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폭력, 드라마 전개·극적 반전 위한 장치로 소모하면 안돼"
현실에선 해마다 교제폭력 신고가 급증하고 있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여전히 서사의 장치로만 가볍게 소비되고 있다. 극적인 긴장감을 위해 폭력을 다루는 작품들이 현재 사회 분위기와 괴리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SBS
SBS 금토드라마 ‘우주메리미’가 폭력적인 장면으로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이전 회차에서도 불법촬영과 교제폭력 장면에 대한 비판을 받았는데, 9화에서도 전 약혼자가 여주인공을 위협하고 손찌검을 시도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이날 방송에서 전 약혼자 김우주(서범준 분)는 혼인신고서를 발급받아 유메리(정소민 분)와 자신이 여전히 혼인 관계임을 확인하고, 메리가 최고급 타운하우스에 당첨된 후 가짜 남편을 내세워 경품을 수령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는 메리에게 명순당 4세 김우주(최우식 분)가 가짜 남편 행세를 한 것을 폭로하겠다며 협박했고 마당에서 메리의 손목을 잡고 위협하거나 손찌검을 시도하려는 듯한 장면이 이어졌다. 남자 주인공이 이를 제지하며 상황은 마무리됐지만 폭력적 서사가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지난 6화에서는 전 약혼자가 메리를 미행하고 무단으로 집에 침입해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는 메리를 향해 “너 그새 바람났어?”라며 몰아세운 뒤 벽에 걸린 웨딩사진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메리와 어둠 속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교제폭력을 다루는 연출도 문제지만 해당 장면에 삽입된 비지엠(bgm)은 주거침입을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연출해 상황의 무게를 가볍게 흘려보냈다.
교제폭력을 드라마의 서사로 이용하는 건 비단 ‘우주메리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8월 방영된 JTBC 주말드라마 ‘에스콰이어: 변호사를 꿈꾸는 변호사들’ 6화 ‘사랑도 심신미약’ 편에서도 교제폭력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의뢰인 설은영(천희주 분)은 전 남자친구 정한석(최정우 분)으로부터 강압적 성관계와 폭행을 당해 전신에 흉터가 남았고, 생업이던 모델 일을 잃고 삶이 무너지고 이별 후에도 상대가 자신을 조종하려는 듯한 행동을 계속하자 상해죄 고소를 의뢰한다. 그러나 전 남자친구가 모바일 게임사 대표로 사회적 지위가 높고 의뢰인 역시 화풀이할 목적이 더 컸다며 치료비와 법률비용만을 청구한다. 이후 은영은 “좋았던 순간은 왜곡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사건이 끝나는데, 전 남자친구의 폭력으로 삶이 파괴됐음에도 미온한 태도와 합의로 마무리 되며 일부에서는 교제폭력의 심각성을 희석시켰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편 현실에서는 교제폭력 범죄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9월 발간한 보고서 ‘반복되는 교제폭력,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따르면 경찰에 접수된 스토킹 신고 건수는 2020년 4513건에서 2024년 3만1947건으로 약 7배 늘었다. 보고서는 “스토킹과 교제폭력 사건이 관계의 특성상 반복적·지속적으로 발생하지만 피해자 보호체계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현행 ‘스토킹처벌법’이 가해자의 행위 중단이나 접근금지 조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장기적·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교제폭력에는 대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응급조치와 잠정조치의 실효성이 부족하고 보호조치 기간이 1개월 이내로 짧으며, 접근금지 위반에 대한 처벌도 미비해 피해자가 재차 가해에 노출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바른손이앤에이
교제폭력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 방식이 중요한 시점이다. 교제폭력 서사가 정말 필요했는지, 그렇다면 제대로 다뤘는지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교제폭력은 피해자에게 심리적·신체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기는 사안인 만큼 로맨스 전개나 극적 반전을 위한 장치로 소모하면 안 된다”며 “소재 자체보다 어떻게 다루느냐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 정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면 콘텐츠가 2차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다”며 “굳이 그 소재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면 그 선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평론가는 "다행히도 교제폭력 외에도 성폭력, 가정폭력 등의 소재를 무겁고 신중하게 다루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며 "영화 '세계의 주인',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 등 폭력을 자극 대신 피해자 관점과 회복의 서사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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