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고의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컨슈머'들로 인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연합뉴스
#한 고객이 A은행 상담센터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뱅킹하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이 고객은 1시간이 넘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다. 며칠 후 이 고객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스마트폰으로 특정 사이트에 접속이 안 된다는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이 고객은 "이 문제 때문에 내가 청심환을 먹으면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보상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고객은 한 달동안 같은 내용으로 6차례에 걸쳐 항의전화를 하는 통에 다른 상담 건을 처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은행권이 고의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컨슈머'와 전쟁 중이다.
블랙컨슈머의 악성 민원은 은행원들의 업무에 지장을 주고 결국 일반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 지연 등의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에 은행들은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상황이다.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중은행들은 이 같은 악성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민원유형별 전담자를 지정하거나 민원해결 전담팀을 운영하면서 은행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애를 쓰고 있지만 억지를 부리는 블랙컨슈머들에게는 속수무책이다. 은행 측에서 "법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해도 통하지 않는다.
트집을 잡으며 달려드는 통에 은행 측에서는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백기를 들고 투항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1일 금융권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상반기 중 금융소비자보호처에 접수된 금융민원은 4만2582건으로 전년 같은기간 3만8661건)보다 10.1% 증가했다. 금융상담은 19만2701건으로 전년동기 대비 6.6% 감소했다.
블랙컨슈머의 유형은 가지각색이다. 억지 민원을 넣고 트집을 잡아 보상을 요구하거나 이유 없는 화풀이, 욕설은 기본이다. 블랙컨슈머로부터의 전화가 울리면 상담사들은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상담을 거부할 정도다.
'상품·금품갈취형' 블랙컨슈머…은행 "거절할 명분이 없어"
은행권에서 가장 많은 블랙컨슈머 유형은 '상품·금품 갈취형'이다. 사은품 등을 노리고 금융상품에 가입했다가 곧바로 해지를 하거나 은행원의 실수를 유도해 현금 보상을 요구하는 유형이다.
A은행의 경우 예·적금 거래 고객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소액의 사은품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 블랙컨슈머는 이를 이용, 다량의 사은품을 챙겨갔다.
이 블랙컨슈머는 자신과 자녀들의 명의로 각각 소액의 적금을 가입, 가입계좌수만큼 사은품을 요구했다. 사은품을 받은 직후에는 20여개에 이르는 계좌를 해지했다. A은행 직원은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지만 고객의 요청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천만원대 이상 고액의 금융상품을 가입하는 고객들의 경우 고가의 특정 브랜드 상품을 사은품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B은행 관계자는 "일부러 상담·설명이 어려운 민원을 제기해 직원의 실수를 유도하는 고객들도 있다"면서 "만약 상담원이 실수를 하면 이를 핑계로 현금보상을 요구하는 악성 민원이 많다"고 말했다.
'억지·화풀이형' 블랙컨슈머…"1만21원 찾았는데 왜 1만30원주냐"
괜한 억지나 화풀이를 하는 고객도 전형적인 블랙컨슈머 유형 중 하나다. 고객에게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은행 입장에서 억지를 부리는 민원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힘들다.
C은행에서는 자신의 계좌에서 1만21원을 찾은 고객이 창구에서 난동을 부려 직원들이 아연실색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고객은 "1만21원 찾았는데 왜 1만30원을 주나. 빨리 1원을 내놔라"며 고성을 내뱉었다.
1원과 5원 동전의 경우 지난 2006년 한국은행에서 발행을 중단했다. 현재 시중에 5억5800만원 규모의 1원 동전과 10억7800만원 규모의 5원 동전이 풀려있지만 실제 유통되는 규모나 건수는 미미한 실정이다.
돈을 쌓아두는 은행이더라도 1원과 5원동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때문에 은행에서는 1원 단위의 예금을 지불할 때 십 원 단위로 올려서 고객에게 제공한다. 11원을 찾는 고객에게 20원으로 지불하는 식이다.
C은행 관계자는 "해당 고객은 1원을 요구하며 민원을 제기했지만 직원들이 한동안 그 고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30원을 주는 선에서 일단락됐다"고 말했다.
은행영업점에 전화를 걸어 "내 거래 내역을 일일이 다 얘기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고객도 있다. 상담원이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어김없이 고성과 폭언이 이어진다. 장시간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은행의 모든 상품 등에 대한 '리포팅'을 요구하기도 한다.
B은행 관계자는 "장시간동안 은행과의 모든 거래와 모든 상품에 대한 리포팅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상당수"라면서 "끊임없이 같은 문의를 재접수시키면서 정상적인 업무를 방해하고 이 때문에 상담원들이 전화를 기피하게 한다"고 말했다.
상거래를 하다가 사기를 당한 고객이 D은행을 찾아와 "사기꾼을 찾아달라"는 요구를 한 사례도 있다.
해당 민원이 해결되지 않자 이 고객은 지점장과의 통화를 요구하기도 하고 영업점을 찾아와 폭언과 폭행까지 일삼았다.
D은행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상거래 사기는 중개나 지급정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은행 측에서 해줄 사항은 아니었다"면서 "하지만 민원인의 폭언과 욕설 때문에 민원인과 거래했던 사람에게 10여 차례 연락했지만 상대 쪽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블랙컨슈머의 사례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 또다시 이를 빌미로 악성민원을 제기할까 두렵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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