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시되는 자동차들을 보면 '크로스오버'라는 수식어를 붙인 모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좋게 보면 세단이나 쿠페, 해치백, SUV 등 여러 장르의 특성을 집약한 것이고, 거칠게 표현하면, 기존 정형화된 차급으로 구분하기 애매해 에둘러 갖다 붙인 이름 같기도 하다.
혼다 크로스투어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크로스오버 차종 중에서도 차급을 정의하기가 가장 애매한 모델이다.
처음 크로스투어의 예쁘장하면서도 날렵한 스타일에 반해 시승을 요청했지만, 막상 시승을 해보니 이녀석은 여러 차례 의외성을 보이며 기자를 놀라게 했다.
일단 크로스투어의 디자인은 5m가 넘는 거대한 차체에 적합한 모습이 아니다.
멀리서 보면, 그리고 주변에 크기를 비교할 만한 사물이 없다면 크로스투어는 작고 날렵한 쿠페로 착각될 만한 모습이다.
하지만 막상 차에 올라보면 의외로 거대한 실내공간과 볼륨 있는 차체에 놀라게 된다.
커다란 헤드램프와 그릴, 길쭉하게 튀어나온 엔진룸, 울룩불룩 튀어나온 측면부 등 전체적으로 모든 게 큼직큼직하다. 심지어는 사이드미러도 크다.
이처럼 모든 사이즈가 크다 보니 전체적인 비례는 조화를 이룬다. 덩치가 큰 사람은 머리가 좀 커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의 디자인 그대로 5분의 4 비례로 축소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내부공간도 상당히 넓고 안락하다. 넓이로는 준대형 세단 못지않고, 높이도 웬만한 SUV 이상이다.
크로스투어 트렁크. 뒷좌석을 접은 모습(왼쪽)과 언더 카고박스를 꺼낸 모습(오른쪽)
트렁크도 넓다. 쿠페 디자인을 적용하느라 루프 뒤쪽을 깎아내 높이에서 손해를 봤지만, 수평 넓이만큼은 누워서 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어 보인다.
트렁크 바닥을 들어내면 큼직한 카고박스도 있다. 카고박스를 포함한 기본 트렁크 용량이 455ℓ, 뒷좌석을 접으면 1453ℓ에 달한다. 뒷좌석은 버튼 하나로 접힌다.
커다란 덩치를 지녔지만 움직임은 날렵하다. V6 3.5ℓ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의 조합은 최대출력 282ps, 최대토크 34.8kg·m를 뿜어내며 1790kg의 차체를 가볍게 잡아끈다.
고속도로에서의 급가속에도 엔진은 무리 없이 따라주고, 차체가 묵직해서인지 고속주행 안정성도 뛰어나다. 세단에 비해 전고가 높은 편이지만, SUV와 같이 붕 뜨는 느낌도 없다.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최고급 세단과 같은 정숙성이다. 단순히 흡·차음재를 많이 사용했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일단 혼다의 i-VTEC 엔진은 굉장히 조용하고 얌전하다. 시동 후 저속주행까지는 하이브리드카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엔진 소음이 거의 없이 조용히 굴러간다. 창문을 열어도 마찬가지다.
속도를 높이느라 급격히 엔진회전수를 늘려도 그르렁 거리는 정도의 소리만 낼 뿐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은 없다.
서스펜션 튜닝도 역동적인 주행보다는 고급스런 승차감에 중점을 맞춘 듯하다.
한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놓은 크로스투어. 차체가 길어 일부분이 주차선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자, 그동안 하나의 차종으로 서로 쉽게 매치되기 힘든 '넓고 편안한 실내공간'과 '개성 있는 스타일', '날렵한 주행성능'을 동시에 만끽했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통상 공간 효율성을 최대화하려는 노력은 디자인적 자유를 상당 부분 침해할 수밖에 없다. 역으로, 디자인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이곳저곳을 깎아내고 붙이고 하다 보면 차체 크기 대비 실내공간에서 손해를 볼 여지가 크다. 쿠페의 실내공간이 좁고, SUV의 디자인이 다 거기서 거기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크로스투어는 넓은 실내공간과 개성 있는 스타일을 동시에 갖춘 차다. 실내공간은 실내공간대로 넓히고, 스타일을 위한 외부 공간도 상당 부분 할애했다는 의미다.
그렇게 하려면 상식적으로 차체가 뚱뚱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 문을 열어보면 문짝 두께가 상당히 두껍다.
크로스투어는 전장이 5015㎜, 전폭이 1900㎜, 전고가 1560㎜에 달한다. 중형 세단인 어코드(4890×1850×1465)와 같은 플랫폼을 사용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는 대형 SUV인 현대차 맥스크루즈와 비교해도 전장이 100㎜ 길고, 전폭이 15㎜ 넓다.
특히, 도드라지게 길게 뻗은 엔진룸은 디자인적으로는 크로스투어를 날렵해보이게 하지만 좁은 골목길이나 주차장에서는 운전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차라리 뒤가 길면 모르겠지만, 운전석 앞쪽이 길어버리니 회전시 접촉위험간격이 운전자에 머리에 입력된 통상적인 차량의 회전각을 벗어나 버린다.
크로스투어의 3500cc 엔진은 큼직한 차체를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파워는 제공하지만, '밥통'이 큰 만큼 '밥'도 많이 먹는다. 정체가 심한 출퇴근길 시내주행에서는 5km/ℓ대가 나왔고, 고속도로에서는 연비를 신경 쓰며 주행하니 10km/ℓ를 조금 넘는다. 공인연비는 복합연비 기준 9.9km/ℓ다.
다른 혼다의 해치백, 혹은 SUV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상하로 분리된 두 개의 뒷유리는 룸미러로 후방을 살피는 데 거슬리는 요인이 된다. 다만 크로스투어는 우측 후방 사각 지대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레인 워치(Lane Watch) 시스템과 큼직한 사이드미러가 후방 시야를 커버해 준다.
확실히 크로스투어는 '무난한' 차는 아니다. 하지만, 넓은 실내공간과 개성 있는 스타일 모두를 원하는 소비자에게 크로스투어만큼 적합한 차는 없을 것 같다.
단, 주차장에서 큼직한 머리통(?)을 잘 컨트롤할 자신이 있고, 4690만원(단일트림)의 가격을 부담할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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