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연 스웨덴 특파원’의 50년 격정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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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편집시간 : 2018년 09월 19일 09:30:01
    ‘유명연 스웨덴 특파원’의 50년 격정의 삶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26> 전직 한국일보 기자 유명연 씨
    러시아 공부하려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렸던 그의 치열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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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8-04-07 05:00
    이석원 객원기자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 한국일보의 자매지인 코리아 타임스 기자 출신인 유명연 씨는 내년이면 스웨덴에 온 지 50년이 된다. (사진 = 이석원 객원기자)

    1969년 스웨덴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니 더 정확한 질문이라면, 그 때 스웨덴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기는 했을까? 물론 모든 스웨덴 사람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몇몇 사람들은 한국을 알았다. 스웨덴은 한국 전쟁 당시 16개 참전국 중 하나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통 받는 고아들을 돌보고, 그들을 데려가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줬던 것이 스웨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 한국을 아는 스웨덴 사람들에게 한국은 그저 ‘지지리 가난한 군사 독재국가’였다. 세계서 가장 가난한 나라. 미국의 경제 원조가 없으면, 일본에게서 구걸하듯 받은 식민지배 보상금이 없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나라였다. 그런데 정치 군인이 정권을 잡아 독재까지 하던, 어쩌면 스웨덴 입장에서는 한심한 후진국이었을 것이다.

    유명연 씨는 스웨덴이 한국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때 스웨덴 땅을 밟았다. 그는 당시 스웨덴에 상주하는 최초의 한국 언론인이었고, 낯설지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스웨덴을 전하는 유일한 한국의 신문 기자였다.

    1935년생인 유명연 씨는 황해도 해주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만석꾼’으로 불렸지만, 실은 한 해 5만석의 쌀을 생산하는 갑부였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4학년에 모친의 손을 잡고 서울로 왔다. 4년 후 전쟁이 터졌고, 다시 반년 후인 1.4 후퇴 때 뒤따라 남한에 온 부친과 상봉했다. 황해도 해주 최대 부잣집 도련님의 삶이 그렇게 한 번 심하게 요동 친 것이다.

    원래 그의 꿈은 목회자였지만 늘 그렇듯 삶은 자신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 한국일보 유명연 씨의 기자 신분증. 그는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스웨덴에 주재하는 한국일보의 기자로 활동했다. (사진 = 유명연 제공)

    “원래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려고 했죠. 하지만 그 길은 내 길이 아니었나 봐요. 고려대학교에 갔고, 목회자와는 전혀 다른 길에서 서양사를 공부했죠. 학부에서는 독일사를 전공했고, 나중에 대학원에서는 프랑스사로 석사가 됐어요. 아마도 그 때부터 유럽과의 인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죠.”

    1962년 대학 졸업 후 그는 한국일보의 자매지인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에 입사한다. 코리아 타임스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에 당시 공보처장이던 김활난 씨가 전쟁에 참전하는 유엔군들에게 국내외 뉴스를 전하기 위해 창간한 영자 일간지다. 유명연 씨는 그곳에서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그의 기자 생활은 길지는 않았다. 7년 반, 1969년 그는 장기영 사주에게 “나는 독일과 프랑스 역사를 공부했다. 대한민국을 위해 러시아 역사를 공부하겠다”며 휴직을 요청하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날아갔다. 5월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살 운명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 있는 아내 박정자 씨와 미리암, 미나 두 딸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른 유학생들에게서 ‘스웨덴은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만약 그 때 그가 가족을 데려오면서까지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아니, 오스트리아가 그의 가족을 받아줬더라면. 그의 50년 인생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 두 번째 요동이 치기 시작했다.

    가족을 불러 스웨덴에서 공부하려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스톡홀름 대학교, 웁살라 대학교, 룬드 대학교 등 주요 대학을 알아봤지만, 스웨덴에서 러시아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 스웨덴은 최후진국 한국의 대학 학력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석사 학위 소지자인 유명연 씨는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면 학부와 석사 과정을 다시 다녀야 했다.

    ▲ 유명연 씨가 1976년 현장 취재 보도한 스웨덴 칼 16세 구스타브 국왕과 실비아 왕비의 세기의 결혼식 기사 (사진 = 유명연 제공)

    가족이 스웨덴에 오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당시 스웨덴에 파견돼 있던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거짓 제보를 받고 한국의 중정에 그의 가족에 대한 신원 조회를 중지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한국일보 측에서 유명연 씨의 신원을 보증하고 겨우 가족의 스웨덴 이주 허락을 받는데 무려 1년 반의 시간이 필요했다. 러시아를 공부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켰고, 그가 가족과 생이별하는 시간을 2년으로 늘렸던 것이다.

    “당시 큰 딸은 4살이 채 안됐고, 작은 딸은 태어난 지 1년 반밖에 안됐을 때죠. 거의 매일 밤낮으로 아내와 딸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쳤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어요. 게다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말도 안되는 ‘빨갱이’의 가족으로 낙인찍힐 뻔 했죠. 그건 정말 고통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다가 가족 모두가 스웨덴으로 온 게 1971년 4월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계획했던 공부는 할 수 없었다.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1년 정도 공부하다가 그는 한국일보의 스웨덴 특파원 생활을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휴직 상태였지만, 한국일보는 그의 신문 기자로서의 능력을 그냥 놀리지 않았다.

    1970년 스웨덴에 다른 한국의 언론사가 기자를 특파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사실상 한국 언론으로서는 그가 유일한 스웨덴 주재 기자인 셈이다. 스웨덴은 기자로서 그의 독무대였다. 그는 1985년까지 15년 남짓 ‘한국일보 유명연 특파원’으로 활약하며 10번 이상의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해 취재, 기사를 썼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한국 언론사의 기록이다.

    ▲ 유명연 씨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기는 1978년 3개월간 연재되며 화제를 모았다.(사진 왼쪽) 유명연 씨는 노벨상 시상식에 10번 이상 참석해 현장 취재를 한 한국의 유일한 신문 기자다. (사진 = 유명연 제공)

    1976년 현 스웨덴 국왕인 칼 16세 구스타브 왕과 실비아 왕비의 결혼식을 현장 취재해 보도한 기사는 아직도 한국 언론사에 기념비적인 일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 200여명의 스웨덴과 외신 기자들 사이에 한국인은 유명연 씨가 유일했다. ‘5억이 지켜본 세기의 결혼’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유명연 씨의 기사는, 최근 스웨덴 역사상 최장 집권 기록을 깬 구스타브 왕에게 전해질 계획이다.

    1978년 한국 언론 최초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한 유명연 씨의 ‘시베리아 횡당 여행기’는 또 다른 화제를 나았다. 3개월 연재 기간 내내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연재 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했다는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 씨는 스웨덴으로 ‘유명연 기자께’라며 연하장을 보내 격려하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 ‘한국일보 유명연 특파원’으로 보도하려던 것은 중국 만주 길림성 일대에 있는 광개토태왕비와 장군총에 대한 현장 취재였다.

    “1985년이었어요. 베이징을 거쳐 만주 길림성으로 갔죠. 그때 중국은 한국과 미수교 상태였고, 또 그들은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왜곡하려는 의지 때문에 한국 언론이 이를 취재하는 것을 막았죠. 하지만 나는 그곳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고구려의 역사를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소개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그 취재는 보도되지 못했습니다. 한국 내부의 사정 때문이었죠. 아마 언론인으로 산 세월 중 가장 아쉬운 부분일 겁니다.”

    ▲ 1970년대 초 우연히 가족 모두와 함께 석간지 아프톤
    블라데트(Aftonbladet)에 실린 토요타 자동차 광고 사진을 찍었다. 작은 딸은 사진사들의 요청으로 남장을 했다. (사진 = 유명연 제공)

    언론인의 삶에서 떠나온 후 그는 1988년부터 스웨덴의 중앙 정부 부처인 SIDA에서 일했다. 국제 원조 기관이며 빈곤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는 정부 기관인 SIDA(Swedish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Agency. 스웨덴 이름 Styrelsen för internationellt utvecklingssamarbete 국제개발협력기구)에서 일함으로써 그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스웨덴의 중앙 정부 국가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10년 후인 1998년 그는 정년퇴직을 2년 앞두고 퇴직한다.

    내년 말이면 그는 스웨덴에 온지 50년이 된다. 어감 때문일까? 반백년은 백년과 길이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럼 그 긴 세월, 그는 스웨덴에서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회한은 없을까?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워요. 그러나 훌륭하게 자라준 아이들을 생각하면 스웨덴에 온 것은 백번 잘한 일이죠. 게다가 1970년대 스웨덴에서의 한국 이미지는 ‘모른다’와 ‘독재 국가’ 두 가지였어요. 가장 가난한 나라였고, 심지어 북한보다도 더 못사는 후진국이었으며, 독재 국가이기도 했죠. 당시 스웨덴 최대 일간지인 ‘다겐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의 에바(Eva)라는 기자가 한국의 독재 권력을 비판하는 기사를 종종 썼는데, 그게 스웨덴에서의 한국이었는데...... 그래도 완전히 달라진 대한민국을 스웨덴에서 경험한 것은 아주 멋진 일이었습니다.”

    유명연 씨가 스웨덴에서 활동한 유일한 한국의 언론인이었기 때문이 한국을 보는 스웨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이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던 시절, ‘유명연 특파원’의 기사는 한국에 스웨덴을 알리는 유용한 정보창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스웨덴의 한국인 사회에서 ‘스웨덴을 한국에 알린 기자’라는 명예는 그대로 지니고 살고 있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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