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작 '세이렌'
음악이 말보다 더 많은 걸 전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JTBC 드라마 '굿보이'에서 허성진 음악감독이 맡은 역할이 그랬다. 액션, 코미디, 로맨스가 어우러진 이 장르적 혼합 속에서 그는 인물의 내면과 이야기의 방향을 음악으로 끌어안는다.
2021년 티빙 '마녀식당으로 오세요'를 통해 정식으로 음악감독 데뷔를 한 그는, 이후 tvN '성스러운 아이돌', 티빙 '개미가 타고 있어요',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에 이어, 올해 JTBC 화제작 ‘굿보이’까지 음악까지 책임지며 자신만의 사운드 서사를 구축했다.
허성진 음악감독은 ‘굿보이’ 참여 제안을 받았던 시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에 심나연 감독님의 작품을 정말 좋아했어요. 연출력이 탄탄하고 섬세하신 분이니까요. 그런 감독님께서 제 작업을 보시고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주셨어요. 처음 전화 받았던 날이 제 생일이었는데, 부모님과 밥을 먹고 있었어요. 감정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날이었죠. 첫 미팅 때는 대본도 없이 저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고, 이야기를 나누고 대본을 건네주셨어요."
심나연 감독은 연출은 물론 음악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스타일이었다. 허성진 음악감독 역시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함께 방향을 조율하며 완성해가는 방식을 추구했다. 그렇게 시작된 '굿보이'의 음악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밀도 높은 협업으로 이어졌다.
"감독님은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음악 감독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싶어 하셨어요. 저는 보통 대본을 읽고 사전에 곡을 구상하되, 현장 상황이나 편집본을 보며 디벨롭해가는 스타일인데, 그런 방식이 감독님과 잘 맞았던 거죠. 심나연 감독님은 음악을 단순 삽입물이 아닌 서사와 감정의 연장선으로 보시더라고요. 음악이 어떤 장면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작품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감각이 확실하신 분이라, 저도 많은 걸 배우며 작업했어요."
'굿보이'는 액션, 코믹, 멜로, 성장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는 작품이다. 각 캐릭터의 감정선도 복합적이고 깊어서, 한두 가지 톤으로는 담을 수 없어 OST 7곡 모두 장르와 색깔이 다 다르게 작업했다.
OST 라인업에는 맥스(MAX)의 ‘겟 인 더 링(Get In The Ring)’을 시작으로, 데이식스(DAY6) 영케이(Young K)의 ‘나무가 될게’, 박혜원(HYNN)의 ‘날 안아, 사랑으로’, 투어스(TWS)의 ‘브랜드 뉴 데이(Brand New Day)’, 죠지(George)의 ‘올 얼론(All Alone)’, 주니(JUNNY)와 캣츠아이(KATSEYE)의 편곡 버전 솔로곡들 ‘타임 랩스(Time Lapse)’, 박보검의 ‘날 찾아가는 길’까지 각기 다른 매력을 담은 곡들이 채워졌다.
1년이 넘는 제작 기간 동안 치열하게 다듬어진 곡들이다. 허 감독은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 중 가장 긴 시간을 들였던 만큼, 그만큼 더 깊은 애정을 담게 됐다”며 웃었다.
"'겟 인 더 링'은 루저처럼 보일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청춘을 응원하는 곡이에요. '브랜드 뉴 데이'는 다시 시작하는 하루에 대한 희망을, ‘올 얼론'은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내면의 외로움을 안고 사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고 싶었고요. 박보검 배우가 직접 부른 '날 찾아가는 길'은 결국 모든 여정이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영케이의 '나무가 될게'는 사랑의 관계에서 '그늘이 되어 줄게'라는 말처럼, 말하지 않아도 곁을 지키는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메인타이틀 격인 맥스의 '겟 인 더 링'은 이례적으로 해외 아티스트가 국내 드라마 OST를 부른 사례로, 음악적으로도 제작 방식에서도 도전적인 시도였다. 이 곡은 단순 삽입곡을 넘어, '굿보이'의 첫 오프닝과 1부의 클라이맥스를 모두 장식하며 작품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핵심 테마로 기능했다.
"이 곡을 부를 가창자로 국내외 아티스트를 모두 고려해서 서칭을 많이 했어요. 그 중 맥스가 가진 특유의 보컬 컬러와 이 곡이 잘 어울릴 것 같았죠. 원래는 이런 장르를 하시던 분은 아니지만, 그 이질감이 오히려 음악을 돋보이게 했죠. 제안 드렸을 때 맥스가 흔쾌히 응해줘 고마웠어요."
'날 찾아가는 길'은 주연 배우 박보검이 직접 가창자로 나서 화제가 됐던 곡이다.
"박보검 씨의 깊은 목소리와 섬세한 감정 표현력이 놀랐어요. 노래를 너무 잘 하시더라고요. '날 찾아가는길'이라는 곡이 리듬과 멜로디가 어려워요. 그래서 녹음실도 2프로(8시간) 여유있게 잡아뒀는데 거의 2시간 만에 끝났어요. '굿보이' 작품을 하면서 박보검 씨를 보며 참 많은 감동을 받기도 했어요. 박보검 씨는 같이 작품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잘하고 싶게 만드는 좋은 에너지를 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작품을 하는 동안 너무 행복했습니다."
영케이와의 작업도 인상적이었다.
"데이식스 영케이 님의 목소리와 가삿말을 팬으로서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꼭 함께 작업해 보고 싶었는데, 이번 OST에서 첫 녹음곡으로 참여해 주셨어요. 녹음할 때 톤이나 감정 디테일이 너무 좋아서, 킵 테이크까지도 버릴 게 없을 정도였어요."
앞서 언급했듯 ‘굿보이’의 음악은 1년 2개월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준비 기간을 거쳤다. 통상 드라마 OST는 6개월 안팎으로 제작되고는 한다. 허 감독은 긴 준비 기간 동안 곡의 성격과 톤, 감정의 미세한 결까지 완성도 있게 다듬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준비 기간이 길어진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더 디테일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겟 인 더 링'은 제 기준의 '100점'을 만들기 위해 10가지가 넘는 편곡 버전을 시도했죠. 제작사나 스태프 모두 충분하다고 했지만, 저는 살짝 부족하다고 느껴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른 편곡을 시도해봤어요. 완성된 버전 외에도 변형된 트랙들이 실제 방송에도 활용된 걸 보고 결국 모든 시도가 의미있는 결과로 이어져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꼈죠."
지난 20일, 드라마 ‘굿보이’의 전체 음악 앨범이 발매됐다. 총 50곡에 달하는 다채롭고 풍성한 스코어 트랙은 한 편의 음악 서사시처럼 드라마의 감정선을 따라 흐른다.
"저희 음악팀은 다른 팀들에 비해 소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의 모든 곡을 함께 의논하고 작업해요. 그만큼 많은 도전과 고민이 음악에 그대로 녹아 있죠. 배경 음악(BG) 스코어만 해도 100곡이 넘게 작업했고, 정식 OST 노래곡은 아니지만 많은 요청을 받은 곡들도 따로 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오프닝곡 '피니시 라인'(Finish Line), 민주영 테마 '유어 네임'(Your Name), '별 헤는 밤' '사우전드 스타즈'(Thousand Stars), '섀도우스'(Shadows) 같은 곡들이에요. 제가 작곡가로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가진 힘'을 항상 믿어요. 그래서 보컬이 있는 자작곡들을 더 많이 만든 것 같고, 연주곡 안에도 숨은 보컬 포인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는 이번 앨범의 완성도를 가능케 한 주역으로 함께한 음악팀을 꼽으며, 좋은 평가 역시 모두 팀원들의 공으로 돌렸다.
“지금 제 메인 팀은 6명 정도예요. 독일, 러시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멤버들이 있고, 전부 각기 다른 장르와 개성을 가진 연주자들이에요. 그 덕분에 곡마다 확연히 다른 톤과 결을 만들 수 있었죠. 제가 지향하는 건 늘 '서로 다른 색깔의 팀'이거든요. 다들 친구 같은 사이여서 음악을 일처럼 하기보단 즐기면서 함께 만들었어요. 특히 디오리 친구는 실제로 제 친구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좋은 음악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는 건 다 팀 덕분이에요."
허성진 음악감독에게 ‘굿보이’는 단순한 OST 작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음악감독이라는 영역에 도전한 그의 여정은, 작품이 다루는 청춘의 이야기와도 많이 닮아 있었다.
"이번 작품은 좋은 배우들, 작가님, 스태프, 채널 등 모든 면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너무 좋았어요. 그 자체로도 감사했지만, 저에게는 개인적인 '성장 서사'가 담긴 작품이기도 해요. 저는 원래 대중가요를 해왔던 사람이고, 음악감독으로 전향하면서 새로운 길을 걸어온 건데요. 그런 제 이야기가 '굿보이'의 청춘 서사와 자연스럽게 겹쳐졌어요."
드라마 전체를 아우르는 스코어를 직접 작곡한 것도 그에겐 큰 도전이자 전환점이었다. 음악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모든 곡에 깊이 관여하며 완성도를 끌어올린 이번 작업은 그의 새로운 챕터를 여는 계기가 됐다.
"보통은 드라마 전곡을 직접 쓰는 경우가 드문데, 이번엔 거의 모든 곡을 제가 작업했어요. 음악감독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늘 곡 작업까지 할 시간은 부족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작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그만큼 더 깊이 고민하고, 한 곡 한 곡을 세밀하게 다듬을 수 있었어요."
허성진 음악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음악이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는 도구를 넘어 말로는 닿지 못하는 여백을 채우는 마지막 언어라는 걸 깨달았다.
“저는 음악을 만들어서 들려주는 음악감독이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들려줄지가 아니라, 무엇을 침묵할지, 그리고 음악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내면의 속도까지 어떻게 함께 움직이며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를 많이 생각했어요. 처음엔 그냥 멋진 음악을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작품을 해 나가면서 점점 깨달았어요. 드라마 음악은 단순히 장면을 채우는 게 아니라, 대사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인물의 마음을 대신 끌어안는 마지막 언어라는 걸요. 같은 장면이라도 어떤 음악을 얹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이 장면에 어떤 음악을 쓸까'보다 '이 인물의 마음을 어떻게 음악으로 전할까'를 먼저 고민하게 됐어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지는,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곡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고,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오래 남는 음악, 힘이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음악은 제게 너무 큰 행복이니까요."
허성진 음악감독은 현재 tvN 드라마 '세이렌'을 비롯한 두 편의 신작을 준비 중이다. 장르가 전혀 다른 작품들이지만, 그는 여전히 인물의 감정에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고자 고민 중이다. 다음 챕터 역시, 새로운 시도와 서사의 흐름을 함께 타는 음악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저는 음악을 하는 게 정말 행복하거든요.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음악, 그런 음악을 계속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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