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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종 변호했던 박찬종 "2010년엔 항일운동가였는데..."


입력 2015.03.07 10:01 수정 2015.03.07 10:06        김지영 기자

<직격인터뷰>"그 뒤로 5년 동안 반미주의자가 돼버린 것 같아, 왜 그리 됐는지..."

2010년 일본대사 콘크리트 투척 사건 때 김기종 씨의 변호를 맡았던 박찬종 변호사.(자료사진) ⓒ데일리안 2010년 일본대사 콘크리트 투척 사건 때 김기종 씨의 변호를 맡았던 박찬종 변호사.(자료사진) ⓒ데일리안
2010년 7월 일본대사 콘크리트 투척 사건 때 김기종 씨의 변호를 맡았던 박찬종 변호사는 6일 “그 때에는 완전히 항일민족주의자였다”며 “그 뒤로 5년 동안 반미주의자로 외골수가 돼버린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씨는 지난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한국대사 테러 사건의 용의자이다.

5선 국회의원을 지낸 박 변호사는 이날 '데일리안'과 전화통화에서 이 같이 밝히며 “리퍼트 대사 테러 사건은 당시와 목적, 취지, 동기, 실행 방법이 다 다르다. 별개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2010년 일본대사 콘크리트 테러는 김 씨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연을 마치고 퇴장하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에게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졌던 사건이다.

2001년부터 독도의용대 등 독도 유관단체의 고문역을 맡아왔던 박 변호사는 당시 항일반민족운동가이자 독도유관단체 대표인 김 씨가 곤경에 처했다는 지인의 말을 전해 듣고 김 씨의 변호를 맡기로 결정했다.

박 변호사는 “그때 사건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게 아니었다”며 “그 전에 김 씨가 일본 대사관에 대여섯 차례 질문서를 보내 답변을 요구했는데 묵살 당했다. 그러던 중 일본대사가 강연을 한다고 하니 공개적으로 질문을 하기 위해 시게이에 대사가 강연을 하는 프레스센터를 찾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그런데 프레스센터 현관 앞 화분에 돌멩이가 보였다고 하더라. 김 씨가 순간적으로 몇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니 큰 돌은 아니었고 ‘이번에도 질문을 못 하게 하면 돌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결국 질문 기회를 못 얻으니 돌을 던져버린 것”이라고 부연했다.

박 변호사는 일본 극우세력들이 차량으로 도쿄의 주한대사관 정문을 들이받고, 확성기를 설치한 트럭을 몰고 대사관 주변을 돌았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김 씨의 행동이 온당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 변호사는 공판에서 1895년 조선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삼포오루) 전 육군중장이 100여명의 무사를 이끌고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사건을 언급하며 “이때 일본은 시해 사건 주범들을 나가사키에 피신시켜놓고, 1년 뒤에 증거불충분으로 전부 박면했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그 감정들이 쌓여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우리를 계속 자극하니 우발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실형을 선고하느냐”는 취지로 변론했다.

이후 박 변호사는 단 한 차례도 김 씨를 만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박 변호사는 김 씨를 아직도 ‘항일민족운동가’로 기억하고 있었다. 박 변호사는 “그(2010년 사건) 뒤에 김 씨가 점차 외골수로 빠진 게 아닌가, 반미감정까지 축적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그 당시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박 변호사는 김 씨의 당시 행동 분명한 목적, 동기가 있었던 만큼, 이를 리퍼트 대사 테러와 연결 짓는 것은 무리라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그때에도 단체 이름이 우리마당 독도지킴이었다. 그때 김 씨는 항일민족운동가였다”면서 “미국과는 과거사 문제가 없지만, 일본과 과거사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민족감정 같은 게 그 사건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당시 행동만큼은 온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지영 기자 (j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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