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시위 주역 "서울항쟁 따라했다"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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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문 시위 주역 "서울항쟁 따라했다" 고백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 제자이자 학생지도자 출신 우알카이시
    "당시 우리가 내세운 자유와 민주, 인민들은 뭣에 쓰이는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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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 2011-06-04 08:13
    강효백 경희대 교수
    “1989년 6월 4일 새벽, 수십 대의 탱크와 장갑차들이 천안문광장으로 밀어닥쳤다. 수많은 학생들은 그대로 깔려 죽었다. 탱크와 장갑차들은 도망가는 학생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몸을 납작하게 짓이겼다. 삽시에 천안문 광장은 피와 살점으로 짓뭉게진 광장으로 변하여버렸다. 군인들은 형체를 알 수 없이 눌어붙은 시체들을 삽으로 퍼서 큰 비닐 팩에 담았다. 광장 한 모퉁이에 산더미처럼 쌓여진 비닐 팩들은 불에 태워졌다.”

    이는 필자가 6.4 천안문사태시에 3대 학생운동지도자중의 하나였던 우알카이시(吾爾開希, 1968년생,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 劉曉波의 제자)에게서 직접 들은 증언이다.

    ▲ 1989년 6월 4일 베이징 천안문 참상도, 그림출처 http://www.epochtimes.co.kr/data/photos/200702/pp_7059_10_1171986571.gif&imgrefurl

    1991년 6월 초, 대만의 국립정치대학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하버드대학에 재학중이던 우알카이시를 초청, 강연회를 개최한 바 있다. 시원시원한 어조에다 막힘없는 달변의 강연이 끝나고 자유토론시간이 되었다. 당시 약관 23세의 나이에 ‘민주중국전선(망명정부) 부주석’ 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겸하고 있던 우알카이시와 그런 그의 처참하고 생생한 현장목격담에 반쯤 주눅이 들고, 반쯤 비위가 상한 나는 짧고 메마른 질문을 ‘툭’ 하나 던졌다.

    “그대는 한국을 어떻게 보는가?”

    “89년 6월 베이징의 천안문 학생운동의 모델은 바로 87년 6월 서울의 학생운동(6월민주화항쟁)이었다. 87년 6월 중국중앙방송(CCTV)은 서울시민의 시위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마치 현장중계 하듯 보도하였다. TV화면에 비친 활기찬 서울의 사람들과 거리모습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미국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는, 작고 가난한 나라인줄로만 알았던 한국이 저토록 자유롭고 풍요롭고 배울 것이 많은 나라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탁’, 전혀 예기치 못한 그의 답변은 얼음 조각이 되어 내 앞이마에 차갑게 꼽혔다. 89 베이징 천안문의 모델이 87년 6월 서울의 민주화항쟁이라니......,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몇 가지 질문을 추가했다.

    “89 천안문 학생운동의 실패원인은 무엇이라 생각되는가?”

    “89 천안문 학생운동은 전체를 통수할 만한 투쟁경력과 지도역량을 갖춘 지도자도,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갖춘 조직도 없었으며 우리가 내세운 민주와 자유는 그것이 뭣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는 대다수 중국의 시민들에게는 먹혀들어갈 리 없었다.”

    “일반 중국인들에게 한국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한국과 소련은 수교가 되었는데 한국과 중국은 아직 수교가 되지 않고 있는(1991년 당시) 까닭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 89.6.천안문 우알카이시의 당시 모습. 그림출처 http://www.google.co.kr/imgres?imgurl= http://orientaldaily.on.cc/cnt/news/ 20110107/photo/0107-00176-015b1.jpg
    “나를 포함한 중국대륙의 보통 사람들은 소학교시절부터 세계에는 중국과 상종 못할 세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는 바로 한국,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고 배워왔다. 한국은 마오쩌둥 주석의 장남을 비롯하여 90여만명의 사상자를 낸 중국에 갚아야할 피의 부채가 많은 나라로, 이스라엘은 자본주의의 흡혈귀같은 유대인의 본향인데가 주변의 아랍국들을 괴롭히는 나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백인종차별이 극심한, 백인 그들만의 나라로 교육받아왔다. 한-중 수교가 한-소 수교보다 늦는 까닭은 이런 교육환경과 역사적 배경, 즉 한국과 중국이 서로 피를 흘리고 싸웠던 경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89년 4월 15일 공산당 개혁파의 핵심이었다가 실각한 후야오방(胡耀邦)이 죽자 학생들이 천안문광장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덩샤오핑이 자본주의를 도입해 중국식 사회주의를 추진한 이래 관료들과 특권층이 부를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정부에 자유민주적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서 시위를 벌이자 노동자와 일반시민이 가세했고 저항운동 세력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21일, 우알카이시는 베이징사범대학학생자치회와 베이징임시학생연맹을 창립했다. 다음날, 베이징사범대학에서 개최된 출정대회에는 6만여 학생들이 운집하였다. 23일, 그는 십여만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텐안먼 광장으로 나와 후야오방 전 총서기 추도식장이 마련된 인민대회당 밖에서 자리를 잡은 후 농성을 시작하였다.

    4월 24일, 우알카이시는 왕단(王丹, 6.4직후 체포되어 10년 복역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박사학위 취득, 현재 대만국립정치대 교수), 차이링(柴玲, 여성, 강경파, 프랑스로 망명, 낙태반대운동가로 활동중)과 함께 베이징임시학생연맹을 ‘베이징대학자치연합회’로 개명하고 그 약칭을 ‘대자련(大自聯)’으로 정하였다.

    ‘대자련’은 89천안문 학생운동의 주력조직이었으며 우알카이시는 대자련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때부터 우알카이시는 차이링, 왕단과 함께 89천안문학생운동의 3대 영수로 불리게 되었다. 5월초 중국정부당국이 학생대표들과의 대화의 장을 마련했을 때 우알카이시는 일반학생의 신분으로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회의장에서 당국에 의해 저지당했다. 5월 13일 우알카이시는 왕단 등 6명과 단식을 결의하고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5월 15~18일 구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중-소 정상회담을 취재하러 온 세계 각국의 취재진은 천안문 광장의 항쟁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으로 귀국하던 날 18일 저녁, 환자복차림의 우알카이시와 리펑(李鵬) 당시 국무원 총리와 나눈 대화가 중국중앙방송 CCTV에 방송되어 큰 파문이 일었다.

    리펑 총리의 훈계조의 발언이 끝없이 계속되자 젊고 잘생긴 위구르 족 학생 하나가 갑자기 TV화면 속으로 쑥 들어왔다. 우알카이시였다, 그는 큰소리로 리펑의 말허리를 자르며 외쳤다.

    “총리, 당신의 발언을 중도에 끊고 나선 나의 행위는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데 밖에는 학생들이 굶주리고 있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별 의미없는 미사여구를 끊어버려야겠다. 우리는 구체적인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이곳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 버릇없는 짓 그만두라고 소리치자 우알카이시는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 계속 말을 이었다.

    “총리, 당신이 교통체증 때문에 이 자리에 늦게 나왔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4월 22일부터 당신과 대화하고 싶어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교통체증이 아니라 총리가 여기에 너무 늦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총리가 여기까지 나와서 우리 학생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이 얼마나 희한하고 고마운 일인가”

    우알카이시는 수십만 시위 군중의 최전선에 서서 고르바초프 취재차 왔던 외신들의 발길들을 붙들어 매놓고 CNN, BBC 등 세계유명언론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89 학생운동이 반환점을 돌아 후반부에 들어설 무렵 우알카이시와 왕단은 온건파로 돌아섰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기간 중에 우알카이시는 학생들을 잠시 천안문광장에 철수시켜 정부가 거행하는 외교의전장소로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함으로써 학생측의 애국적 입장을 표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6.4천안문 그 비극적 사태가 발생하기 사나흘 전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는지, 아니면 믿을만한 소식통으로부터 모종의 정보를 받았는지, 아무튼 그는 학생들의 천안문광장에서의 전격 철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판 잔다르크 차이링은 “천안문이 피로 물들어야 중국민중은 눈을 뜰 것”이라고 말하며 끝까지 광장파로 남을 것을 고집하였다. 2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알카이시는 토론과 타협의 민주주의 경험이 없었던 강경파 차이링의 과격한 노선을 애통해하고 있다.

    6.4. 천안문 광장의 대학살 이후, 21명의 폭동내란 지명수배자 명단 중 서열 2위에 오른 우알카이시는 홍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다시 프랑스로, 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타이완 여성을 만나 결혼하였다.

    타이완의 중부의 타이중(臺中)시에 정착한 그는 TV방송국의 정치평론가, IT사업 등에 종사하면서 기나긴 망명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작년 12월 초 우알카이시는 국가권력 전복 선동죄로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랴오닝성 감옥에서 수감생활 중인 그의 스승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대리 참석하려고 했으나 중국 당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

    <참고자료>
    http://en.wikipedia.org/wiki/Wu%27erkaixi
    Tiananmen student leader on revolutionhttp:
    //ireport.cnn.com/docs/DOC-562967?hpt=C2

    글/강효백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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