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전에 박제가는 경제민주화의 허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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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년전에 박제가는 경제민주화의 허구를 보았다
    <굿소사이어티 서평>닫힌 사회를 열려던 그의 꿈은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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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5-06-21 10:07
    데스크 (desk@dailian.co.kr)
    ▲ '북학의' 박제가 지음 돌베개 펴냄.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꼽히는 이익. 그가 1760년에 쓴 대표적인 저술 '성호사설'은 정약용을 비롯해 18세기의 젊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읽고 나서 감동받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유심히 볼 대목은 부와 재물의 축적,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 사회와 백성을 가난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그 책이 지적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익의 말이다.

    “두보의 시에서 이르기를 ‘고귀한 것이 없으면 미천한 것도 슬프지 않고 부유한 자가 없으면 가난한 자도 자족할 것이다’ 라고 했다. 천하가 모두 미천하고 가난하다면 모든 사람이 부지런하고 검소해질 것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행복하고 풍족하게 살려면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하는데, 그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가로막는 요인이 바로 부유해지는 것이란 뜻이다. 물자가 부족하고 낮춰 사는 평등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부유하고 풍족하게 산다는 역설적 방법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제기를 해 볼 수 있다. 이것은 혹시 고귀하고 부유한 것을 제거하는 방식의 하향평준화가 아닐까? 실학자 이익이 겨냥했던 행복에 이르는 길이자, 사회안정의 요체란 입장은 요즘 말로 무소유 내지 안심입명(安心立命)쯤이 되겠지만, 그걸 개인의 좌우명이 국가이념으로 삼는다면 좀 곤란한 것 아닐까?

    인간욕망 긍정이 공공이익을 가져온다는 역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그러한 무소유 내지 안심입명이 조선시대와 동서고금 사회의 대부분이 추구하는 윤리였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기독교 윤리, 맹자와 중국의 쑨원(孫文)에 이르기까지 모두 개인적 이익(사익)을 포함한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평등주의교(敎)의 윤리를 숭배했다. 다행히 훗날 서양의 아담 스미스가 등장하여 사익 추구를 설파했고, 결국은 그것이 공익 증진에 이바지한다는 걸 일깨워줬듯이, 우리에게도 근대를 예비하는 선각자가 없지 않았다.

    그게 이익보다 약간 후배 격인 또 다른 스타일의 실학자 박제가(1750~1805)인데, 그는 그야말로 돈키호테였다. 조선조가 그렇게 거세하려 했던 사익(私益, 개인의 이익)과 인간 욕망을 긍정했고, 상공업의 가치를 일깨워졌던 장본인이었다. 이달 리뷰할 책인 <쉽게 읽는 북학의>(안대회 엮고 옮김, 돌베개 펴냄)를 읽으며 여러 번 무릎을 쳤다.

    박제가야말로 ‘조선의 아담 스미스’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위선적인 농본정책에 따른 극빈의 삶으로 온 나라가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인의(仁義)가 강물처럼 흐르는 요순의 시대”를 재현한다고 허장성세를 보였으니 기도 차지 않았다. 막상 그들의 일상 삶은 어땠을까? 200년 전 뛰어난 학자이자 조정의 요직을 두루 경험했던 율곡의 경우도 가난에 쩔어 살아야 했다.

    훗날 시골에 머물던 율곡을 찾아온 고관과 함께 밥상을 받았는데, 고관은 상위에서 숟가락을 댈 곳을 찾지 못했다. 이때 머쓱해진 율곡이 그를 향해 던진 한 마디. “해가 지고 난 뒤 느지막이 먹으면 맛이 있나니….” 뭘 모르는 요즘 사람들이라면 율곡의 청빈과 극기를 칭찬할까?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한데, 율곡 정도가 하루 세끼를 온전히 못 먹었다면,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를 물어야 한다.

    박제가의 명저 '북학의'에 대부분의 백성은 아침저녁 먹을거리가 없이 생계를 꾸려가는데,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저술이란 게 대부분 공리공담인데, 이런 구체적인 리포트로 채워진 책이 '북학의'란 걸 이번에 알고 진정 흥미진진했다.

    삼시세끼 먹는 이가 드물었던 조선시대의 가난

    박제가보다 약간 연상이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호질'과 '양반전'에서 직업 없이 무기력하고 위선에 찬 양반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묘사해냈던 것도 그 맥락이지만, '북학의'는 조금 다르다. 기철학으로 유명한 19세기 선비 혜강 최한기는 안빈낙도 혹은 염빈(廉貧)이란 전통적 캐치프레이즈를 차라리 저주했는데, 그것에 훨씬 앞서서 인간 삶의 향상(복지후생)을 말하고, 조선의 개혁개방을 외친 것이다.

    때문에 박제가는 “안빈낙도란 하등(下等) 인간들의 자기 위안”이라며 자기 제자들에게 상업, 의술, 수공업의 노하우를 익히라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던 최한기의 대선배뻘이 된다. 또 “일찌감치 육경(六經)을 불 싸질렀어야 했다”고 외쳤던 단재 신채호와 같은 계열의 선각자가 박제가였다. 즉, 그는 “검약과 극빈이 인간을 춤추게 한다”는 조선시대적 정의를 단칼에 잘라냈던 인물이다.

    조선의 아담 스미스로 모자람이 없는 박제가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좀 더 일찌감치 구현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품고 '쉽게 읽는 북학의'를 보면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쉬우면서도 비수 같은 이 한마디로 수백 년의 가난 경제학을 그는 통타했다. 드디어 유명한 우물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를 통해 그는 소비가 미덕이며,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는 아담 스미스적 경제론을 주창한다.

    “재물은 우물과 같다. 퍼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여공이 없으므로 그릇이 삐뚤어지든 말든 개의치 않으므로 교묘함을 일삼지 않아서 나라에 장인과 가마와 철공소가 없고, 기술도 없어졌다...그러니 사농공상 모두가 가난해져서 서로 도울 길이 없다.”

    괴담의 오래된 족보 ‘오랭캐 괴담’, ‘왜놈 괴담’

    박제가에 대한 주목은 퇴영과 가난을 이념으로 내세웠던 기이한 시대, 조선에 그 같은 이단아가 있었다는 약간의 위안 때문이 아니다. 그를 통해 시장경제의 싹이 보였다고 위로 받자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진정 놀라운 점은 잘 나가던 청나라와 이웃 일본을 우습게 보는 동시에 소중화(小中華)를 운운하며 자기자만에 몽롱하게 취해 자폐(自閉)의 생활을 하였던 시절에 선진문명(청나라)을 배워야 한다는 자각을 했고, 그에 따른 개혁 개방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당시는 모두가 ‘오랑캐 괴담’에 빠져 청나라를 사람도 나라도 아닌 것으로 우습게 봤고, ‘왜놈 괴담’에 가려 발전하는 일본을 보지 못했다. 박제가는 서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기질 때문에 시야가 좀 달랐던 것일까? 서자가 어디 한두 명일까? 박제가는 자탄을 넘어 전체를 통찰할 줄 알았고, 그래서 부국강병의 방략을 동원해 가난한 나라 조선을 통째로 바꿔 부자나라로 진입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는 수레, 도로에서 종이, 벽돌에 이르는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고(利用) 삶을 풍요롭게 하자(厚生)는 이용후생학파였다. 윤리도덕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민생을 챙기자고 했던 실학자인 그는 군대운용에서 시장 경영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전 청나라 부국강병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히자고 제안했던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가 진정 걸출한 점은 인간 욕망을 긍정했다는 점이다. 그 놀라운 징후가 곳곳에 보인다.

    박제가는 많은 사람이 사회의 악이라고 주장하는 사치품 생산도 옹호하는 급진성을 보였다. 현대의 사학자 임용한은 그래서 박제가를 경제사상가라기보다는 선각자이며, 계몽사상가라서 '꿀벌의 우화'를 쓴 버나드 맨더빌과 닮았다고 지적했다. 16세기 서유럽에서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검소와 절약이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단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중 제일 신랄했던 인물이 바로 버나드 맨더빌이다. 풍자 시인이었던 그는 '꿀벌의 우화'라는 풍자시로 조선과 비슷한 중세의 경제사상을 비난했다.

    사치는 가난뱅이 백만 명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얄미운 오만은 또 다른 백만 명을 먹여 살렸다
    시샘과 헛바람은
    산업의 역군이니
    그들이 즐기는 멍청한 짓거리인
    먹고 쓰고 입는 것에 부리는 변덕은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악덕이지만
    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바로 그 바퀴였다.


    박제가의 '북학의'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조선시대는 마르크스 등장 이전 일찍이 한반도를 무대로 구현됐던 좌파 집단이었다. 유학의 이상향은 대동사회(大同社會)로 요약되는데, 그건 차별이 없고 대도(大道)가 이루어지는 평온한 시대를 일컫는다. 동북아 사회의 구호에 불과했던 그게 현실 속에서 구현됐던 유일무이한 사례가 조선왕조 500년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요즘 떠드는 경제민주화-균형발전이라는 말의 허구

    그래서 '사익론'의 판단 이상으로 조선시대는 요지부동의 경직된 사회였다. 가난에 찌든 경제민주화를 일찌감치 구현했고, 동반성장 아닌 동반가난을 도그마로 삼는 바람에 가난의 땟국물을 일상으로 구현했던 나라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열병처럼 번지는 상생,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구호들이야말로 사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500년 전에 멈춰 서있음을 증명해준다.

    아니 그건 67년 전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했던 우남 이승만 등 건국의 지도자들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무효화한 채 조선왕조의 옛 질서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사익과 기업이윤을 보는 우리 인식이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 단행본 '사익론'(백년동안 펴냄) 머리말의 지적은 정확한 얘기다. 박제가를 떠올리면서 읽어보시길 바란다.

    “시장경제는 국민들의 인식수준과 비례해서 발전하게 된다. 사익(私益)을 나쁜 것으로 보고, 억제해야 할 인간본성으로 취급하게 되면, 시장경제는 더 발전할 수 없다. 사익의 연장선에는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사익처럼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는 정당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익과 기업이윤을 억제하는 정책이 정의롭고 공익을 위한다고 착각한다. 사회에 열병처럼 번지는 상생,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구호들이 사익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반영한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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