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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기러기 아빠’라도 ‘가족’이 있어서 좋다


입력 2018.03.31 05:00 수정 2018.04.06 08:37        이석원 스웨덴 객원기자

<한국인, 스웨덴에 살다 25>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김범배 씨

일상의 ‘워라밸’ 속에서 사는 그들만 따라해도 ‘워라밸 가족’

외교부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거주 재외 국민은 3174명. EU에서 여섯 번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웨덴에 사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국가의 모든 것이 가장 투명한 나라로 통하는 스웨덴 속의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스웨덴 속 한국인은, 스웨덴 시민권자를 비롯해, 현지 취업인, 자영업자, 주재원, 파견 공무원, 유학생,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까지 망라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스웨덴 사회는 한국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점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스웨덴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김범배 씨는 이른바 '역기러기 아빠'다. (사진 = 김범배 제공)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스웨덴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김범배 씨는 이른바 '역기러기 아빠'다. (사진 = 김범배 제공)

“LG전자를 9년 다니면서 스스로 만족스러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동갑내기 아내와 그리고 내 분신 같은 아이, 이렇게 셋이서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우리는 매일 이렇게 늦게까지 가족도 못 보며 힘들게 일하는데 구글이나 페이스북 처럼 살 수 없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죠. 물론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어서 스웨덴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저랑 아내 모두 외국에서 살아봤던 경험이 없어서 더 늦기 전에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살아보는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참 다른 세상이 여기에 있더군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김범배 씨(35)는 현재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유망한 IT 스타트업 기업에 근무한다. 지난 2016년 8월에 처음 스웨덴 땅에 발을 디뎠으니 1년 8개월째다. (김범배 씨는 회사 사정상 회사 이름은 비공개하기로 했다.)

범배 씨는 주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만들고 이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최근 스웨덴이 유럽 내에서 스타트업의 중심 지역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데, 현재 그가 다니고 있는 회사도 그 중심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IT 회사 중 하나다.

그런데 남들이 다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을 다니면서 그는 왜 스웨덴이라는 낯선 땅을 찾아온 것일까? 범배 씨는 한국의 대기업에서 익숙한 일을 계속 하기보다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회사에서 스스로 빠르게 성장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유명한 IT 기업들은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어떻게 일을 만들어내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배우고 싶은 마음에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소망하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그는 주로 모든 일이 하향접근방식(top-down approach)이었기에 정해진 시간에 내게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것이 주 목표였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대부분의 일이 상향식(bottom-up)이다. 단순히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팀원끼리 무슨 일을 어떻게 언제까지 할 것인지 스스로 정하고 책임도 지는 형태로 일을 진행하기 때문에 일을 직접 수행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김범배 씨는 평균 두 달에 한 번 씩 한국에 간다. 번거로움 보다는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이 앞선다. 사진은 아내 박노을 씨와 아들 시원이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헤어짐의 시간. (사진 = 김범배 제공) 김범배 씨는 평균 두 달에 한 번 씩 한국에 간다. 번거로움 보다는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이 앞선다. 사진은 아내 박노을 씨와 아들 시원이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헤어짐의 시간. (사진 = 김범배 제공)

일은 대만족이다. 그런데 엄청난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그가 한국의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부족하게 느꼈던 게 가족과의 시간이었다. 잦은 야근과 주말까지도 근무해야 하는 환경은 아내와 아이와 함께 할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도 그가 스웨덴을 선택하게 된 하나의 이유였다.

그런데 그는 현재 아예 ‘기러기 아빠’가 돼 버렸다. 아내와 자녀를 외국에 보내고 홀로 한국에서 직장 생활 하는 아빠를 ‘기러기 아빠’라고 부른다면, 정확하게 그는 ‘역기러기 아빠’다. 범배 씨가 스웨덴에 왔을 때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였다. 아내 박노을 씨가 첫 아들 시원이를 낳고 육아 휴직을 내면서 함께 왔다. 하지만 노을 씨가 복직을 하게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갔고 범배 씨는 졸지에 ‘역기러기 아빠’가 되고 말았다.

“회사 같은 팀 사람들이 가족 이야기를 할 때 아내와 아들이 그립습니다. 주로 주말이나 연휴가 끝나고 나면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죠. 특히 가족 중심인 스웨덴 친구들은 보통 2~3월에 가족여행으로 북쪽 지역으로 스키를 타러 가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족 생각이 부쩍 납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아내와 아들과 영상 통화를 하게 되네요. 게다가 아마 거의 두 달에 한 번은 한국에 가나봐요. 친구들은 ‘네가 한국에 있는지 스웨덴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예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게 되면서 범배 씨는 오히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찾았다. 아내와 아들이 한없이 소중하고 간절했다. 오히려 한국에서 살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지는 못해도, 아내와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게다가 범배 씨는 5월에 둘째 아이가 생긴다. 이래저래 요새 그의 삶과 생각을 가득 메우는 것은 ‘가족’이다. 혼자 스톡홀름 시내 여기저기를 다니면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기 옷 매장이다. 큰 아들 시원이는 물론 곧 태어날 둘째에게 입히고 싶은 옷들만 보인다.

지난 해 2월, 아들 시원이의 돌기념으로 노르웨이 베르겐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 김범배 제공) 지난 해 2월, 아들 시원이의 돌기념으로 노르웨이 베르겐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 김범배 제공)

축구 경기장에 가도 마찬가지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는 범배 씨는 얼마 전에도 ‘프렌즈 아레나’라는 스톡홀름의 한 축구장에서 스웨덴과 칠레의 A 매치를 관람했는데, 축구 경기보다도 가족이 함께 축구를 즐기는 모습에 더 눈이 갔다. 그가 느낀 부러움은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축구장을 찾기도 하고, 쇼핑몰을 다니기도 하고. 그의 삶이 조금 더 ‘가족’으로 다가간 것이다.

어쩌면 여기가 스웨덴이기 때문에 더 가족에 대한 간절함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의 주변이 다 그렇다. 스웨덴 사람들은 가족이 최상의 가치인 듯 보인다. 그들에게는 가족을 빼면 삶에 큰 의미가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역기러기 아빠’인 범배 씨는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는 스웨덴 생활이 오히려 가족의 소중함을 더 깊이 공부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한국의 아버지는 하루 평균 6분을 가족과 보내고, 스웨덴의 아버지는 6시간을 보낸다고 들었어요. 그 만큼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 잘 돼 있고, 회사에서도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발달했죠. 스웨덴의 기업은 노동이 중심이라고 하지만, 그 노동에는 가족이 더 소중하게 잠재된 거죠.”

좋은 것은 따라 하기만 해도 괜찮다. 다만 여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만 하면 그저 따라하는 것으로도 상황들은 좋아질 수 있다. 범배 씨는 주어진 시스템을 십분 활용한다. 여건과 시스템이 갖춰져 있으니 그들을 따라서 한다.

범배 씨는 지난 해 7월부터 4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썼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이 있는 한국으로 갔다. 온전히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그 시기 노을 씨가 한국에서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범배 씨가 온종일 시원이와 시간을 보내며 좋은 추억을 가질 수 있었다. 스웨덴의 시스템이 한국에서의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스웨덴 아빠들의 모습이 이제는 범배 씨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사진 = 김범배 제공)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스웨덴 아빠들의 모습이 이제는 범배 씨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사진 = 김범배 제공)

“스웨덴 직장인 중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원한다면 일시적으로 연봉을 조금 줄이며 업무 시간도 줄여 아이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죠. 그리고 육아 휴직은 또 다른 일자리를 창출하죠. 육아 휴직으로 인력이 비면 대체할 계약직(여기서는 컨설턴트라고 함)을 고용하는 게 보편화 돼 있죠. 업무에 있어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미리 개인의 일정 등을 반영하는 등 유연히 대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업무 때문에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아요”

물론 범배 씨가 경험한 스웨덴이 ‘천국’만은 아니다. 세금이 높고 소비 물가도 비싸고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인으로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또 맞벌이가 아니면 스웨덴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큰 단점이다. 결국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제 몸에 맞는 옷이어야 한다.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를 지닌 사람에게 멋지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멋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배 씨에게 스웨덴은 옷맵시가 멋진 모델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옷을 그대로 입으면 몸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스타일이 다를 수도 있다. 제 몸에 맞게 수선을 해야 하고, 그 옷과 어울리는 액세서리 등 장신구도 필요할 수 있다. 범배 씨는 지금 마네킹에 걸쳐져 있는 멋진 옷을 발견했고, 그 옷을 자기 몸에 맞게 재단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범배 씨는 장기적으로는 정한 것은 없다. ‘역기러기’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이 들면 범배 씨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거꾸로 범배 씨와 노을 씨의 커리어가 스웨덴에서도 잘 맞고, 아이들이 스웨덴 교육 시스템이 마음에 들면 더 오래 정착할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천천히 그때그때 맞출 계획이다. 지금 당장 자신만 생각하면 스웨덴이 만족스럽고 정착할 가치 있지만,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만족스러워야 한다.

다만 그는 당장은 스웨덴의 시스템을 활용해 ‘역기러기 아빠’를 극복할 생각이다. 5월 둘째 출산에 맞춰 두 달 정도는 한국에서 원격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또 출산 후 한 달 정도 휴가를 얻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만약 노을 씨가 육아휴직을 얻을 수 있으면, 여름쯤에는 가족들이 다시 스웨덴에 와서 1년 정도 함께 지낼 생각이다.

어쩌면 한 달 쯤 남은 둘째의 탄생, 범배 씨는 이미 지금 유럽 하늘을 거쳐 러시아를 넘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러기’가 돼 있는 지도 모른다.

[필자 이석원]

25년 간 한국에서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난 2월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그 전까지 데일리안 스팟뉴스 팀장으로 일하며 ‘이석원의 유럽에 미치다’라는 유럽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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