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아니어도 행복했던 스웨덴 의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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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가 아니어도 행복했던 스웨덴 의사의 삶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32> 은퇴한 내과 의사 오정옥 박사
    한국의 정치학도가 스웨덴 의사로 산 50년의 특별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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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8-06-30 05:00
    이석원 객원기자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 오정옥 박사는 1967년 스웨덴에 정착해 34년 간 스웨덴 국가 의료 시스템의 의사로 활동해왔다.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 중심가에서 60여km 남쪽, 스웨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섬 고틀란드 가는 페리를 타는 항구 도시 뉘네스함(Nynäshamn). “평화롭다”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이 곳에서 만난, 정년퇴직 후 멋진 은퇴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내과 의사 오정옥(73세) 박사는 몇 번의 ‘특별한’ 인생 경로의 변곡점이 있었다. 그의 삶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1944년 10월, 해방을 몇 개월 앞둔 서울에서 출생한 오 박사는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열악하던 시절 그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정치학자가 될 꿈을 꾸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유학 시험에 합격한 그는 유학을 준비했다. 그때 오 박사의 오빠가 그를 이름도 낯선 스웨덴으로 부른 것이다.

    당시에도 스웨덴은 미국이나 영국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발달했다. 게다가 탁월한 복지 정책과 사회 시스템은 미국이나 영국도 부러워할 환경이었다. 오빠는 오 박사에게 “스웨덴에서 또 다른 민주주의와 복지 정책을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권유했다. ‘오빠 말 잘 듣는’ 오 박사는 그렇게 해서 1967년 스웨덴 땅을 밟게 된다.

    “원래 계획은 스웨덴의 사회 복지를 공부해서 그것을 한국으로 가져갈 생각이었습니다. 한국도 스웨덴과 같은 사회 복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당시 한국은 스웨덴의 그런 사회 복지를 국가에 적용시킬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마침 부모님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고 스웨덴에서 더 공부하고 살라고 권하셨고요. 그렇게 5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네요.”

    ▲ 오정옥 박사와 그의 가족들. 사진 정면이 부친인 오경선 씨,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모친 천봉예 씨, 그리고 맨 오른쪽이 오정옥 박사다. (사진 = 오정옥 제공)

    역시 인생이 예정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첫 번째 변곡점을 맞은 것이다. 오정옥 박사는 예정과는 달리 아예 스웨덴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곧 이어 그는 두 번째 변곡점, 인생 경로를 한 번 더 바꾼다. 문과생이었고, 정치외교학도였지만 그는 스웨덴에서 살기로 하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스웨덴 사회에 가장 빨리 적응하며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그것으로 삼았다.

    오 박사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낯설지 않다. 아버지 오경선(1999년 작고) 씨가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했다. 제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가난한 사람이라도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환자였다. 그러다보니 심야에 찾아오는 응급환자는 다른 의사나 간호사가 아닌 오 박사와 오 박사의 어머니 천봉예(1992년 작고) 씨가 아버지의 시중을 들어 돌보곤 했다.

    결국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오 박사는 스웨덴에서 성인을 위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문과생이었기 때문에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자연계 과목들의 성적이 필요했다. 2년 동안 화학과 수학, 물리와 생물 등 자연계 과목을 이수하고, 아울러 스웨덴어와 영어 공부도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치면 서울대 의대 격인 카롤린스카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1972년 카롤린스카에 입학해서 1976년 졸업했죠. 당시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벨 생리의학상을 선정하는 카롤린스카 인스티튜트가 같은 재단이고, 스웨덴 의료 체계의 핵심이 카롤린스카이기 때문에 유럽 등 서구 사회에서는 아주 유명했죠. 카롤린스카에서 공부한 이상 뒤늦게 시작한 의학이지만 나도 스웨덴 의료 시스템의 중심으로 들어간 겁니다.”

    ▲ 뉘네스함 아파트 발코니에 앉아 있는 오정옥 박사. 등 뒤 발트 해로 이어지는 바다가 보인다. (사진 = 이석원)

    카롤린스카 졸업 후 오정옥 박사는 스웨덴 중부 아베스타(Avesta)라는 곳에서 2년 간 인턴 생활을 했다. 그리고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의과대학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사 일을 시작했다. 주전공은 일반 내과지만 이비인후과도 부전공했다.

    일부 개인 병원이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스웨덴 의료 체계의 핵심은 보드센트럴(Vårdcentral)이라고 부르는 1차 진료기관이다. 스웨덴 환자의 80% 이상은 보드센트럴에서 진료나 치료를 마친다. 암 등 지속적인 치료를 요하거나 수술을 할 경우 보드센트럴을 거쳐 종합병원(Sjukhus)에 갈 수 있다. 이 의료 체계 안에서 스웨덴에서는 1년에 환자가 부담할 병원비가 정해져 있다. 1200크로나(약 15만 원). 약값은 2300크로나(약 28만 원). 그리고 만 18세 미만은 의료비가 완전 무료다.

    오 박사는 보드센트럴 스페셜리스트(전문의)와 종합병원 의사를 거쳐 2014년까지 34년 간 의사로 일했다. 그런데 스웨덴에서는 의사가 한국이나 미국처럼 ‘부’를 누리고 사는 직업은 아니다. 꽤 괜찮은 연봉을 받는 ‘월급쟁이’다. 그런데 오 박사는 바로 그런 점이 의사로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점이다.

    “아버지도 병원을 운영했지만 부자가 아니었죠. 아버지의 환자 중에는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어떤 농부는 봄에 아버지에게 수술을 받고, 가을에 추수를 해서 쌀로 병원비를 대신하기도 했죠. 그걸 보고 자란 탓인지……. 스웨덴의 의료 서비스는 환자를 가리지 않아요. 환자의 경제 상황이나 지위를 고려해야 할 일이 없죠. 그러다보니 부자 의사도 없지만, 아버지 같은 의사도 없습니다. 어차피 모든 의료 서비스는 국가가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스웨덴 의사로 산 게 행복했던 것 같아요.”

    ▲ 1989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여자의사회총회에 참석했을 때. (사진 = 오정옥 제공)

    오 박사는 최근 한국의 이민자들로부터 스웨덴 의료 시스템이 엉망이라는 불평을 많이 들었다. 감기에 걸린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아파하는데 보드센트럴에서는 제대로 진료를 받을 수 없다. 의사는 볼 수도 없을뿐더러, 응급 상황임에도 기다리라는 말만 듣다가, 겨우 만난 의사는 약 처방도 없이 ‘집에 가서 몸을 차게 하고, 물을 많이 마시게 하라’는 말만 듣는다는 것. 그러나 오 박사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과는 분명 다르다”고 말한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 익숙하다보면 스웨덴은 답답하고 불안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한국은 과다 진료와 의료 공백이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쉬러 병원에 간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서 지역에서는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 천지예요. 서울 등 대도시에서 살다가 스웨덴에 온 분들 입장에서 스웨덴은 느리고 답답하고 불성실한 의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웨덴의 의료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적용되는 가장 평등한 복지죠.”

    의사 얼굴 한 번 보기 어렵다는 일부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오 박사는 바쁘고 벅찬 노동 강도의 의사 생활을 해왔다. 종합병원이든 보드센트럴이든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 그는 하루 2시간 자는 것도 호사였다. 하룻밤에 120명의 환자를 본 적도 있고, 2, 3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응급환자를 볼 때도 있었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는 상대적이다. 스웨덴 의료 시스템에 익숙한 스웨덴 사람들은 그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의 의료 서비스는 한국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지만 스웨덴의 의료 서비스는 스웨덴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 오 박사는 의료 서비스는 결코 ‘글로벌 스탠다드’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부에서 스웨덴의 임상 의학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말도 들었다. 물론 오정옥 박사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의사가 되기 위해 거쳐 왔던 길을 생각한다.

    “스웨덴에서 정식 의사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 훈련 등은 유럽에서도 가장 힘들기로 유명하죠. 덴마크나 노르웨이는 물론 체코나 스페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 다른 나라의 의과 대학생이나 초급 의사들은 스웨덴의 의사 과정을 견디지 못할 정도입니다. 유럽에서 의사가 되는 과정은 영국과 스웨덴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이론과 임상 모든 면에서 스웨덴 의학은 유럽 최고 수준입니다.”

    ▲ 이제는 은퇴했지만, 오정옥 박사는 아직도 의학 공부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한다. (사진 = 이석원)

    스웨덴에서 그렇게 의사가 되고, 의사로 살아오면서 오 박사는 아예 일과 결혼을 했다. 당연히 사람과 결혼할 틈은 없었다. 더욱이 오 박사는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의사 일을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결혼해서 일과 가정 모두에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 박사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이역만리 스웨덴에 와서 정착하면서도 가족과 떨어지는 외로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박사의 가족은 모두 스웨덴에서 살았다. 먼저 오빠가 정착한 후 오 박사가 왔고, 그 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울의 병원을 정리하고 왔다. 그리고 여동생과 언니까지 모든 가족들이 스웨덴에 온 것이다. 그러니 스웨덴에 사는 그 어떤 한국 교민들보다 정착 초기부터 은퇴자로 사는 지금까지 그는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오정옥 박사가 사는 뉘네스함이라는 동네는 앞서 언급했듯이 조용하고 평화롭다. 바다를 끼고 있고, 크고 작은 숲이 도시의 건강한 폐 역할을 해준다. 도심의 복잡함이 없으면서도 생활에 불편한 것도 없다. 언뜻 ‘은퇴한 노인들이나 사는 동네’ 같은 인상을 주지만,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각자 제 나름의 모습으로 살고, 스톡홀름 도심까지 이어지는 전철도 있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은 오 박사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쾌적한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즐긴다. 집에서 멀지 않은 클럽에서 주 3회 정도 골프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직도 의학 학회 활동을 계속한다. 스웨덴 국내 학회에도 참석하지만, 간간히 해외 학회에도 꾸준히 참석한다. 또 매일 의학 신문도 보고, 논문도 읽으면서 의학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현역에서 은퇴한 것도 이제 꽤 됐지만, 그래도 난 아직 의사죠. 그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적지 않고요. 스웨덴에서 50년 넘게 가장 행복한 시스템 속에 살았으니 이제 내가 가장 잘 하는 일로 보답도 해야죠. 그것이 나와 나의 가족 모두가 끝까지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발트 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탄 스웨덴 백야의 태양이 오정옥 박사의 얼굴을 밝게 비친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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