 자신의 노하우가 필요할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거나 자만하는 분도 있고요. 결국 이와 같은 점들이 총체적으로 보수우파 내의 기득권 싸움이나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연결되면서 ‘연대’가 어려웠던 겁니다.”
그는 “정통우파와 뉴라이트 밒 중도보수는 각자의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고 이를 인식하고 있다. 현장의 경험에 이론적 전문성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고 양측 간 괴리를 없애기 위해 교류를 활발히 하는 게 급선무”라며 “어느 한 단체나 인물이 기득권을 점유하지 않고 공존하는 방안을 심사숙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강씨는 구심점이 될 만한 세력이나 인물은 양측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국이나 산업화, 대북관이나 역사관, 사상적 지향점에서 겹쳐지는 부분들을 극명히 나타내는 인물 또는 세력이라야 한다는 것. 보수우파 안에서의 소통과 상생도 구심점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더불어 강씨는 난립한 싱크탱크들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우파형 민화협이나 참여연대, 한국형 헤리티지 재단이 탄생하려면 분산된 인재양성의 기능을 일단은 하나로 모으는 게 중요합니다. 아직 보수우파는 후대를 양성할 수 있는 충분한 자생력과 노하우가 많지 않으니까요.”
강씨는 “보수우파는 대선 이후 ‘무얼해야 하나’라는 허탈감에 빠졌다. 특정 단체에 힘이 쏠리는 걸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며 “하지만 촛불집회와 광우병 쇠고기 사태를 겪으며 자성과 쇄신, 아스팔트의 야성이 필요하다고 절감하는 분위기가 됐다. 싱크탱크로 전환한 곳은 일단 제외하더라도 어느 정도 투쟁으로 선회하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전했다.
“굉장히 원론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반노무현에서 반진보좌파로, 다시 국가 전체로 관심을 돌리고 아무것도 없었던 10년 전의 자세로 돌아가는 게 보수우파의 살 길입니다. 가지려 했거나 또는 가지고 싶었던 것은 내려놓고 쓴소리도 마다않는 맹성과 건강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보수우파는 지금 체력이 소진돼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숨고르기가 끝나면 다시 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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