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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동화(同化)를 강요하지 않는다


입력 2017.11.27 05:31 수정 2017.11.27 16:09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TK출신이면 같은 성향의 문제판사라고?

유령과 안 싸우려면 '혁명적 조치' 최소화해야

군 사이버사령부 댓글 공작에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전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군 사이버사령부 댓글 공작에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전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된데 대해 여당과 진보진영 측에서 담당 판사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 과거에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죄추정 원칙’을 강조하더니 지금은 이들이 오히려 ‘유죄추정 원칙’을 권하는 분위기다.

인권변호사 출신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3일 자신의 SNS에 "범죄를 부인하는 김관진 피의자를, 구속 11일 만에 사정 변경 없이 증거인멸 우려 없다고 석방시킨 신광렬 판사는 우병우와 TK동향, 같은 대학 연수원 동기, 같은 성향"이라는, 일종의 의혹을 제기했다. ‘사정 변경 없이’라고만 했다면 ‘이유 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 판사와 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TK동향이고 연수원 동기라는 사실을 덧붙임으로써 의도를 드러내 보였다. 법률전문가로서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억지 공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죄추정 원칙은 어디로 가고

같은 당 박범계 의원은 26일 동일 사안에 대해 “어렵게 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소위 ‘물을 먹은 것’”이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은 것으로 보도됐다. 그는 “이런 성급하고도 독단적인 결정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이 석방 결정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51부 재판장인) 신광렬 부장판사의 의지가 투영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박 의원 자신 판사를 지냈다. 그렇다면 ‘성급하고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의심인지도 모르겠다.

박 의원은 이어 “문재인 대통령의 조각 작업이 마무리되고 헌법기관장들이 임명돼 내부 개혁과 정비작업이 이뤄지고 있으나 내부가 진정한 의미의 촛불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동화되기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라고도 썼다. 듣기에 따라 “아직도 정신 못 차린 판사가 있다”거나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정신교육이 제대로 되든 아니면 정리되든 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박 의원이 ‘촛불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민주주의’의 본질을 벗어난 새로운 이념체계로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민주주의는 ‘동화(同化)’를 강요하지 않는다. ‘내부’라는 표현도 어쩐지 거북하다. 사법부도 정권의 한 축이어야 한다는 뜻인가.

‘촛불민주주의’라고 하니까 말인데, 광장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붙이기 어렵다. 약간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렇다. “광장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물론 저잣거리로서의 광장에서는 활발한 대화와 토론이 이뤄지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특징적 측면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군중으로 채워진 광장에는 획일 만이 있을 뿐이다.

"우상을 보면 10대 소녀들은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한다. 비명은 우상더러 들으라고 지르는 것이 아니다. 같은 청중인 다른 소녀들한테 들려주기 위해 지르는 것이다"(데스먼드 모리스, 털 없는 원숭이).

각자 자신이 그 광장에 모인 군중과 완벽히 동화된 일원임을 확인하고 과시하는 행위로서 이들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른다. 같이 정의감을 나누고 함께 울분을 토한다. 다만 거기에 개인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표방하는 민주주의는 개인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TK출신이면 문제 판사인가

피크로콜 군대와 싸워 이긴 가르강튀아는 모든 병사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한 수도사의 차례가 되었다. 가르강튀아는 그에게 쇠이예 수도원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기존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수도원을 짓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가르강튀아는 루아르 강변의 큰 숲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텔렘 지방 전체를 주었다. 이 텔렘 수도원에는 어떤 규율도 제한도 없었다. 딱 하나의 규칙은 ‘원하는 바를 행하라’는 것이었다. 프랑수아 라블레의 풍자소설 『가르강튀아』 이야기다.

“완전히 자유의지에 맡겨도 그들은 잘못되는 법이 없었다. 모두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고상한 사교계에서 지내던 자유인이므로, 그들에게는 명예라는 단 하나의 본능, 단 하나의 자극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이 본능이 그들로 하여금 덕성스럽게 행동하도록 부단히 자극하여 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 하나가 뭔가를 원하면 모두 그것을 같이 하려고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어떤 사람이 ‘마시자’로 하면 모두 마셨고, ‘놀자’고 하면 모두 같이 놀았다. 누가 ‘들판에 나가 즐기자’고 하면 모두 그곳으로 나갔다”(앙드레 글뤽스만, 사상의 거장들, 박정자 역).

판사도 인간이다. 다만 법률에 관한 시험을 통해 재판을 담당할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일반인과 구별된다. 당연히 생각이나 가치관·국가관 등에서 서로 다룰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사법적 판단의 준거로 삼아야 할 ‘헌법과 법률’에는 모든 경우 및 완벽한 해석이 담겨 있지 않다. 기실은 그런 까닭에 ‘법전으로서의 판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판사’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법은 개인인 법관에게 ‘헌법과 법률’을 준거로 판결할 것을 요구하면서 아울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법관의 판단이 때론 서로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판결이 적법성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다고 자부하는 측에서는 자신들의 판단에 동조하지 않는 판사를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공격하고 있다. 왜 ‘촛불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동화되지도 않았느냐 하면서 몰아세운다. 이미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물 먹이는 것이냐고 따지기도 한다.

물론 정권을 빼앗긴 측에서도 검찰 수사나 법원의 판결에 대해 공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장악한 측이 법관을 을러대는 것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집권여당 소속 의원들의 법관에 대한 비판은 동조의 강요로 들려, 검사나 판사들이 위압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 부장판사는 “위법한 지시 및 공모 여부에 대한 소명의 정도, 변소(항변·소명) 내용 등에 비춰볼 때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한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석방이유를 밝혔다. ‘도주 우려나 증거 인멸의 염려가 없다’는 점도 덧붙였다. 이 결정이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자신들과는 달리 신 판사가 개인적 연고에 휘둘려 법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인가. 이는 인격에 대한 심각한 결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남에게 존중받고 신뢰받아야 한다면 자신도 남을 그렇게 대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한 목소리 내는 사회는

“수많은 생물이 우주에 살고 있듯이, 우주는 무수한 중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도 각자가 우주의 중심이다. 그러나 ‘당신은 체포되었소!’라는 속삭이는 음성을 들었을 때 당신의 우주와 그 중심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첫 페이지에 나오는 장면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 그런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체포 구금되어도 법의 보호를 받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 민주국가의 국민으로 살고 있다. 김 전 장관, 임 전 실장의 경우, 일반 형사 피의자가 아니다. 지지난 정부 때 군 요직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아마도 제18대 대통령선거, 그러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낙선했던 그 선거에서 군 사이버사령부를,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잘못 지휘했다는 혐의인 것 같다. 이런 경우에야 말로 진지하게 범죄 성립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현 정부가 정치보복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임기 후에도 인정받을 수 있기 위해서다.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즉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이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 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제레미 리프킨의 설명이다(엔트로피의 법칙, 최현 역).

물질세계에만 통하는 법칙이라지만 인간사회의 질서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게 한다. 정권을 장악한 측은 ‘촛불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야 하겠다고 서두르는 빛이다. 그러나 거기에 투입되는 에너지 역시 엔트로피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또 다른 가치와 질서는,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새로운 무질서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완벽한 준법사회, 완전한 정의사회를 꿈꾼다는 것은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가치, 질서 따위 모든 것이 없어지고 무질서까지도 없어진 상태가 말하자면 열역학에서의 에너지 평형상태일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인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에너지를 투입할 경우 무질서가 커지고, 다음 정권은 그 무질서를 잡겠다고 또 새로운 에너지를 투입하게 될 지도 모른다. 민주정치는 그런 악순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를 말한다. 남은 임기 4년 반을, 자신들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유령들과 싸우느라 낭비하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혁명적 조치’의 최소화 결정을 내릴 일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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