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상상력과 깊은 애정으로 완성한 감정의 공간"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말을 건네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라듸오 데이즈', '해적' '블랙 팬서', '막후의 왕' 아마존 프라임 오리지널 '버터플라이'(가제)까지, 세계를 무대로 활약 중인 김지아 미술감독은 소품 하나, 빛 한 줄기에도 캐릭터의 삶과 감정을 새겨 넣는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세심한 상상력으로 공간을 채운다. 김지아 미술감독에게, 공간은 곧 캐릭터이며 이야기 그 자체다. 변화하는 제작 환경과 노동 조건 속, 김 감독은 업계의 전문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김 감독은 미술감독의 역할을 '캐릭터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의상을 입히거나 메이크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 공간 자체가 인물이 들어왔을 때 어떤 하나의 서사를 끌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공간의 콘셉트를 잡을 때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이 들어왔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는가 고민합니다. 카메라에 보이는 것과 실제로 들어왔을 때 같을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인상을 받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공간도 하나의 캐릭터성을 갖고 있다고 설계하죠"
김 감독은 공간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설계가 있어야 층위와 밀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저는 여행을 정말 많이 다니는 편이에요. 직업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자주 다니다 보니, 그런 곳에서 저장해 뒀던 것들을 종종 꺼내서 활용하곤 해요. 공간을 설계할 때는 ‘레이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그런 부분들을 좀 더 재미있게 풀어낼 수 없을까 늘 고민해요. 예를 들어 영화는 보통 두 시간 안에 이야기가 끝나지만, 드라마는 길잖아요. 지루하지 않게 보이려면 그만큼 레이어나 구성을 더 많이 고민해야 해요. 시각적인 자료도 참고하긴 하지만, 사실 저는 책에서 영감을 더 많이 받는 편이에요. 특히 캐릭터를 풀어낼 때 그렇죠.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얼마 전에 그러시더라고요. ‘너는 수학 시간에도 소설책 많이 봤지?’라고요. 미술하는 친구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게 인상 깊었대요. 저는 미술감독이라는 직업이 단순히 시각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적인 바탕이 꼭 필요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대본을 읽을 때 주인공 말고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애정을 주려고 해요. 작은 역할이라도 제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존재나 공간을 하나쯤은 꼭 만들어 주고 싶거든요."
김 감독은 2017년부터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다양한 작품에 참여해 왔다. 한국과 해외 현장에서 미술감독의 역할부터 작업 과정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는 미술감독이 감독보다 먼저 결정되는 경우도 많고, 로케이션 헌팅부터 세트 디자인까지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요. 반면에 한국은 주로 감독님이 먼저 정해지고 나서 미술감독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죠. 로케이션도 이미 다 정해진 상태에서 공간을 꾸미는 ‘드레싱’ 작업 위주로 진행될 때가 많고요. 그래서 해외에서는 미술감독의 역할과 책임이 훨씬 크고, 자연스럽게 위상도 더 높아요. 한국은 보통 감독님과 작품이 정해진 상태에서 의뢰가 들어오는데, 제가 참여할 때는 배우가 정해지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그럴 땐 사진이나 활자 같은 자료를 받아서 전체 공간에 대한 영화 이미지를 다 찾아보고, 톤을 맞춰나가는 식으로 작업을 시작해요. 저는 한국에서도 로케이션 선정부터 더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여한 작품 중, 공간 설계 측면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작품은 미술감독 데뷔작인 '해적'이다.
"작품 자체가 판타지 장르라 CG도 많고, 설계적으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정말 많았어요. 화면 하나에 촬영 소스를 8개나 섞어야 했거든요. 미니어처 촬영도 있고, CG 소스도 있고, 실제 인물을 찍은 것도 있고요. 그런 것들이 다 섞이다 보니까 8개의 레이어가 필요했어요. 그걸 위해 빛 설계 같은 것도 엄청나게 고민했어요. 그게 벌써 10년 전인데, 그때는 사실 이런 방식을 잘 이해하는 분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거의 혼자서 많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최근 참여한 작품에서도 김 감독은 공간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과 치열한 고민을 이어갔다.
“작년에는 미드 버터플라이(가제) 작업을 했어요. 배경은 한국인데,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너무 다르다 보니까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했죠. 그렇다고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저는 그런 거 싫더라고요. 관광 영화처럼 보이는 것도 싫었고요. 그래서 아주 사소한 로케이션까지도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외국에서 보 여지는 한국적인 이미지 외에도 '한국 사람이 외국 걸 보면 또 다른 시선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활동 중인 김 감독은 프리랜서로서 겪는 현실적인 한계와 제도적 미비점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중국에는 소속사가 있긴 한데, 중국 외에는 크게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일하고 있어요. 사실 한국은 표준계약서에 미술감독이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디자이너들은 고용보험 같은 걸로 보호를 받는데, 미술감독은 그런 부분이 잘 안 돼 있어요. 그리고 주 52시간 같은 업무시간 제약은 외국에서는 정말 칼같이 지켜요. 그런데 한국은 인력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까 그런 부분이 잘 안 지켜질 때도 많아요. 그래서 저는 미술팀 내에서도 포지션을 좀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 감독은 매 순간 한계와 고민 속에서도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하며, 더 나은 환경과 기회가 마련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계는 정말 매일 느껴요.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건지,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그 너머에 또 뭐가 있을까 계속 고민하게 되거든요. 그래도 저는 일을 정말 좋아해서 행복하게 하는 편이에요. 같이 일하는 성향 맞는 친구들도 많아졌으면 좋겠고, 실력 좋은 친구들이 많이 모여서 좋은 판이 만들어졌으면 해요. 그런데 요즘 작품이 많지 않다 보니, 좋은 인력들이 빠져나가는 걸 보면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한국 시스템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에요. 좋은 필모그래피를 쌓고, 언어적인 한계만 잘 극복한다면 해외로 나가는 한국 미술감독들도 분명히 더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해외 진출을 다 했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중국에서는 오퍼가 오지만 미국에서는 아직도 '한국 미술감독 한정'이나 '한국에서 촬영하는 것 위주로 조건이 붙어요. 그런 한계를 넘어서 글로벌하게 활동하는 미술감독들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작년 말쯤에 미국 쪽에서 좋은 기회가 왔는데 작품 자체가 무산돼 아쉬웠어요. 언젠가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시아계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정말 글로벌하게 활동하는 미술감독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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