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도끼로 당한 아가멤논의 최후, 이유가...

실시간 뉴스
    최종편집시간 : 2019년 01월 23일 14:05:22
    아내에게 도끼로 당한 아가멤논의 최후, 이유가...
    <박경귀의 ad Greece30>비극적 신화와 전설의 왕국, 미케네의 황금 문화유산
    기사본문
    등록 : 2014-11-16 10:05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아가멤논의 비극

    사자문을 넘어선 아가멤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반면 슐레이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금 보물이었다. 미케네 발굴의 최대의 성과는 바로 사자문 뒤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아가멤논은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자줏빛 카펫 환대에 아무런 경계심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자문을 지나 왕궁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는 곧장 내성(內城)으로 둘러싸인 아크로폴리스 중앙에 있는 작은 궁전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가멤논은 집 안의 화롯가로 가서 무사귀환하게 해준 신들께 제를 올렸다. 그리고 남편을 기다리느라 힘겨웠었다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가증스런 거짓말을 진심인줄 알고 흐뭇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아가멤논이 목욕하러 욕조에 들어간 그 때, 왕궁의 한 별채에서는 아가멤논이 첩을 삼기 위해 데려 온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Cassandra)가 왕비가 왕을 죽이려 한다는 참담한 예언을 외치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음모를 꾸미고 있는 ‘가증스런 괴물’, ‘쌍두사(雙頭蛇)’, ‘스킬라(Skylla)’, ‘광기에 사로잡힌 지옥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아가멤논의 죽음을 경고했다.

    “아아, 끔찍하기도 해라. 이 무슨 음모인가?
    이 무슨 새로운 불행인가? 이 집의 안쪽에서는너무나 끔찍한 악행을 꾸미고 있네요.
    혈육 간에는 참을 수 없는 일을,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일을 말예요.
    하나 구원의 손길은 저 멀리 떨어져 있어요.“(아가멤논, 1100~1104)
    “아아, 가엾은 여인! 그런 짓을 하려 하다니!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편을
    욕조에서 깨끗이 씻긴 뒤-
    내 어찌 끝까지 말하리?
    곧 끝장이 날 것을!
    벌써 손을 자꾸만 앞으로 내밀고 있네요.“(아가멤논, 1107~1111)


    하지만 카산드라의 끔찍한 예언을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왕궁의 시종들은 전리품이 되어 먼 타향으로 끌려온 탓에, 또는 신이 들려 제정신이 아닌 여인의 저주가 담긴 헛소리로만 여겼다. 사실 카산드라는 아폴론 신에게서 신통한 예언능력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을 범하려던 아폴론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녀가 말하는 어떤 예언도 사람들이 믿지 않도록 아폴론이 그녀의 말의 ‘설득력’을 빼앗는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에 있을 때, 이미 파리스 왕자가 트로이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란 예언은 물론, 트로이 목마가 트로이 성을 함락시킬 것이라는 예언까지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아아, 가련하구나, 인간의 운명이여! 불행할 때는
    하나의 그늘이 행복을 뒤바꾸어놓고, 불행할 때는
    젖은 해면이 한꺼번에 그림을 지워버리는구나!“(아가멤논, 1327~1329)


    카산드라의 절규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지막 만가(輓歌)가 되고 말았다. 아가멤논은 따뜻한 물로 편안하게 목욕하는 도중에 살해당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갑작스럽게 옷을 던져 시야를 덮어버리고 도끼로 세 번이나 내리쳤던 것이다. 뒤이어 카산드라 역시 왕비에게 살해당했다.

    왕비가 아가멤논을 살해한 것은 오로지 아가멤논이 트로이 출정의 희생물로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바친 것에 대한 원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이었을 뿐, 실상은 남편 살인을 공모하고 충동질한 것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였다. 그는 여인의 손을 빌려 오랫동안 벼르던 복수극을 벌인 것이다.

    ▲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트로이를 정벌하기 위한 그리스 연합군의 대함대가 안전하게 출항할 수 있다는 예언자의 말에 따라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림은 아르테미스 여신이 사슴을 대신 희생되도록 하고 이피게네이아를 자신의 사제로 데려갔다는 전설을 묘사하고 있다.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Francois Perrier(1594~1649)의 1632~1633년 작, Musee des Beaux-Arts de Dijon 소장, 사진 Web Gallery of Art

    ▲ 아가멤논을 죽이려 아가멤논의 침실로 다가가는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를 재촉하는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의 살기 띤 눈동자가 섬뜩하다. 이 작품의 작가는 자고 있는 아가멤논을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단검으로 살해하는 정황을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이나 다른 전거에서는 욕조에서 목욕을 하던 아가멤논을 왕비가 도끼를 내리쳐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가멤논’, Pierre-Narcisse Guerin(1774~1833)의 1822년 작 추정, 사진 Web Gallery of Art

    아트레우스 가문의 엽기적이고 추악한 악행의 고리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에는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의 죽음은 정의의 저주였다며 자신의 복수를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이기스토스는 이미 선조 대부터 내려온 아트레우스 가문의 불행한 친족살해의 비극의 전말을 폭로하고 있다.

    저주의 씨앗이 뿌려진 최초의 사건은 먼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펠롭스는 피사의 왕 오이노마오스(Oinomaos)의 딸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과 결혼하기 위해 오이노마오스 왕에게 전차 경주를 도전했다가 사술(邪術)을 써서 왕을 죽인다. 펠롭스가 왕의 마부 미르틸로스(Myrtilos)를 사전에 매수하여 왕의 전차 수레바퀴가 빠져나가도록 손을 써 놓고 전차 경기 중 왕이 자신을 추격하다 전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펠롭스는 미르틸로스에게 계략이 성공하면 히포다메이아와 동침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가, 막상 일이 성사되자 미르틸로스마저 죽인다. 이로 인해 펠롭스의 가문에 추악한 악행과 비극이 거듭되는 것은 바로 ‘미르틸로스의 저주’ 때문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던 것 같다.

    그 저주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분명 펠롭스의 비열한 범죄행위는 그 이후 자자손손 근친상간과 친족살해의 악행으로 이어진다. 죗값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먼저 펠롭스의 쌍둥이 아들인 아트레우스(Atreus)와 티에스테스(Thyestes) 사이에 일어난 비극을 보자. 두 형제는 이복동생 크리시포스를 죽인 죄로 펠롭스로부터 추방당한다. 두 형제는 미케네 왕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의탁했다가 그의 사후 왕위를 이양받았지만 서로 왕위를 차지하려 추악한 계략을 쓰며 경쟁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가멤논’에서 아이기스토스는 자신이 아가멤논 살해를 모의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해명한다.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 티에스테스에게 왕권을 도전받게 되자 미케네에서 추방했고, 형제애를 과시하는 것처럼 티에스테스를 잔치에 초대해 놓고, 몰래 티에스테스의 자식들을 죽여 만든 요리를 티에스테스에게 대접해 그가 영문도 모르게 먹게 만드는 패악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자신의 아버지가 아트레우스 가문에 저주를 내린 것이라고 말한다. 아가멤논의 죽음은 아트레우스의 패악에 대한 당연한 응징이라는 얘기다.

    ▲ 아트레우스가 동생인 티에스테스에게 그의 아들을 죽여 만든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 ‘티에스테스의 연회‘, 그레고리안 에트루리아 미술관(the Gregorian Etruscan Museum)의 제10실 벽면을 장식한 프레스코화, Orlando Parentini 1559~1565년 작, 바티칸 미술관, 사진 Jean-Pol GRANDMONT

    하지만 아이기스토스는 정작 아트레우스가 이런 패악을 저지르기 이전에 자신의 아버지인 티에스테스가 자신의 아내와 간통하고 아트레우스의 왕권을 위협했던 상황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아이기스토스의 탄생 비화도 추악하기 그지없다. 사실 아이기스토스는 추악한 근친상간의 자식이다. 그의 아버지 티에스테스는 자신의 딸로부터 얻는 자식이 형인 아트레우스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자기 신분을 속이고 딸 펠로페이아(Pelopia)를 겁탈하여 임신시킨다. 그리고 그 딸을 아트레우스에게 시집보낸다.

    나중에 펠로페이아는 자기가 낳은 아이가 아버지의 아들이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자, 아이를 내다 버리고 자살하고 만다. 목동이 주어다 바친 그 아이는 아트레우스가 키우게 된다. 훗날 아이기스토스는 아트레우스를 죽여 아버지의 원한을 갚는다. 결국 신탁이 이루어진 셈이다.

    아트레우스가 죽은 후 미케네 왕권은 동생 티에스테스와 아이기스토스로 넘어갔다. 하지만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인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에 의해 이들은 다시 쫓겨난다. 이후 아가멤논은 미케네 왕이 되고,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이 된다. 아무튼 미케네 왕성은 이런 추악하고 끔찍한 패악이 저질러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형제 간, 사촌 간의 죽고 죽이는 복수극은 오로지 막강했던 미케네 왕국의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에의 끝없는 탐욕이 엽기적인 속임수와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을 대물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트레우스의 조부인 탄탈로스 역시 자기 자식인 펠롭스를 죽여 신들에게 대접하며 신들을 시험했다가 제우스신에게 영원히 물을 마실 수 없도록 하는 징벌을 받은 적이 있었고, 펠롭스는 신들의 배려로 간신히 다시 살아났었다. 아무튼 사람을 죽여 음식을 만들어 잔치를 여는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는 게 이 집안의 내력이라도 된 모양이다. 결국 형제간의 대를 이은 끔찍한 복수극이 아가멤논의 죽음으로 이어진 셈이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가멤논을 살해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결국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모친 살해의 죄를 지은 오레스테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찾아가 아폴론으로부터 살인에서 정화를 받는다.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의 계시에 따라 살인하게 되었다고 해명했었기 때문이다. 사회 질서와 부권(父權)을 중시한 아폴론은 왕이자 남편인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죄를, 모친을 살해한 아들의 죄보다 무겁게 여겼던 셈이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겨 아테네에 와서 아테나 여신의 주재로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배심원들이 찬반 동수인 상황에서 재판장인 아테나 여신은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언하며 아트레우스 가문의 저주의 사슬을 끊게 된다.

    ▲ 모친 살해 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찾아가 죄를 정화 받는 오레스테스, BC 380~BC 370 작품, 르부르 박물관 소장, 사진 Bibi Saint-Pol

    ▲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칼로 찌르고, 복수의 여신들(에리니에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1825~1905)의 1862년 작, 미국 크라이슬러 미술관 소장

    미케네 왕국에서 피비린내 나는 죄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이유에 대해 누구의 잘못이 먼저 시초가 되었는지, 또 누구의 행동이 정당한 복수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끊었어야 할 악행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서로 상대를 향한 복수심만으로 치닫다 보니 비극이 연속되었던 것이다.

    권력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마약과도 같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비극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고다. 그리스 비극이 이 가문의 추악한 악행을 여러 비극 작품으로 만든 이유도 그리스인들에게 더 이상 이런 야만적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아트레우스 가문이 번성하던 시대는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야만적, 약탈적 전제군주 사회였다. 아트레우스 가문이 지배한 BC 15 세기에서 13세기까지 미케네 왕국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만한 확고한 종교적 관념도 윤리적 가르침을 세운 철학도 없었다. 호메로스 이전, 즉 8세기 이전의 시대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와 같은 대중들의 교과서가 될 만한 문학작품조차 없던 시대였다. 전제 군주들의 난폭한 통치를 제어할 국가 법률이 체계화되지 못했던 시대였다.

    문화적 제도적 제동 장치가 없던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그리스 최고의 왕권을 자랑하던 미케네의 왕궁에 절대 권력인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벌어지다보니 왕실 내에서의 불행한 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트레우스 가문에 내려진 저주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법정의 판결로 종결된 것은 왕족의 범죄에 대해 단죄할 수 있는 사회제도가 비로소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금의 나라, 번성했던 미케네 왕국

    아트레우스 가문의 비극이 이 집안 자손들의 그릇된 인성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이들이 서로 차지하고자 했던 미케네 왕국의 왕권이 그만큼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녔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누구라도 욕심을 낼만큼 매력적인 권좌였다는 의미다. 사실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의 뒤를 이어 미케네 문명이 웅장하고 위엄 있는 궁전과 확고한 왕권을 바탕으로 주변 여러 왕국들 가운데 가장 번영했던 것만큼 틀림없다. 트로이 전쟁 당시 가장 많은 함선(100척)과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군사력 또한 그리스 전역의 왕국 중에서 가장 강성했었을 것이다.

    ▲ 도기에 그려진 미케네 전사들의 행렬이다. 대부분의 미케네 도기가 양식화된 문양을 사용했으나 이 작품의 전사 모습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미케네 왕성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되었다. BC 12세기 작품으로 추정,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전사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멧돼지의 어금니로 만들어진 투구이다. 무거운 청동투구 대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전사들의 주 무기인 창과 청동 검이다. 검은 짧지만 양날로 이루어졌다. 오른쪽이 창의 청동 날이다.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미케네 왕성을 보면, 성 안에 촌락을 형성한 거대한 도시 성곽의 형태는 아니다. 성곽은 아래쪽의 외곽 성벽과 위쪽의 내부 성곽으로 나뉘어졌다. 아래쪽에는 군대를 위한 시설과 귀족이나 백성들의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상부의 작은 내성은 왕궁과 신전, 주요 부속시설물을 갖추고 있었다. 주로 왕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비상시에는 왕성에 주민들과 가축을 일부 수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미케네 성곽은 왕궁이면서 작은 도시 성곽의 형태를 띠고 있다. BC 8세기 이후 그리스 전역에서 등장하는 도시국가의 아크로폴리스가 여러 신전을 건립하고 신들의 공간으로만 사용했던 것에 비해 미케네 인들은 인간들의 공간으로 더 많이 활용했던 것 같다. 왕성 주변에는 촌락들이 흩었을 것이며, 이들 촌민들은 왕이 나누어 준 공동경작지에서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 미케네 왕성의 모형도, 왕실 분묘가 성 안과 밖에 있었다.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 박경귀

    ▲ 미케네 왕성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무덤, 상부의 지붕은 유실되었고,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박경귀

    왕성은 거대한 돌로 견고하게 구축되었고, 몇 개의 보루와 깊은 샘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왕성의 안팎에는 왕족들의 무덤이 있었다. 왕실 묘역은 보호를 위해 다듬은 돌을 원형으로 둘러 세워 담장처럼 구획했다. 또 미케네 문명의 무덤은 매장 양식에 맞게 조성되었다. 낮은 바닥의 우물형 묘지나 묘혈(墓穴)을 갖추고 묘 앞에 비석을 세우는 양식이 만들어졌다. 나중에 석실형 분묘나 아치형 분묘 등 점차 화려한 양식의 무덤이 등장했다.

    사자문을 들어서 오른쪽 아래에 있는 원형 구조물에서 왕족들의 고분이 발굴되었다. 이른바 ‘원형 무덤 A’(Grave Circle A)로 불리는 고분이다. 1874년에 슐레이만이 미케네 왕궁 발굴에서 가장 많은 보물들을 찾아낸 곳이다. 슐레이만은 표면에서 3~5미터 깊이를 파고 들어가다가 이 원형무덤을 발견했다. 3000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수 미터 높이의 두꺼운 흙과 돌들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큰 돌로 담장처럼 둘러친 원형 분묘단지에서 5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 원형무덤 A의 모습, 원형 담장 안에 여러 기의 분묘가 있었다. ⓒ박경귀

    그리스 예술혼의 원형 미케네 금세공술

    슐레이만은 5기의 무덤 속에서 황금 장신구를 걸친 19구 가량의 시신과 황금 가면을 비롯한 수많은 황금 장신구들을 발굴했다. 미케네 왕국이 황금이 넘쳐나는 부유한 왕국이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황금 가면은 영웅과 위인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슐레이만은 황금 가면이 아가멤논 왕의 가면일 것이라고 흥분했지만, 원형 무덤 A에서 발굴된 시신과 유물들은 BC 1600~BC 15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최소한 아가멤논이 생존했던 BC 1200년대와는 시대 차이가 많다. 또 아직까지 아가멤논의 무덤이라고 확증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튼 원형 무덤의 주인공들은 최소한 BC 1600~BC 1400년경의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미케네 왕성에서 발굴된 황금가면, 황금 왕관, 청동 검의 황금 장식, 목걸이, 귀걸이 등 황금 장신구 등은 36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정교함을 자랑한다. 당시 금세공술이 뛰어났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동기 시대의 미케네 문명이 당시 가장 귀한 금속이었던 황금을 왕권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많이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황금 장식을 선호하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그리고 크레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금세공술도 이들로부터 전수받았을 것이다. 물론 미케네 인들의 창조적 재능이 가미되었을 것이다. BC 9세기 이후 그리스 고전기에 꽃피기 시작하는 그리스인들의 예술적 재능들이 일찍이 미케네 시대부터 서서히 싹트고 있었던 것 같다.

    ▲ 미케네 왕성의 원형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가면, 대개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왕성의 원형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 왕관과 황금으로 자루가 장식된 청동 검,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왕성에서 발굴된 황금으로 자루가 장식된 청동 검,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왕성에서 발굴된 황금왕관,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왕성에서 발굴된 황금 목걸이, 귀걸이 등 황금 장신구,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은 미케네 공예 작품들

    미케네 왕국은 다양한 공예작품도 남기고 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다. 크레타의 문물이 수입되고 이를 활용하면서 독자적인 물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초기에 크레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은 미케네의 공예작품과 회화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기하학 문양의 도기, 문어 그림이 그려진 도기, 크노소스 궁전 벽화에 그려진 여인들과 유사한 모습의 여인 등이 미케네 유적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 기하학 문양의 미케네 도기, BC 12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문어 그림이 그려진 미케네 도기, 크레타에서 크게 유행하던 문양이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여인’으로 불리는 프레스코 화,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 벽화에 그려진 여인들의 모습을 빼닮았다.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미케네의 한 기념물에 그려졌던 프레스코화 또한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크노소스 궁전의 왕의 사실(私室)에는 8자 방패 문양이 8개가 그려져 있었다. 8자형 방패는 크레타에서 사용된 전사들의 방패였고, 또 방패는 왕권을 상징하기도 했던 것이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의 이러한 상징을 그대로 수용하여 미케네 왕권의 상징으로 활용했던 것 같다.

    ▲ 왕의 사실(私室)에 있는 크레타의 방패 그림, 크레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미케네 왕궁의 한 구조물에 그려진 프레스크화이다.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을 장식하던 그림과 같은 양식이다.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 8자 방패 문양이 그려진 미케네 도기, 미케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미케네 문명의 종말

    미케네 문명은 BC 12세기에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에게 의해 약탈당하면서 갑작스럽게 붕괴한다. 미케네 왕국의 멸망과 함께 역시 그리스 전역도 400여 년 동안 이주민들의 파괴와 약탈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이들 역시 그리스 민족의 일파인 도리아인들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암흑기의 원인과 실체가 아직까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미케네 왕성의 유적지는 튼튼한 성벽의 일부만 당시의 강성함을 짐작하게 할 뿐, 나머지 왕궁이나 왕성의 시설물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건축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기단석과 돌무더기만 여기 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3600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정경이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이곳에서 형제간에,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 죽고 죽이는 천륜을 어기는 비극이 벌어질 만큼 영화로운 왕성이었다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세월의 무상함만 절절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미케네 문명이 성취했던 유물과 유적은 대부분 파괴되고, 유실되어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매우 적다. 하지만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 문명을 그리스 본토에 이식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크레타 문명을 모방하면서 시작된 소박한 문명이 창조적 변용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의 예술적, 문화적 특징의 싹을 키워냈다는 점에서 미케네의 문명의 가치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미케네 왕성 안의 모습, 건축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기단이나 돌무더기만 흩어져 있다. 아가멤논 왕궁이 있던 정확한 위치를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어렵다. ⓒ박경귀

    ▲ 성 안의 백성들의 거주지 또는 군사용 시설의 흔적이다. ⓒ박경귀

    하지만 거대한 몇 기의 무덤이 미케네 왕국의 위세를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다. 미케네 왕성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 언덕에 있는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로 알려진 무덤은 미케네 유적 중 가장 보존이 잘 된 건축물이다. 슐레이만은 발굴 당시 이곳이 아트레우스 가문의 보물창고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발굴 결과 주검을 호화롭게 장식하기 위해 특별하게 지어진 건축물임이 밝혀졌다. 보물창고가 아니라 단순한 분묘였던 것이다. 물론 이곳에선 황금 보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무덤은 ‘아트레우스의 보고(寶庫)’로 명명되었지만, 실제 아트레우스의 무덤인지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 아니다. 물론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아트레우스의 무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만은 틀림없다. 사람들이 ‘아트레우스의 무덤’으로 부르는 이유다. 아무튼 누구의 무덤이었는지 불확실하지만, 펠롭스 가문의 누군가의 무덤일 것임은 분명하다. 무덤에 이르는 문 양쪽에 축조된 보호벽이 잘 다듬어진 거대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무덤의 지붕을 궁륭(穹窿)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건축술을 보여준다. 미케네 문명의 건축술의 수준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이 구조물이다.

    무덤 안의 중앙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바라보면 동심원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포석(鋪石)을 차곡차곡 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지름이 좁아지는 동심원(同心圓)을 만들어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지붕이 굳건하게 서로 밀치고 버티는 벽돌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제원을 보니 바닥에서부터 천정까지 무려 33단이고, 지름이 14.6m, 높이 13.2m라 한다. 엄청난 크기의 원형 천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BC 14세기에서 13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난도의 돔(dome) 공법이 사용된 그리스 최초의 건물인 셈이다.

    ▲ ‘아트레우스의 보고’이다. 사실은 보물창고가 아닌 무덤이다. 3400여 년 전의 무덤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박경귀

    ▲ ‘아트레우스의 보고’의 궁륭형 천정이다. 3400년 전에 이러한 탁월한 건축술을 구사했다는 것이 놀랍다. ⓒ박경귀

    이 이외에도 미케네 왕성으로 오르는 오른쪽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과 귀족들의 무덤인 원형 무덤의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규모나 건축술의 정교함에서 ‘아트레우스의 보고’에 비해 떨어지고 보존 양태도 양호하지 못하다. 또 비공개 시설이어서 무덤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다.

    ▲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사진 Schuppi

    미케네 왕국의 최고 번성기를 누렸던 아가멤논 왕의 무덤 소재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내의 손에 비극적으로 살해된 그는 후대인들에게 자신을 기억시킬 무덤조차 남기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비밀의 장소에 매장된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비운의 왕이다. 미케네 왕국의 후기 왕들이 권력다툼으로 추악한 악행을 저지르긴 했다. 하지만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을 선도적으로 모방하여 BC 15세기에는 오히려 크레타를 제압하고,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문명을 만들어냈다.

    미케네 왕국이 번성하게 된 것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하지만 잦은 전쟁과 왕실의 내분으로 인한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대규모 지진까지 발생해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 같다. 게다가 왕궁을 중심으로 한 재분배 경제체제 등이 붕괴되면서 주민들이 흩어져 그리스 본토의 최초의 문명을 열었던 미케네 왕국은 붕괴되고 만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주)데일리안 - 무단전재, 변형, 무단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