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지원금 받고 새폰 득템했는데 위약금 면제…다시 새폰으로?
약정 기간 다 채운 가입자는 상대적 박탈감
형평성 논란까지 잠재우려면 '기업 존폐 수준' 손실 감수해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7일 서울 중구 SKT타워에서 열린 일일 브리핑에 참석해 SK텔레콤 해킹 사고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하고 있다. ⓒ데일리안 이주은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대국민 사과와 SK텔레콤(SKT)의 전 고객 대상 유심보호서비스 가입 완료에도 불구하고 유심 해킹 사태의 파장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회사측은 연일 브리핑을 열고 철저한 원인 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다짐하고 있지만 그런 건 이미 대중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다. 지금의 쟁점은 ‘위약금 면제’다.
유심보호서비스만으로도 해킹 피해를 막을 수 있고, 그래도 못 믿겠다면 유심을 무료로 교체해 줄 것이며, 만일 피해가 발생하면 회사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통신사 변경만이 궁극적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이미 25만명 가까운 가입자들이 다른 통신사로 이동했다.
문제는 ‘약정’으로 묶인 가입자들이다. 통신사들은 가입자들을 묶어두기 위해 단말기 대금을 지원해주거나 통신요금을 할인해주는 대가로 일정 기간 가입을 약정하는 방식으로 계약한다. 약정 가입자가 중도 해지했을 경우 위약금을 내야 한다.
일부 SKT 가입자들은 회사측의 귀책사유로 가입을 해지하는데 왜 가입자가 부담을 져야 하느냐며 위약금 면제를 요구한다. 실제, 유심 사태로 2차 피해가 우려돼 통신사를 옮기고 싶어도 위약금 부담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SKT 가입을 유지하는 사례도 많이 들려온다.
하지만, 위약금 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100% 유심해킹에 따른 불안감 때문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위약금 면제되면 신상 폰으로 바꿔야지”라는 들뜬 목소리 역시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개월 전, SKT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새 휴대폰으로 바꿨는데, 이번 기회에 위약금 없이 다른 이통사에서 지원금을 받고 다시 새 폰을 ‘득템’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칠 이유가 있을까. 혹은 이전에 SKT에서 지원금을 받고 산 폰으로 통신사만 옮겨 단말기 구입 부담 없이 할인된 통신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걸 안하는 사람이 바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SKT가 보안에 철저하지 못해 해킹을 당한 죄가 있으니, 위약금을 전액 면제해준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위약금은 어감상 ‘징벌’의 느낌이 있지만, 사실상 통신사로부터 받은 돈을 다시 돌려주는 개념이다. 그걸 면제받는다는 것은 해당 금액만큼의 혜택을 받는 것과 다름없다.
가입자마다 약정 기간이나 방식은 제각각이다. 100만원짜리 휴대폰을 SKT로부터 4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구매했는데, 이번 사태로 중도 해지시 위약금을 면제해준다고 치자. 어떤 이는 해킹 사태 직전에 약정 가입해 40만원의 혜택을 보고, 어떤 이는 약정 기간의 절반을 채워 20만원의 혜택만 보게 된다. 심지어는 약정이 거의 만료돼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휴대폰을 자주 바꾸지 않고 약정할인을 택하는 장기가입자들도 위약금이 면제된다한들 효과를 체감하지 못할 수 있다.
남이 더 큰 이득을 보면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게 사람의 생리다. SKT가 위약금 전액 면제를 발표할 경우 혜택을 못 보거나 덜 보는 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결국 2500만 가입자 모두에게 단말기 구매 공시지원금 최대치까지 지급해야만 끝날 일이다. 어림잡아 10조원, SKT의 시가총액(약 11조4000억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표밭 관리가 중요한 정치권은 기업이야 망하건 말건 ‘위약금 면제 관철’이라는, 정치적 자산이 될 훈장을 따내는 데 눈이 돌아간 모습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SKT에 위약금 면제를 압박하면서 유영상 대표이사가 답을 내놓지 못하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소환했다. 오는 8일 청문회에 증인 출석을 요구했는데, 최 회장은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대미 통상 관련 행사 참석을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한 상태다.
전문경영인에게 말해서 안 통하니 그룹 총수를 데려다 압박하는 방식은 정치권에서 흔히 써왔던 전략이니 이해는 가지만, 이번 사안은 최 회장의 한마디로 결정될 만한 게 아니다.
SK그룹 계열사들은 이사회 중심 경영제체를 구축한 상태다. 최 회장은 SKT 이사회에 속해 있지도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룹 총수의 의중이 이사회에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기업의 존폐가 달린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앞서 언급했지만, 형평성 논란까지 잠재우려면 기업의 존폐를 뒤흔들만한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걸 총수의 한마디로 이사회가 통과시키고, 기업 가치 폭락(극단적으로는 기업 청산)으로 이어진다면 모두가 배임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용자 형평성 문제와 법적 문제 등을 같이 검토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사회가 이 상황을 놓고 논의 중인데, 논의가 잘 돼서 좋은 해결 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사회 멤버가 아니라 여기까지만 말씀드릴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7일 SKT 유심 해킹 관련 일일 브리핑에서 위약금 면제 요구와 관련된 최태원 회장의 발언에 그런 전후 사정이 잘 담겨있다.
정치권은 ‘위약금 면제 관철’로 이 사태를 끝낼 것인가, 형평성 논란이 불거진다면 회사를 팔아서라도 불만을 가진 다른 가입자들에게까지 만족할 만한 보상을 해주라고 또 다시 SKT를 압박할 것인가.
8일 청문회에서는 무조건 여론에 휘둘려 기업을 윽박지를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감당 가능한 선이 어디까지인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기회를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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