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04.09.06 11:35 수정 2004.09.07 09:44
동,서양의 교차점
이스탄불의 문명과 유산들(상)
이스탄불로 들어선 오후 늦은 시간에는 여느 대도시와 다름없이 교통체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늘 저녁 카팔르 차르시(Covered Bazaar)라 불리는 그랜드 바자르(대 시장)을 들러야 하는데 이렇게 체증이 심하면 그만큼 시장을 둘러볼 시간이 준다는 것이고 보면 마음이 바쁘다.
가파르게 맘 졸여서 다다른 그랜드 바자르는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이면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에 어쩌면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40여분, 더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15세기에 건축된 세계 최고의 밀폐형 성곽시장인 관계로 7:30 P.M 쯤이면 27개의 문이 닫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파장 분위기에서 들어선 시장은 약 5000여 개의 점포가 종목별로 거리를 달리하면서 분포되어 있는데 그 시간에도 하나의 물건이라도 더 팔기 위하여 목청 높이는 상인들이 많았고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다녀갔는지 비교적 유창한 한국말로 흥정을 붙여온다.
40%정도를 깍아 부른 뒤 난색을 표하는 가게주인에 대해 휑하니 돌아서자 팔을 붙잡고 결국 50%의 값으로 물건값이 매겨지는 이 곳은 한편으로는 해학이 느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상인은 어디에서나 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말 중에 바자회라는 것이 있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시장이란 뜻을 가진 바자르(Bazaa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특색 없는 밸리댄서를 보고 호텔로 돌아온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마지막 일정이 시작된 이른 아침까지 잠은 네시간여 밖에 자지 못하여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우리가 구 이스탄불의 시가지 한 중심인 고대 원형 전차 경기장인 히포드롬(Hippodrom)에 도착한 것이 7:30A.M 쯤 이었다.
이곳 히포드롬을 중심으로 반경 2Km이내에 이스탄불의 유적들이 집중해 있어서 이 곳을 통털어 이스탄불 문화지구라 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히포드롬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곳으로 원래는 길이 400M 폭 110M의 대형 경기장으로 10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나, 오스만제국의 슐탄 마흐멧2세가 바로 곁에 붙어 있는 대사원 블루 모스크를 지으면서 이 땅의 일부가 편입되고 지금은 그 규모가 축소 되었으며 당시의 경기장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트랙부분은 차길로 이용되고 있다.
이 곳에는 몇가지의 역사적 유물이 놓여 있는데 다칼리타쉬라고 하는 돌기둥, 즉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터에 있던 파라오 루트모세의 오벨리스크로 이집트에서 뺏어온 것이 있다.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터에는 네 개의 오벨리스크가 있었는데 이 곳에 하나, 그리고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퐁피두 광장에 하나씩 있으며 정작 이집트에는 미완성의 오벨리스크 하나만 있다고 하니 제국주의의 힘에 침탈당한 이집트의 자존심이 엿보이는 듯하였고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이 곳에 다칼리타쉬를 놓아둔 비잔틴의 사고 역시 그들의 번영기에 이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오벨리스크 바로 옆에 세워둔 사문석 기둥형태의 청동부조상인 이으란느슈툰의 잘려나간 세 개의 머리는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신전에 가있으며 비잔틴의 자존심을 보이기 위해 세상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임을 알리는 의미로 오벨리스크를 본 따서 세워둔 콘스탄티누스7세 포르피루게나투스의 돌기둥 오르메타쉬도 외벽에 치장 되었던 청동부조판도 외세에 빼앗기고 지금은 초라한 돌기둥으로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권불십년이라는 말과 영속적인 번영이 없음을 현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히포드롬 바로 곁의 슐탄 아흐멧 사원 혹은 블루 모스크(Blue Mosque)를 찾았다.
들어가는 문 입구에는 대문은 없으되 중앙의 둥근 고리를 중심으로한 세 줄의 사슬이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그 의미는 모든 사람이 마흐메드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의미로 과거의 슐탄들로 이 곳을 출입할 때에는 모두 마차에서 내려 머리를 숙이고 일반 백성들과 같이 이 곳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 사원은 마흐메드 1세 황제에 의해 1609-1616년에 건축된 터키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 건조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성당에 대항에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성 소피아의 건축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만든 건축물이다.
이곳는 6개의 첨탑을 가진 독특한 전통 회교사원 사원으로 내부의 벽면이 2만 1000개에 달하는 중국풍 청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모스크라 지칭되기도 한다.
미나렛이라 불리는 이 첨탑의 기능은 모스크의 위치를 알려주고 혹은 사람이 첨탑에 올라가서 코란을 외우는 소리로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미나렛의 개수는 그 사원의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며 개수가 6개인 곳은 이곳 뿐으로 7개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카바신전을 빼고는 가장 많으며, 규모 면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회교사원이다.
높이 43m, 지름 23m의 Dome으로 덮여진 회당 내부는 260개의 착색 유리창을 통하여 빛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규모도 규모이지만 그 속에 그려진 아라베스크 문양의 정교한 그림들과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냥 종교의 차원을 넘는 감동으로 문명과 문화의 창조적 바탕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이러한 큰 규모의 회교사원에는 학교, 목욕탕, 시장, 병원등 사회시설들은 주변에 다 갖추어 놓고 있는데 이런 복합종교단지(Complex)를 퀼리에 라고 부른다고 설명을 한다.
사원의 뜰에는 샤르드반 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그 옆에는 기도 전 손발을 씻는 곳이 있었다. 회교국가들이 사막 등과 같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수리시설을 발전시킨 이면에는 회교도의 하루 5번의 기도와 그만큼의 손 씻기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한 데서 출발한다는 논리도 그렇게 틀려 보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터키에서의 관개수로의 발달은 목욕탕과 분수문화로 대변되는 로마의 문화와 이후 800여 년 간 이어져온 이슬람의 문화로 인해 더욱 많은 발전을 한 흔적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지 싶다.
다시 히포드롬을 거쳐 맞은편의 아야 소피아(Aya Sophia), 즉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 길 중간쯤에서 양쪽을 번갈아 보면 회백색의 블루모스크와 붉은색의 소피아대성당이 확연하게 용호상박하는 자태로 한 눈에 들어온다.
아야 소피아(Aya Sophia)는 비잔틴 제국의 카톨릭 성당으로 오랜 시일이 경과되었음에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건축학 상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다.
최초의 건물은 36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나 후에 소실, 두 번째는 415년 10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건립 되었으나 532년 1월 시민들에 의해 방화로 소실, 현재 건물은 532-537년 사이에 유스티아누스 대제에 의해서 세 번째 건립된 것으로 불가사의하다는 말에 포함되는 내용의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불과 5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지어졌다는 것으로 그 이후 현재의 성당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성당은 돔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의 백미로 여겨지는데 15층 건물 높이에 해당하는 56m 높이는 거대한 중앙 Dome과 많은 보조 Dome을 갖고 있으며, 거대한 중앙 Dome은 다시 4개의 소형 Dome으로 연결되어 짐으로써, 비잔틴 건축물의 표본으로 꼽혀지고있다.
특히 아까 보았던 블루모스크에 비해 중앙돔의 크기가 훨씬 크고 높은데도 중앙돔과 네 개의 소형돔을 지탱하는데 있어서 기둥과 같은 구조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건축학적으로 불가사의한 기술이라는 것이며 후일 이 건축물은 이슬람 세계에 영향을 미쳐 이스탄불 회교사원들에서 발견되어 지는 비잔틴-이슬람 문화의 융화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낳게 했다고 한다.
성당의 중앙을 빗겨선 자리에 3-4미터 정도의 원형 대리석이 바닥에 깔려있고 주위에는 쇠줄로 출입을 막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비잔틴 문화를 대표하는 당시의 동로마제국이 세계의 중심점인 옴팔로스 혹은 옴팔리온(Omphalion)으로 정해 놓았던 자리였다.
이 성당은 1453년 오스만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회교사원으로 개조되었고 916년간 성당으로, 그리고 477년간 회교사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30-1935년 아타튀르크에 의해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는데 건물 내에는 초기 기독교 성화(聖畵) 및 회교적 종교 장식물이 공존되어 있어 동-서, 기독교-이슬람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현장이다.
하나 주지할 사실이 있다면 이 교회가 슐탄 마흐멧2세에 의해 점령당했던 초기 오스만제국시대에 종교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파괴할 수도 있었고 또한 파괴하지 않더라도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성화들을 우상이라는 의미로 제거할 수 있었음에도 건물자체의 파괴를 슐탄 마흐멧2세가 막았으며 그 원형 위에 회칠을 하고 이슬람식 문양들을 덮음으로서 지금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며 이슬람이 이교도에 대한 융통성과 관용성을 보여준 것으로 높은 정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회칠로 덮혀 있던 모자이크화는 1930년대에 미국인 학자에 의해 복원되기 시작하였는데 중앙 작은 돔은 금,은으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자이크가 있고 성당으로 들어가는 황제의 문 바로 위에는 레오 6세가 만든 모자이크화로 그의 아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 문 외벽의 모자이크화는 예수 모자와 두 명의 황제가 그려져 있는데 한 명은 콘스탄티누스로 이 도시를 예수모자에게 증정하는 모습이고, 다른 한 명은 유스티아누스 황제로 성 소피아 성당을 증정하는 모습으로 지금도 색채나 구성이 최고라는 느낌을 주는데 나가는 문 위에 있어 잘 못보고 지나가는 관람객들을 배려해서 맞은편에 거울을 두고 그 곳에 비치는 모습을 봄으로서 원화를 뒤돌아 보게하는 배려를 해 두었다.
아직 11시가 되지 않은 시각, 우리는 보스포러스(Bosphorus)해협과 다리, 그리고 그 주변의 이스탄불을 보기위해 바쁘게 선착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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