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자사주 소각 의무화 핵심 3차 상법 개정 추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주주환원 강화 명분 내세워
해외 주요국 의무 소각 사례 드문데…韓만 강제 우려
"경영권 방어 수단 박탈" "기업 자율성 침해해" 비판
정치권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주주환원 강화'를 내세우며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자사주 의무 소각으로 인한 주주환원 효과는 제한적인 반면, 경영권 방어 수단과 재무적 완충 장치는 동시에 잃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강한 우려를 제기한다. 의무 소각이 법제화될 경우, 기업들이 경기 침체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이 줄고, 외국계 자본이나 적대적 M&A 공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9월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핵심으로 하는 3차 상법 개정안을 처리할 계획이다. 3차 상법 개정안은 ▲자사주 취득 즉시 또는 최대 1년 이내 소각 의무화 ▲기존 보유 자사주는 법 시행 6개월 또는 최대 5년 내 소각 의무화가 골자다.
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 소속 김남근 의원이 대표발의한 상법 일부개정안과 민병덕 의원안은 자사주 의무 소각 시기를 취득일 기준 1년 내로 정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안은 취득 후 6개월 이내, 김현정 민주당 의원안은 취득 즉시 소각하도록 했다.
법 시행 이전에 상장사가 보유한 자사주 역시 해당 기한 안에 소각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차규근 의원안은 기존 자사주의 경우 법 시행일로부터 5년 이내에 소각하도록 규정했다.
예외 규정도 있다. ▲임직원 보상 ▲주식매수선택권 행사에 따른 자기주식 양도 ▲공모 전환사채 권리 행사 등은 예외적으로 자사주가 가능하다. 김남근 의원안은 필요할 경우 정기 주주총회 승인을 거쳐야 하고, 승인받지 못하면 즉시 소각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자사주 소각은 발행 주식 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을 높이는 효과가 있어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으로 꼽힌다. 민주당은 이를 통해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끌어올리고 장기간 한국 증시를 짓눌러온 '저평가'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코스피 5000' 진입을 위한 발판이라는 구상이다. 민주당은 전문가와 재계 의견을 적극 수렴해가며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의 시각은 다르다. 한국 증시 저평가는 단순히 주주환원 부족 때문이 아니라, 불확실한 규제 환경, 복잡한 지배구조, 거시경제 요인 등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게 재계의 반론이다.
자사주는 그동안 단순한 주가 관리 수단을 넘어 경영권을 지키는 핵심 카드로 쓰여왔다. 일례로 SK그룹은 2003년 헤지번트 소버린이 지분 14.99%를 확보해 경영권을 위협했을 당시, 자사주 4.5%를 채권은행 등 우호세력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방어에 성공했다. 2000년 스위스 다국적 기업 쉰들러의 현대엘리베이터 공격, 2018년 엘리엇의 현대자동차 공격 사례에서도 자사주 활용으로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한 전례가 있다.
한진칼도 최근 자사주를 사내근로복지지금에 출연하면서 호반그룹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방어 둑을 높였다고 해석된다. 한진칼은 지난 5월 열린 이사회에서 44만44주를 사내근로복지기금 출연하기로 결의했고, 지난 18일 출연 마무리를 공시했다. 이로 인해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측 지분은 20.02%에서 20.68%로 증가했다. 우호지분으로 여겨지는 델타항공 14.90%, 산업은행 10.58% 지분까지 합치면 총 46.16%가 돼 18.46%의 호반그룹 지분과 격차를 27.7%p로 벌렸다.
전문가들은 자사주 의무 소각이 국내 기업들을 외국 자본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변변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는 우리나라에 자사주는 금융자본으로부터 국내 산업 경쟁력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법 개정을 통해 기업의 순이익 유출을 강화하고 경영권을 강제로 분산하는 초유의 규제까지 도입돼 외국 금융자본의 경영권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다"며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최후의 경영권 방어 수단마저 박탈하면 결국 금융자본에 의해 산업 경쟁력은 사망 선고를 받는다"고 덧붙였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역시 "자사주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돼 왔다"며 "모든 판단은 자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의사 결정도 본인이 내리고 그 효과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인데 외부에서 강요를 하는 건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재무적 측면에서도 우려는 크다. 자사주는 필요 시 매각해 현금을 조달할 수 있는 '비상금'이자 전략적 제휴 과정에서도 활용 가능한 자산이다. 경기 침체기에 현금 비중을 높여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 자사주 의무 소각은 자금 운용의 유연성을 크게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자사주를 살 사람이 앞으로 이걸 과연 사겠느냐"며 "지금까지 자사주를 쓸 수 있는 자유가 어느 정도 있었는데 이게 줄어든다는 이야기로 이해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미국, 영국, 일본은 자사주 소각을 법적으로 강제하지 않는다. 독일만 자본금의 10%를 초과하는 자사주에 한해 3년 내 소각을 요구하고 있다. 대신 이들 국가는 자사주를 제3자에게 넘길 때 주주 보호 장치를 엄격히 두고 있어 한국과 차이를 보인다.
김춘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정책1본부장은 최근 민주당 코스피 5000 특위 주최 토론회에서 "자기주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면 소각 의무가 아닌 처분 시 신주발행 제도를 준용하며 처분 공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유연한 자금운용 보장과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을 통한 보완 조치가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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