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역촌동 은평평화공원 내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동상이 서 있다. ⓒ데일리안
“나도 한국에 태어났으니 한국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어요. 내 조국이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아요.”
그의 동상 앞엔 붉은 장미와 국화꽃이 수북이 놓여있다. 25일 오후 서울 은평평화공원 내에 있는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한국명 서위렴)의 동상은 정복을 입고 차렷 자세로 6.25전쟁 이후 63년째 평화를 이어오고 있는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63년 전.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지만,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며 한국전쟁에 뛰어든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꽃을 가져다 놓은 것.
그의 동상 오른편엔 그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 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
6.25발발 직후 쇼 대위가 미 해군에 자원입대하며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제2의 조국으로 여겼던 ‘푸른눈의 용사’였다.
쇼 대위는 1922년 6월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고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태어나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미국으로 건너가 웨슬리언대를 졸업했다.
쇼 대위는 1945년 해군 중위로 노르망디 작전에 참가했다가 2년 뒤 전역했고,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해군 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사관학교의 민간인 교관으로 생도들을 가르치는 등 우리의 초창기 해군 건설에 크게 공헌했다.
"한국의 평화 유지해야 한다"며 재입대…녹번리 전투에서 산화
이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밟던 중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군복을 꺼내 입었다. 학위 수여식을 6개월을 앞두고 내린 결정이다.
더욱이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역군인이었기 때문에 6.25에 참전할 의무가 없었지만, 제2의 조국인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미 해군에 재입대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직접 가르친 해군사관생도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작용했다. 그에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특히 그는 한국어와 지리에 능통해 즉시 미 극동군 해군사령부 정보장교로 임명돼 인천상륙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인천 상륙작전은 물론, 미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해 김포반도, 행주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그는 1950년 9월 22일 서울 은평구 녹번리 전투에서 매복 중이던 적에게 저격당해 28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6.25전쟁의 총성이 멈춘 1956년 쇼 대위에게 금성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고, 그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아버지 윌리엄 얼 쇼와 나란히 안장됐다.
그는 평소 한국을 ‘Home'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했다. 그의 가족들 역시 한국 사랑이 남달랐다.
쇼 대위의 아버지인 쇼 박사는 1890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1921년 평양 광성보통학교 교사로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했다. 쇼 대위의 부인과 아들은 이화여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로 각각 재직했고, 손녀는 미 공군장교로 한국에서 복무하는 등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