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의한 문인에겐 권세자에게 낚인 물고기조차도 부러운 법인가?
봄새벽<春曉(춘효)>
春眠不覺曉(춘면불각효), 봄 늦잠에 날 밝는 줄 모르고,
處處聞啼鳥(처처문제조). 곳곳엔 새 울음소리만 들리네.
夜來風雨聲(야래풍우성), 간밤에 비바람 소리 크더니만,
花落知多少(화락지다소). 꽃잎은 또 얼마나 떨어졌을꼬?
봄날 아침의 상황을 속세의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고전 한시에서 익히 들었던 작품 중의 하나다.
작가 맹호연(孟浩然)은 도연명(陶淵明)․사령운(謝靈運), 사조(謝朓)의 뒤를 잇는, 성당(盛唐)의 전원산수시파다. 그의 시는 맑고 담박함을 기저로 삼는다. 그는 ‘은일시인의 비조’라고 불리지만, 그의 오랜 전원생활은 그를 부귀공명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해서 결국은 왕유(王維)와 같은 담백하고 초연한 점이 없고 분개하고 원망하는 감정을 갖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잠깐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孟浩然(맹호연)(689∼740): 唐代(당대) 시인. 이름이 浩(호), 자가 浩然(호연)이라 함. 襄州(양주) 襄陽(양양: 지금의 湖北省(호북성) 襄陽縣(양양현))사람. 盛唐(성당) 山水田園派(산수전원파)의 대표작가. 성당 시인 王維(왕유)와 더불어 ‘王孟(왕맹)’으로 불리고, 中唐(중당) 시인 韋應物(위응물)과 더불어 ‘韋孟(위맹)’이라 불림. 젊었을 때 鹿門山(녹문산)에 은거하였음. 40세에 비로소 長安(장안)에 와서 진사고시에 응했지만 낙제하여 돌아옴.
일찍이 江淮(강회),吳越(오월),湘贛(상공) 등지를 유랑함. 開元(개원)25년에 張九齡(장구령)이 荊州長史(형주장사)가 되었을 때 부름을 받아 從事(종사)가 되었지만 얼마되지 않아 돌아와 은거함. 開元(개원)28년에 王昌齡(왕창령)이 嶺南(영남)에서 북으로 돌아갈 때 襄陽(양양)을 지나며 맹호연과 함께 모여 서로 의기투합하여 술을 마셨음. 해산물을 먹다가 병을 얻어 등에 등창이 생겨서 죽음. 天寶(천보) 4년에 친구 王士源(왕사원)이 ≪孟浩然詩集(맹호원시집≫3권을 편찬했는데, 지금은 宋代本(송대본)이 있음. ≪全唐詩(전당시)≫에 그의 시 260여수가 2권으로 편집되어 남아있음.
그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의 고향 襄州(양주)(襄陽)는 산수가 빼어나고 은거의 명승지로 유명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고 나서 나이 40에 시험에 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시험에 낙방한 일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이 사건이 이후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녹문산에 은거할 당시에는 평생 은거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고, 과거고시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문실력에 상당히 자부심을 가졌던 듯 하다. 그래서 장안에 가서 과거시험만 보면 그냥 합격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던 것 같다. 장안에 있을 때 유명한 장구령(張九齡),왕유(王維) 등과 사귀었으며 詩名(시명)이 상당하였다. 그러나 결과가 그러질 못했으니, 시인의 실망은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襄陽(양양)으로 돌아온 뒤에 몇 달을 보내고,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시 남쪽으로 유람을 떠난다. 이 5,6년간의 유람기간에 산수자연에 대한 시와 낚시에 관한 시를 창작하였지만, 관직에 대한 염원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듯 하여, 그의 자연시는 초연한 점이 없고 분개하고 원망하는 감정이 있다고 하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으며, 유람에 의한 시각으로 자연시를 묘사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의 자연시 풍격도 자연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사령운(謝靈運)에 가깝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갈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新唐書(신당서),文藝傳(문예전)≫에 의하면, 장안에 있을 때 한번은 왕유가 그를 초청하여 官府(관부)에 손님으로 초빙하여 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황제 납시오!’라는 말이 들렸다. 맹호연은 몸을 피할 수가 없어서 침상 밑에 몸을 숨겼다. 당 현종이 방에 들어온 뒤에 왕유는 숨길 수가 없어서 황제에게 “시인 맹호연이 여기에 있는데, 신분이 비천하다고 폐하를 감히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사실대로 아뢰었다.
당 현종은 인재를 총애하는 사람이었기에 이야기를 듣고 나서 즉시 그를 보자고 하였다. 맹호연이 재빨리 나와서 현종을 배알했다. 세 사람이 잠깐 시문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현종이 맹호연에게 새로 지은 시가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맹호연이 곧 시 한수를 낭송하며 관직에 나아가고자하는 마음을 표명하였다. 그런데 누가 알았는가? 시 속에 “재주가 없으니 밝은 군주가 나를 버리고, 병이 많으니 친구와 소원하다(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는 구절이 있었으니, 마침내 현종이 질책하여 “그대는 적극적으로 관직을 구하지도 않고서 오히려 무고하게 내가 그대를 버렸다고 하는구나.”라고 화를 내었다.
‘재수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천재일우를 기회를 살리지도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앞으로 있을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마지막 황제앞에서의 면접을 어떻게 통과하겠는가?
또 한번은 맹호연이 한조종(韓朝宗)을 방문하였는데, 맹호연과 함께 경사로 가서 조정에 그를 추천하기로 약속하였다. 마침 친구들이 맹호연을 찾아와서 실컷 술을 마시고 즐기는데, 어떤 이가 “당신은 韓公과 약속하지 않았소?”라고 하니, 맹호연이 꾸짖어, “사업은 이미 술마시는 것이 되었는데 왜 이렇게 급하게 다른 것을 근심하오?(業已飮, 遑恤他.)”라고 하고서, 결국 가지 않았다. 한조종이 화가나서 경사로 가는 것을 거부하였는데, 맹호연은 후회하지 않았다.
뒤의 고사는 아마도 고향 襄陽(양양) 에 있을 때의 일인 듯 하다. 한조종이 경사에 가서 관직을 추천해주기로 약속은 했어도, 이때는 이미 은거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 하다. 그래서 시문을 화답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들과 어울려 즐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개원16년 겨울에 장안을 출발하여 다음해 봄에 고향 襄陽(양양)에 도착하였고, 몇 개월을 보내다가 남쪽 吳越지방의 유람을 나섰다. 낙양으로 길을 잡고 汴水(변수)를 따라 내려가며, 潤州(윤주),杭州(항주)를 들렀다가, 다시 天台山(천태산)을 유람하고, 虞江(우강)을 따라 會稽(회계)에 도착한 다음, 다시 潤州(윤주)를 거쳐 강을 따라 고향으로 도착하였는데, 이때가 개원21년 여름이었다.
낚시와 관련된 그의 시를 보자.
<臨洞庭上張丞相(임동정상장승상)>
八月湖水平(팔월호수평), 8월 호수의 물이 펑펑히 차올라,
涵虛混太淸(함허혼태청). 빈 것에 받아들이는데, 太淸이 섞이고,
氣蒸雲夢澤(기증운몽택), 수증기가 생겨 夢澤에 구름이 일고,
波撼岳陽城(파감악양성). 파도가 岳陽城을 뒤흔드네.
欲濟無舟楫(욕제무주즙),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나 보좌하는 신하가 없고,
端居恥聖明(단거치성명). 단정히 앉았으나 聖君의 밝음에 부끄럽다.
坐觀垂釣者(좌관수조자), 낚시하는 자 옆에 앉아 구경하니,
徒有羨魚情(도유선어정). 하릴없이 물고기의 마음이 부럽구나
<與諸子登峴山(여제자등현산)>
人事有代謝(인사유대사), 人事에는 신구교대가 있고,
往來成古今(왕래성고금). 교유에는 옛날과 지금 사귐이 있네.
江山留勝迹(강산류승적), 강산에 훌륭한 족적을 남겨도,
我輩復登臨(아배복등임). 우리들은 다시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리.
水落魚梁淺(수락어양천), 물이 빠지니 고기잡는 통발이 얕고,
天寒夢澤深(천한몽택심). 하늘이 차니 夢澤이 깊네.
羊公碑尙在(양공비상재), 羊祜의 비석이 있어,
讀罷淚霑襟(독파루점금). 다 읽고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萬山潭作(만고담작)>
垂釣坐磬山(수조좌경산), 바리때 모양의 산 위에 앉아 낚시하니,
水淸心亦閑(수청심적한). 물은 맑고 마음 역시 한가롭다.
魚行潭樹下(어행담수하), 연못 아래로 물고기 지나가고,
猿掛島藤間(원괘도등간). 원숭이는 섬의 덩쿨사이를 다니네.
游女昔解佩(유녀석해패), 神女가 노리개를 풀어 鄭交甫에게 준,
傳聞于此山(전문우차산). 전설이 이산까지 전해오네.
求之不可得(구지불가득), 그것을 구하려 한들 얻을 수 없으니,
沿月棹歌還(연월도가환). 달따라 노젖고 노래하며 돌아오네.
<耶溪泛舟(야계범주)>
落景餘淸輝(낙경여청휘), 석양의 경치는 여운이 맑게 비치고,
輕橈弄溪渚(경뇨농계저). 가벼운 노로 시내의 물가를 젓고.
澄明愛水物(징명애수물), 맑고 투명하여 물속의 것들이 사랑스럽고,
臨泛何容與(임범하용여). 배에 떠 있으니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네,
白首垂釣翁(백수수조옹), 하얀 머리칼의 낚시하는 늙은이.
新妝浣紗女(신장완사녀), 새로 치장하는 浣紗女.
相看似相識(상간사상식), 서로 보며 서로 아는 듯,
脈脈不得語(맥맥불득어). 은근히 바라보지만 말이 없고.
사실, 그는 전원산수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인용한 시들은 말이 釣魚詩지, 다른 문인에게서 보는 낚시의 흥취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萬山潭作(만산담작)>에서 진정으로 낚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시의 내용은 주로 주변의 산수고, 이로 인해 비롯되는 관직에 대한 생각뿐. 보통 낚시인들이 느끼는 찌의 예술적인 솟구침, 낚시대로 전해오는 물고기의 요동, 팽팽한 낚시줄의 긴장, 낚시대를 던질 때의 소리, 또한 낚시터에서의 느낌 등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권세가에게 걸린 물고기가 오히려 부럽게 느끼지는 심정이었으니, 속세의 명리를 초탈하여 자연과 하나되는 시가 나오겠는가? 위의 조어시는 다른 산수자연시, 즉 <夜渡湘水(야도상수)>,<早發漁浦潭(조발어포담)> 등과 다를 바가 없다.
맹호연이 남쪽의 유람을 마치고 고향 양양에 기거할 때, 사천에서 막 나온 이백이 천지를 유람할 때 양양의 맹호연을 방문하였다. 당시에 시명이 뛰어나고 자신보다 12살이 많은 맹호연과 친구가 된 이백은 맹호연의 은거를 매우 부러워하였던 것 같다.
이백은 <贈孟浩然(증맹호연)>에서 “내가 좋아하는 맹호연, 풍류가 천하에 유명하다네. 젊어서 벼슬을 버리고, 나이들어서는 산수간에서 생활한다네. 달을 좋아하여 자주 술에 취하고, 꽃에 미혹하여 임금을 섬기지도 않네. 산처럼 높은 인품 어찌 우러러 보겠는가? 그저 맑게 향기나는 인품에 공경만을 표할 뿐!(吾愛孟夫子, 風流天下聞. 紅顔棄軒冕, 白首臥松雲. 醉月頻中聖, 迷花不事君. 高山安可仰, 徒此揖淸芬.)”이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맹호연에 대해 대단히 존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둘은 마음이 통하여 주변의 산천을 함께 유람하기도 한 듯 한데, 이백의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을 보면, 아마도 江夏(강하)의 황학루까지 함께 왔다가 이곳에서 헤어지며 맹호연을 廣陵(광릉:揚州)로 전송한 듯 하다. 맹호연은 이미 자신의 실의를 시명이 뛰어난 자연파시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나이 40이면 不惑(불혹)이라고 했다. 아마 자신의 일을 결정하고 한점 의혹없이 자신의 일을 당당하게 해 나갈 나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맹호연은 불혹의 나이에 겨우 과거고시를 봤고, 이로 인해 不惑이 아닌 의혹만 키웠지만, 그래도 자신의 낙담을 극복하고 후대에 자연시인으로 크게 평가받는다. 그런 맹호연이 부럽다.
요즘은 나이 40.50만 넘어서면 이젠 자기의 자리가 불안하다. ‘사오정’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사회의 변화를 대변하는 말이지만 약간 모순이 있는 것 같다. 현대사회가 실력을 우선한다고 하면서 나이를 앞세우는 것은 무슨 잣대란 말인가? 오히려 실력을 우선으로 한다면 나이의 한계는 무너져야 하는 것 아닌가? 나아가 40.50.60대 지금의 산업을 일군 주역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결코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기성세대에겐 근면성실이라는 장점이 있다. 갈수록 실력과 연봉을 따지고 사회가 야박하게 변해갈수록 정직과 성실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달콤한 먹이로 인해 권세가나 회사고위급에게 낚인다면 그 신세 또한 한치 앞을 장담할 수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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