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현대차가 제기한 옛 파견법 6조 3항에 대한 헌법소원 공개변론이 진행되고 있다.ⓒ데일리안
A라는 남성과 B라는 여성이 2년여 사귄 뒤 헤어졌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닌 통상적인 이성 교제였다. 하지만 몇 년 뒤 A씨는 법원으로부터 B씨와의 관계가 ‘혼인 간주’이므로 거액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처럼 황당한 일도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기업과 근로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현대차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최병승(38) 씨에게 현대차가 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 8억여원의 임금을 줘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산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자동차와 중공업 등 법적으로 허용된 사내하도급 체제를 운영하는 기업들이 졸지에 대규모 ‘불법 파견’ 소송에 휘말려 고용계약을 체결하지도 않은 직원들의 수 년치 임금을 물어줘야 할 상황에 처했다.
2007년 폐지된 '고용간주' 조항 적용
최 씨가 거액의 ‘밀린 임금’을 받게 된 것은 지난 2007년 위헌 논란으로 폐지된 옛 파견법 내 고용의제(고용간주) 조항 때문이다.
고용의제란 한마디로, 사업주와 근로자간 고용계약 체결 등 구체적인 고용관계가 없어도 파견 근로자로 2년 이상 일했을 경우 ‘직접 고용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현재 국내법상 ‘하도급’은 허용되지만, ‘근로자 파견’은 불법이다. 사업체의 업무 일부를 하도급 업체에 맡기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력 공급업체로부터 근로자를 파견 받아 일을 시키는 것은 안 된다는 얘기다.
문제는 하도급과 근로자 파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이론적으로 하도급과 파견의 구분은 사용자가 ‘하도급 업체의 생산 결과물에 대해 대금을 지급하느냐’, ‘하도급 업체 직원에게 직접 지휘명령을 하느냐’로 구분되지만, 업종별로 다양한 작업 특성상 실제 현장에서는 이를 구분하는 게 모호할 수밖에 없다”며 “해외의 주요 사례들을 찾아봤지만, 하도급과 파견을 법적으로 명확히 양분화하는 기준을 제시한 사례는 없었다”고 말했다.
옛 파견법 상의 고용의제 조항도 단순히 고용을 간주한다는 언급만 있지, 구체적인 적용 기준 등이 명확하지 않다. 사업주와 근로자 사이에 적용될 구체적인 근로조건이나 다른 법률관계(사용사업주와 파견사업주 사이의 도급계약, 파견사업주와 파견근로자사이의 근로계약) 등에 대해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기준이 없는 만큼 하도급 업체 근로자가 원청업체의 정규직 입사를 목적으로 불법 파견을 주장하며 소송을 걸 경우 업무 형태별로 수많은 사례의 법적 공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쌍방의 의사가 존중돼야 할 계약 관계를 법적으로 강제함으로써 사업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점이다. 이는 헌법에 보장된 ‘의사결정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게 경영계의 주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는 인(人)적 속성이 많이 반영된다”며, “사람의 능력이나 특성, 심지어는 성격까지 파악하는 과정을 거쳐야 고용계약이 이뤄지는데, 이를 무시하고 고용을 강제한다면 고용주는 근로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회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셈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문제점들로 인해 옛 파견법 내 ‘고용의제’ 조항은 2007년 7월 폐지됐고, ‘고용의무’ 조항으로 개정됐다.
한 글자 차이지만 ‘고용의제’와 ‘고용의무’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고용의제는 10년 전의 사안을 놓고 불법 파견으로 판정됐을 경우에도 10년 전부터 해당 근로자가 사업주의 직원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고용의무는 불법 파견으로 판정됐을 시점부터 해당 근로자를 고용할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병승 씨가 ‘고용의제’ 조항을 근거로 현대차를 상대로 승소한 것은 최 씨의 근무와 퇴사 시점이 파견법 개정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최 씨는 지난 2002년 3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약 3년간 현대차 사내하청업체인 예성기업에서 근무했다.
최 씨를 해고한 것은 예성기업이었지만, 법원은 옛 파견법 상의 ‘고용의제’를 적용해 최 씨가 근속 2년이 지난 시점인 2004년 3월부터 현대차 직원이었다고 ‘간주’했고, 2005년 2월 최 씨를 해고한 것도 현대차였다고 ‘간주’한 것이다.
현대차는 이처럼 이미 폐지된 ‘고용의제’를 적용한 판결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헌법재판소에 고용의제 조항에 대해 위헌소송을 냈다. 지난 6월 이 소송에 대한 공개변론이 이뤄졌고, 현재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헌재에서 ‘고용의제’ 조항이 합헌으로 결정될 경우 기업들은 최병승 씨와 같이 2007년 7월 개정 파견법 시행 이전에 2년 이상 근무한 파견근로자에 대해 10년 가까이 소급해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돼 고용간주 시점부터 발생한 그동안의 임금을 모두 지급해야 할 판이다.
특히, ‘하도급’과 ‘파견’의 모호성으로 인해 정상적 계약형태로 취급되던 사내하도급에 대해서마저 구 파견법 고용의제 조항을 적용받을 경우 기업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고용부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국내 300인 이상 대기업 사업장(1939개소) 중 41.2%가 사내하도급을 활용 중이며, 사내하도급 근로자 수는 전체 근로자의 24.6%인 32만6000명에 달한다.
사내하도급 정규직 고용시 첫 해만 6조원 소요
이같은 ‘과거 청산’도 부담이지만, ‘미래의 고용경직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고용의제’ 조항이 합헌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사실상 법에 의해 하도급 근로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이 강제됨을 의미한다.
사내하도급은 파견이 금지된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이 고용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창구였다.
기업, 특히 제조업체들은 업황이 좋으면 많은 근로자를 필요로 하지만, 업황이 나빠지면 많은 근로자들을 고용할 수 있는 여력이 사라진다. 따라서 정규직 근로자는 업황의 평균 수준을 유지하고, 호황으로 인력 수요가 많아질 경우 사내하도급을 통해 충당해 왔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유럽,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은 모두 제조업에 대해 근로자 파견을 허용하지만, 우리나라만 제조업 파견이 금지돼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며, “그 대안으로 어쩔 수 없이 사내하도급을 활용하는데, 이마저 불법파견 문제로 엮이면서 직접고용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사내하도급 근로자의 직접고용이 강제될 경우 기업들의 노동비용 부담이 가중돼 오히려 고용시장이 더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신규 인력을 채용할 돈을 사내하도급 근로자 직접고용 비용으로 다 써버린다는 얘기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내 전 산업이 사내하도급 근로자를 직접고용하게 될 경우 고용 첫 해만 약 5조4169억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연간 11만6764명의 근로자를 신규 고용할 수 있는 규모다.
한국노동경제학회가 2010년 고용노동부의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추정한 사내하도급 근로자 직접고용 비용은 한국경제연구원보다 더 많은 6조4000억원에 달한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국가별 고용규제 현황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처럼 심한 곳이 없다”며, “국내 기업들은 고용 규제에 두 손이 묶인 채 해외에서 미국, 일본, 독일 등 국가의 경쟁업체들과 싸우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미 한국은 저임금 국가가 아닌데다, 고용유연성까지 확보되지 못한다면 국내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며, 고용경직성이 국내 기업들의 해외 이전과 그로 인한 산업공동화(空洞化) 현상을 불러올 것임을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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