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림 속에 안장된 빛나는 무덤 ‘광릉’

입력 2009.10.07 18:37  수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조선왕릉을 찾아서⑨-세조와 정희왕후릉>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 석곽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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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에서 본 광릉, 세조의 왕릉

광릉의 이름을 따서 국립수목원을 광릉수목원이라 불렀다. 국립수목원 가까이 오자 길가의 엄청나게 큰 전나무 가로수가 도열하는 듯 길손을 반긴다. 가로수는 난폭한 자동차에 들이받혀 상처가 심하게 나있었다. 오래된 큰 나무라는 뜻의 노거수들을 보호차원에서 타이어를 부착시켜 놓았다.

이렇게 멋진 길을 조금 천천히 달리며 숲이 주는 청량감을 느끼면 될 것을 사람들은 점점 더 성질 급하게 차를 몰아서 오래된 거목에 생채기를 만들었다.

왕릉가는 환상적인 숲길,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인다

문화재청 광릉소장(소장 이소연)을 만나 광릉에 대해 취재를 나왔다고 협조를 구했다. 기꺼이 따라나서 준 이 소장과 문화관광해설사 이영덕 선생께 감사인사를 드린다.

입구부터가 국립수목원이 왕릉의 한 부분이라 거대한 전나무와 소나무 등의 각종 나무들로 울울창창하다.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광릉 가는 길에는 마사토가 깔려있고 길옆에는 배수가 잘 되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맑은 물이 철철 흐른다. 약 400m의 환상적인 숲길이 아쉬울 정도로 마음이 편안하고 넉넉해진다.

세조 왕릉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 비각이 있고 왕릉 2개가 푸른 초원으로 조성된 언덕 위에 떨어져있다. ‘왕릉부터 먼저 가봐야겠죠’ 라며 이 소장이 세조의 왕릉으로 안내를 한다. 풀 섶에는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놀라 풀쩍 뛴다. 자연이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연기념물인 국립수목원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름 모를 꽃들은 피어있고 약 200m를 천천히 걸어 오르니 이미 붕어한지 수백 년이 지난 왕의 무덤 참배도 경건하고 조심스럽다.

무인석 어깨가 오랜 세월을 지나며 풍화되어 부상당한 장수란 생각이 스친다

이윽고 도착한 조선 7대왕 세조왕릉에는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무인석이 양옆에 늠름하게 호위하고 있고 왕에게 지혜와 바른 정치를 가르쳤던 문인석이 왕릉 가까이 있다. 장명등과 혼령이 논다는 널따란 혼유석, 곡장 안쪽에 석호 석양이 왕릉을 호위하고 왕릉은 그 권위와 위엄을 사후에도 자랑한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성됐다고 한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했다.

세조왕릉에서 정희왕후릉을 가는 지름길, 소나무 원시림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했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됐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무인석의 한쪽은 비바람에 풍화되어 조금 훼손됐고 이끼가 끼여 있어 처연하게 느껴진다. 배산임수 지형에 건너편의 안산과 좌청룡우백호를 갖춘 따뜻한 양지쪽에 자리 잡은 왕릉은 풍수지리를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 봐도 천하명당이다.

이곳의 울창한 산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곳이며 조선왕조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1453년 계유정란으로 단종을 지키던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끝내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사약을 내린 세조는 제위기간 내내 양심적 가책을 느꼈으리라.

또한 형제였던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첫째아들인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형수였던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의 무덤마저 파헤쳤던 권력의 화신이 세조이다.

그래서 지은 업보를 씻어내기 위해 불교에 심취하고, 왕권강화와 국방을 튼튼히 하고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려는 의욕은 남달랐으리라 짐작해본다.

가을의 광릉 가는 숲길, 왕릉은 4계절을 가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세조 왕릉에서 지름길로 만든 정희왕후릉 가는 길은 등고선 높이가 비슷한 숲길로 아름드리 소나무와 원시자연이 잘 보존된 곳이다. 조선왕조에는 왕릉이 들어서면 왕릉 주변의 민가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여 왕이 잠든 곳을 왕명으로 보존했다고 한다.

정희왕후 윤씨! 왕보다 오래 살아 예종, 성종의 뒤에서 정사를 주물렀던 조선역사에 철의 여인으로 기억되는 수렴청정을 처음으로 했던 인물이다. 두 분이 합장능이 아니고 떨어져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태로 안장된 것은 저승으로 간 시간차가 큰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미루어 짐작해본다. 정희왕후의 능은 여성이라서 곱게 단장되었다는 느낌이다.

무인석, 문인석과 석마, 왕릉을 지키는 의미일까? 지난 시절 왕권을 상징하는 뜻일까? 이끼가 심하게 끼어있어 피부병에 시달렸던 세조임금이 오버랩 된다

역사를 바로 알면 사람은 바로 선다. 역사 속에는 인간의 시행착오와 많은 교훈이 새겨져있어 오뚜기 같은 중심추가 작용하는 게 아닐까?

가까운 왕릉을 찾아서 그 속에 묻힌 역사의 뒤안길을 새기며 걸어보자. 새롭게 다가오는 역사와 삶의 반추는 인생을 윤택하게 하고 삶의 깊이를 더하게 할 것이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릉, 밑에서 본 전경

자연은 온갖 생명체의 보금자리인데 인간의 무모한 욕심으로 천연 자연은 점점 사라져가고 훼손된다. 하나 뿐인 지구는 곳곳에서 신음을 하고 있다. 국립수목원에서 사라진 크낙새의 날개 짓이 보고 싶어진다.

숲 속에서 삼림욕을 하는 가족들, 왕릉을 지키기 위해 만든 원찰 봉선사와 봉선사 채마밭이었던 연꽃 밭에서 백련과 홍련을 감상하고, 배가 출출하면 유명한 포천갈비와 막걸리를 곁들이면 눈과 입과 마음이 즐겁고 삶이 재충전 되는 하루가 되리라.

왕릉가는 환상적인 숲길

하늘에서 본 광릉, 하트 모양인가? 승리를 다짐하는 V자인가?
[데일리안 경기=박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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