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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류큐의 명운, 윤봉길이 갈랐다


입력 2011.04.16 10:55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⑨-루즈벨트와 장제스>

루스벨트의 류큐 복속 제안을 마다한 장제스의 속셈과 실책

<@box>

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영웅사관이냐?, 민중사관이냐?, 내게 칼로 두부를 자르듯 일도양단식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 택일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과 그 시대를 살아간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합작품이다. 영웅과 민중은 상호모순 대립보다는 상호보완과 조화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시의 카이로회담, 한국과 류큐의 엇갈린 운명에 관한 대목에서는 자꾸만 영웅사관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 등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전후질서를 구상하며 합의를 이루었다. 여기서 3대국은 일본의 영토제한과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제의하였고 특히 한국의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회담으로 특징된다.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이후로 일본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한다.

2. 만주, 타이완, 펑후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하여야 하고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모든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3. 한국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제가 통치하였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지역들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만주, 타이완 등의 식민지는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잊혀진 왕국이 되어 버렸다. 사실 카이로회담은 류큐왕국이 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연합국측은 유럽전쟁에 주력을 쏟고 있었고 아직 류큐는 미국의 점령하가 아니라 일본의 수중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왜 장제스는 일본의 태평양 도서의 주권박탈 기산점을 1879년이라 하지 않고 1914년이라 하였는가.

2. 왜 장제스는 류큐를 만주, 타이완, 펑후도에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3.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이나 원상회복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는 필자가 19년 전에 제기하였던 의문들이었다(졸저, 동양스승 서양제자, 1992).
근래 공개된 카이로 회담 회의록과 장제스의 일기(미국 스텐포드대학 후버연구소 보존)를 참조하여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한다.

루스벨트, ‘류큐를 통째로 중국에게 주겠다.’

미-중 양국간의 첫 정상회담은 11월 23일 오후 7시경에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왕총훼이(王總惠)국방위원회 비서장을 대동하고 루스벨트의 숙소로 건너갔다. 두 정상은 주로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처리문제를 숙의하였다. 시침이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루스벨트의 입에서 졸음을 확 깨는 말이 튀어 나왔다.

"류큐는 일본에 의해 불법강점당한 활모양의 호형(弧形) 군도이다. 마땅히 탈환되어야 한다. 류큐는 중국과 지리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각하가 원한다면 류큐 군도 전부를 중국에 넘겨주겠다."

루스벨트의 ‘통큰 제안’에 장제스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였다.

“류큐는 우선 미국과 중국이 공동관리한 후, 국제신탁통치에 위탁하여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틀 후인 11월 25일에 재개된 미-중 양자회담에서 루스벨트는 류큐를 다시 거론하였다.

“류큐의 미래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타이완에서 규슈까지 서태평양을 둘로 가르는 류큐는 중국의 안보방파제이다. 그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중국이 타이완만 탈환하고 류큐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타이완은 물론 중국본토의 안보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처럼 중요한 류큐를 침략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의 손아귀에 놓아둘 수 없다. 본인은 아무래도 류큐를 타이완과 펑후열도와 함께 귀국이 관할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장제스의 침묵이 답답하였는지 루스벨트는 간략 명료한 어조로 말하였다.

“각하가 원한다면 전쟁이 끝난 후 류큐를 중국에 주겠다.”

"류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아무래도 류큐는 중미 양국이 공동 신탁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장제스의 불가사의한 우답에 루스벨트는 두 번 다시 류큐를 거론하지 않았다.

좌로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1943,11,22~27. 카이로. 좌로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1943,11,22~27. 카이로.

장제스는 왜 류큐를 마다했는가

장제스는 왜, 무엇 때문에 카이로에서 루스벨트가 거저 주겠다는 류큐 군도를 마다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중국과 대만, 홍콩 등 중화권의 전문가들은 저마다 분분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중국측 입장으로서는 역사의 비디오테이프라는게 있다면 그것을 앞으로 되돌려 교정하고 싶은, 참으로 아쉬운 장면인가, 장제스에 대한 원망과 비판 일색이다. 그 중 중요한 것 셋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제스의 가슴속에는 만주(동북)와 타이완만 있었고 류큐는 없었다. 더구나 장제스는 루스벨트가 류큐를 거론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류큐에 대한 사전준비가 전혀 없었다.

둘째, 장제스의 머릿속에는 일본보다는 중국공산당을 궤멸하는 책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의 전문가들은 “이 전쟁이 끝나면 마오쩌둥 일당 제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혹시 일본의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런데 류큐를 차지하여 일본에 척을 지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다”라고 마치 장제스의 머릿속을 들어가 보기라도 한 듯이 목청을 돋운다.

특히 중국대륙측 일각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장제스가 청년시절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력을 들면서 그가 겉으로만 ‘항일’이지 ‘골수 친일파’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장제스가 항일전쟁을 하게 된 계기마저도 시안(西安)사태라는 감금된 상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하여 ‘울며 겨자 먹기’ 시작한 것이라고 악담에 가까운 인신공격성 비난을 퍼붓고 있다.

셋째,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발언이 중국의 류큐에 대한 영토야욕의 유무를 떠보는, 페인트모션의 일종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류큐 왕국이 독립국이었다는 역사를 잘 알고 있을 루스벨트가 류큐를 송두리째 중국에 거저 주겠다니, 거기에는 반드시 내밀한 흉계가 숨어있다고 지레짐작하여 그처럼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는 분석이다.

장제스를 위한 변명과 해양의식의 미흡

필자는 위의 지적들을 조목조목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장제스가 류큐문제에 대해 미처 준비를 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15일 일기에 이렇게 다짐한다. “류큐와 타이완은 서로 다른 자위에 있다. 류큐는 독립왕국이며 그 지위는 한국과 대등하다. 나는 류큐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즉 장제스는 류큐는 미중 공동신탁통치로, 한국은 자주독립을 제안하기로 카이로 회담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다음은 장제스가 ‘항일’보다는 ‘반공’에 힘썼다는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류큐의 귀속문제와는 별 상관없는 부분이다. 장제스가 자본계급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공산당을 적대시하고 공산당 궤멸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일전쟁 기간동안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일본군에 총력을 기울여 맞대응하다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그와 반면에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허허실실의 유격전을 구사하면서 암암리에 공산군의 전력향상에 힘썼다. 이는 장비와 병력에 있어서 공산당을 압도하였던 국민당 군이 국공내전에 연전연패하고 결국 타이완으로 패퇴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세 번째 지적에 대한 것으로,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진의 파악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통큰 제안’에 중-미 공동신탁 통치안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었다. 류큐의 완전한 독립 회복을 요구했어야 했다.

동시에 일본이 탈취한 영토회복의 기산점을 1914년에서 1879년으로의 소급을 제안하였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중국의 영토팽창욕구에 대한 서방세계의 의구심도 불식시켰을 뿐만 아니라‘일본 점령지의 해방’이라는 카이로회담의 종지와도 부합되는 양수겸장의 카드로 작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래도 여전히 중국측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원망과 후회, 탄식이 남는다. 장제스가 평소 그답지 않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였을까?, 이에 필자는 기존의 중국의 전문가들이 언급하지 않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 단 한 가지만 들고자 한다.

한마디로 해양의식의 미흡이다. 장제스는 대부분의 중국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박약했다. 중국에서 물고기라면 으레 강과 호수에서 사는 담수어를 의미할 만큼 바다의 쓸모는 기껏해야 소금을 생산하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아니, 소금마저도 바위소금(암염), 소금우물(염정)에서 상당부분 충당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다와 완전히 담을 쌓고도 살아도 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 지속된 금해(禁海)정책으로 바닷가는 왜구의 침략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 귀족은 물론 평민도 살기에 부적격한 위험지대로 여겨졌다. 당연히 장제스는 류큐군도가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를 읽지 못하였다. 또 당연히 장제스는 공산당 치하의 화북지방과 만주지방의 육지영토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의거 이틀 전 1932.4.27. 태극기 앞에서의 윤봉길 의사(당시 만23세) 의거 이틀 전 1932.4.27. 태극기 앞에서의 윤봉길 의사(당시 만23세)
한국은 윤봉길이 있었고 류큐는 윤봉길이 없었다

끝으로 가장 궁극적이며 현실적인 문제, 왜 한국은 독립하였는데 류큐는 일본의 일부로 남게 된 걸까? 한국과 류큐 둘 다 중국과 실리호혜의 조공관계에 있었지만, 엄연한 자주독립국이었다. 그런데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 또는 중국영토화를 마다하고 한국의 독립만을 주장했을까?

실제로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은 한국에 대해 미-영-중 3국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였으나 장제스는 이를 일축하는 대신 한국의 독립의 약속을 선언에 발표하자고하여 기습적으로 제안하여 관철시켰다. 누구 때문이었을까? 무엇 때문이었을까? 딱 한 사람만, 딱 한 사건만 들라면, 역사는 명쾌히 대답할 것이다. 그 누구는 한국의 청년 윤봉길(1908-1932)이고, 그 무엇은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1932.4.29.)라고.

장제스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를 일컬어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다. 윤봉길 의거 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할 일없는 망명객들이 내부투쟁이나 일삼는 파락호집단으로 쯤으로 여기고 한 푼도 돕지 않았었다.

그런데 수통 폭탄 한방으로 일본 침략군 사령부 이동체를 일거에 섬멸한 윤봉길의 쾌거를 접하고서야 장제스는 물심양면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반면에 류큐인은 류큐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일찍이 일본에 병합된 그만큼 일본에 의해 완전히 순치되었는지, 독립의지와 그 실천이 너무나 미약하고 미미했다.

카이로 회담전인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첫날인 11월 22일, 그의 일기에‘종전후 한국의 완전 독립과 자유의 건의 예정’이란 자구를 명기하기까지 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인 이승만도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최대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 답은 윤봉길이다. 한국은 윤봉길이 있었기 때문에 광복을 성취했고, 류큐는 윤봉길 같은 항일독립영웅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표1>참조).


심난했던 동북아의 창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의거를 감행한 윤봉길 의사의 24년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의거가 항일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위에 대한민국이 섰다.

<참고문헌>

강효백, ‘윤봉길의사 연행시 사진진위 문제(논문)’, 서울: [중국학연구],제2권-제1호, 2001. 11.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은 일본’, [동양스승, 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의열투쟁과 한국독립운동], 서울: 국학자료원, 2003.
胡德坤, [戰時中國對日本政策硏究],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0.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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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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