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닿을 수 있는 강화도. 많은 사람들은 그 섬이 전국체전 때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 또는 드라마 사극의 단골장소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 곳에 우리 땅에서 가장 많은 관방유적이 널려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약 100km 해안선을 따라 구축된 5개의 진과 7개의 보, 그 사이사이에 구축된 돈대만 54곳에 이른다.
삼국시대 때 강화 관미성의 쟁탈전, 고려 때는 우리민족사에서 잊지 못할 대몽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조가 개성에서 강화로 천도해 39년간 몽고군과 전투를 했던 곳이다. 조선인조 때의 정묘호란, 개화기에는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넘나들며 위협했고, 현재는 수도방위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격변기 때마다 강화도는 나라를 지킨 투쟁의 역사가 배어있다.
산성의 북쪽성벽
그래서 국란의 현장을 지켰던 땅에는 성곽이 있었다. 강화에만 줄잡아 14곳에나 구축돼 있다. 마니산 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222m의 정족산, 그 산등성이에 정족산성이 있다. 전설에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축성했다고 한다.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부른다.
1994년부터 10년 계획으로 관방유적지표조사를 실시한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는 휴전선 일대 전역에 산재한 산성을 조사 발표했다. 이에 따라 기자는 2002년 4월 관방유적 조사팀과 함께 강화도와 휴전선 일원에 항공 촬영에 착수했다.
강화도는 북한과 인접한 관계로 전 지역이 비행금지구역이다. 함께 탑승한 통제관의 지시를 받아야만 사진촬영이 가능하다. 원칙적으로 민간인 탑승은 불가능한 곳이다. 다행히 조사팀의 구성원이 된 것이 큰 행운이었다.
이륙한지 20여분 만에 헬기는 강화도 상공을 날고 있었다. 항공촬영을 하려면 헬기문짝을 완전개방 해야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을 수 있다. 육지에는 봄기운이 완연한데도 4월의 하늘은 바람이 새 차다. 아래로 보이는 강화지역은 바다를 끼고 있어 엷은 해무가 깔려있다.
처마끝에 앉은 나부상
광성보 용두돈대 초지진이 내려다보인다. 정신없이 촬영에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정족산성, 산 전체지형이 영락없는 가마솥 같다. 솥 아래로 세발도 달려있다. 그래서 정족산으로 부른 모양이다.
복원한 산성의 정문인 종해루를 중심으로 좌우 성벽이 널려있고, 성안 분지에는 전등사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앉아 있다.
20여 년 전, 산 정상에서부터 동문까지 산행할 때 성벽따라 진달래가 만발 했었는데 지금은 모습을 감추었다. 복원하면서 잡목들을 제거한 모양이다.
항공촬영을 하다보면 앵글의 위치선정이 무척 어렵다. 산성이 잘 보이는 지형을 알아야만 좋은 영상을 얻기 때문이다. 강화도와 정족산성 전등사 전경은 그날 찍은 항공촬영이 국내서 유일한 자료가 됐다.
산성의 북문
정족산성은 5개봉우리를 타고 넘는 포곡식 산성이다. 지형이 가장 낮은 남쪽계곡에 산성의 정문을 냈고, 성문 중 유일하게 홍예위에 누각 종해루도 세웠다. 우리나라 산성 대부분은 골짜기에 성의 정문을 축성하고 성벽을 겹겹이 쌓아 적의 주공격에 대비한다. 성문이 무너지면 성안은 곧 점령되기 때문이다.
정족산성은 동서남북에 성문을 설치했고 4곳에 치성을 만들었다. 산성 전체 둘레는 2.3km 남짓하다. 정족산성 답사는 동문에서 출발해 남문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가는 것이 좋다.
동쪽치성을 타고 내려오면서 복원된 성벽을 만난다. 남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문 뒷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곳에 모인 물은 성벽아래 수구문을 통해 내려간다. 현재수구문은 원형으로 남아 있다. 그 수구문 위 성벽에는 여장과 총안이 남아 있는데 이쯤에서 한번 엎드려 사격자세도 취해본다. 옛 군사들, 그 들도 나와 같은 자세로 총을 겨누었을까?
140여 년 전 우리군은 구미열강의 침략에 맞서 격렬히 싸웠다. 병인양요 때다. 병력과 화력이 절대 열세였던 조선군은 최초로 함대를 몰고 온 160여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홍예의 동문
남문에서 가파른 등성이를 넘어 20여분 후에 한번쯤 쉬어갈 만한 장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사통팔방이 조망권에 들어온다. 아래로 전등사가 훤히 보인다. 하늘에서 보는 것처럼...고개를 돌리면 강화의 진산 마니산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서문은 동문과 축법이 같다. 성벽위에 벽돌로 아치형을 올렸다. 서문인근에서 정상까지는 무너지고 부서진 원형의 성벽에서 고졸함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구간이다. 북벽을 타고 동문으로 내려오면 성벽이 꺾어지는 곳마다 곡성과 치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에 강화해협도 보인다.
암문형태의 북문을 빠지면 조선왕조신록을 보관했던 사고지를 만난다. 전소된 것을 최근 복했다. 하지만 건물만 우뚝 서 있을 뿐 실록은 이곳에 없다. 사고지를 내려오면 1600년 세월을 자랑하는 전등사가 있다. 그 절집이 유명해진 것은 대웅보전 네 모퉁이에 제각각 다른 모습의 벌거벗은 나부상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불사를 지을 때 목수와 어느 주모의 사랑이야기가 여기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동문 근처에는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있다.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한 공적을 담은 비다.
남쪽의 성벽
서문에서부터 시작한 산성답사는 약 2시간이면 족하다. 성벽은 거친 할석이다. 안쪽도 할석으로 채웠다. 성벽사이엔 쐐기돌을 박았다. 석축을 쌓기 이전에는 토성이 존재했던 것 같다.
4300여 년 전 단군왕검의 숨결이 있는 참성단은 나라를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라 해서 지금도 매년 전국체전 성화가 점화돼는 곳이다. 그리고 단군은 산 아래에 군사들이 주둔할 수 있도록 성을 쌓게 하고 나라의 평안과 자손들이 번성하기를 빌었다. 수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단군의 개국정신이 묻어 있는 참성단과 정족산성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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