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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입력 2008.09.03 09:42 수정        

<음주고사> 이백(1)

“술을 한번 마시면 반드시 삼백 잔은 마셔야지.(會須一飮三百杯)”

이백하면 항상 술과 달이 떠오르는데, 술과 달의 이미지가 이백처럼 잘 결합되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그의 낭만적인 성격과 호쾌한 기질, 시의 풍격 등이 이런 이미지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이백하면 으레 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론이 분분하지만, 이백이 술에 취해 강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는 이백의 이미지를 제고시킨 결정판인데, 그는 결국 술에 취해 달속으로 승천한 것이다. 지금은 아마 달에서 토끼를 벗삼아 술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토끼눈이 빨간 것도 바로 이백의 술 때문인가?!

중국 사천성의 한 주류회사에서는 ‘시선태백주(詩仙太白酒)’를 만들어, 1959년에 전국술품평회에서 국경절10주년기념석상의 공식술로 지정되었고, 1984년에는 국가관광국에서 일본까지 수출하였다. 이 주류회사가 이백을 주요상표로 내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니겠는가?

중국 시인 중 이백처럼 신비한 존재로 인식되는 인물도 드물다. 일필휘지로 시를 단번에 써내는 천부적인 재능, 삼백 잔을 마셔야 시가 나오는 독특한 시작방법, 거칠 것이 없는 광방한 행동, 달을 무척이나 좋아한 성격 등등이 그를 신비한 인물로 만들었겠지만, 출생과 죽음에 대한 역사적인 의문, 확실치 않은 그의 생애 등등이 여러 가지 억측을 낳았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고사들이 나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우선 그의 이력을 보자.

이백은 어머니가 이백을 가졌을 때 ‘태백성(금성)’이 품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었기에, 아들의 자(字)를 ‘태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701년에 태어나 76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 唐은 현종(玄宗)의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인하여 최고의 번성기를 이뤘다가 안사의 난(安史의 亂:755년∼763년)을 겪은 시기였다. 당은 안사의 난 이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백의 祖籍은 분명치 않은데, 유대걸(劉大杰)의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는 “이백의 조적은 감숙, 출생지는 서역, 자라난 곳은 사천, 오랑캐와 한족 사이의 혼혈아다. ……산동과 금릉은 모두 그가 중년에 잠시 거처한 곳이거나 혹은 그의 먼 조상의 관적일 것이다(李白的祖籍是甘肅, 生於西域, 長於四川, 是一個胡漢的混血兒.……至於山東金陵都是他中年寄寓之地, 或是他的遠祖的籍貫.)”라고 하였다.

또한 이양빙(李陽氷)의 <초당집서(草堂集序)>와 범전정(范傳正)의 <당좌습유한림학사이공신묘비(唐左拾遺翰林學士李公新墓碑)>를 참고로 하면, 이백의 조상은 수(隋)나라 말기의 난을 피하여 서역 일대를 떠돌며 성과 이름을 감추고 살다가, 신룡(神龍:705년∼707년) 초기에 서촉(西蜀)의 광한(廣漢)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시기 이백의 부친은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객(客)’이라고 불렸다.

이백의 생애는 대략 여섯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사천성 고향에 머물던 시기(701년∼724년). 둘째, 유랑과 안륙(安陸: 지금의 湖北省 安陸縣)에서의 결혼시기(724년∼730년). 셋째, 벼슬을 위한 유랑시기(730년∼742년). 넷째, 장안시기(742년∼744년). 다섯째, 두 번째 유랑시기(744년∼755년). 여섯째, 안사의 난으로 인한 유배와 세 번째 유랑시기(755년∼762년) 등이다.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시기. 22세 남짓할 때까지 고향에 있었던 이백은 “5세에 육갑을 외울 수 있었고, 10살에 제자백가의 서적을 읽어서 황제(黃帝)시기 이후의 일들을 제법 알게 되었으며, 항상 책을 보다가 아무렇게나 두고, 글을 지어도 싫증나지 않았다(五歲誦六甲, 十歲觀百家, 軒轅以來, 頗得聞矣. 常橫經籍書, 製作不倦.)”(<上安州裴長史書>)고 하였고, 15세에 “기이한 책들을 보았고, 부를 지으면 사마상여를 능가하였다.(十五觀奇書, 作賦凌相如.)”(<贈張鎬>)․“나이 열 다섯에 검술을 좋아하여 제후들 사이를 유세하였습니다.(十五好劍術, 徧於諸侯)”(<與韓荊州書>)․“나이 열 다서에 神仙을 배워, 신선처럼 노니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十五學神仙, 仙游未曾歇.)”고 하였다.

18세(혹은 16세라고 함)에 대광산(大匡山)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였는데, 약 4년여에 걸쳐 산림생활을 맛보았으며,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도사를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재주(梓州: 지금의 四川省 三台縣)로 가서 <장단경(長短經)>을 쓴 종횡가(縱橫家) 조유(趙蕤)에게 1여년 동안 왕도와 패도의 통치술을 배웠다. 또한 당시의 저명한 문장가이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소정(蘇頲: 670년∼727년)을 만나, 그의 시부가 아직은 완전한 개성을 갖추지 못했지만 학습을 통해 보완하면 사마상여(司馬相如)에 비견할 것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둘째 시기. 724년에 친구 吳指南과 남쪽의 초(楚)땅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먼저 사천의 아미산(峨眉山), 성도(成都)부근, 평강강(平羌江), 청계(淸溪), 삼협(三峽)의 장강(長江)을 따라 유주(渝州: 지금의 사천성 重慶), 동정호(洞庭湖)(725년 친구 오지남은 동정호 부근에서 죽었음), 金陵(지금의 南京), 廣陵(지금의 揚州), 여매(汝梅), 운몽(雲夢)을 거쳐 안륙(安陸)의 수산(壽山)에 은거하였다. 26세에 이곳에서 고종(高宗) 때 재상이었던 허상공(許相公)의 손녀와 결혼하고, 장안으로 떠나던 730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무렵 이백의 시문이 제법 무르익었고(“三十成文章”(<與韓荊州書>), 맹호연(孟浩然:689년∼740년)을 만났다.

셋째 시기. 730년에 관직을 얻기 위해 장안으로 떠난다. 장안의 부근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였고, 장안에서 하지장(賀知章)을 만나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天上謫仙人)’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지만, 관직의 길은 아직도 요연하였다.

그리하여 실의로 인해 장안과 낙양(洛陽)을 오가며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731년에 황하를 따라 송성(宋城), 양원(梁園: 지금의 河南省 開封), 숭산(嵩山) 등지를 유람하며 친구를 만나고, 734년에는 양양(襄陽: 지금의 湖北省 襄樊)을 유람하였고, 735년에는 태원(太原)에서 곽자의(郭子儀)를 만났고, 숭산(嵩山)에서 은거하는 친구 원단구(元丹丘)를 만났다.

737년에 안륙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남쪽으로 안의(安宜: 지금의 江蘇省 寶應縣)를 거쳐 吳땅을 유람하고, 당도(當塗: 지금의 安徽省 當塗縣)까지 갔다가 돌아와, 이듬해 736년에 동로(東魯)로 이주하여 임성(任城: 지금의 山東省 濟寧)에 기거하였다.

이곳에서 740년 한준(韓準)․배정(裴政)․공소부(孔巢父) 등을 사귀고, 다음해 장숙명(張叔明)․도면(陶沔) 등과 더불어 조래산(徂徠山)의 죽계(竹溪)에서 술과 시를 즐기며 놀았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죽계유일(竹溪六逸)’이라고 불렀다.

742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자녀들을 남릉(南陵: 安徽省 南陵縣)에 두고서 월(越)땅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도사 오균(吳筠)을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마침내 오균이 조서를 받고 상경하여 이백을 현종에게 추천하여, 마침내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넷째시기. 오균과 하지장의 추천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란 벼슬을 얻었고, 이 기간에 장안에서 하지장,이적지(李適之), 왕진(王璡),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晋), 장욱(張旭), 초수(焦遂) 등과 술과 시로써 어울리니, 이들이 곧 杜甫가 말한 ‘음주팔선인(飮酒八仙人)’이다. 이 3년의 기간동안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다느니, 양귀비에게 묵을 갈게 하고 고력사에게 벼루를 들고 있게 했다는 등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장안에서의 생활과 현종의 총애․이백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당 천보(天寶)연간 봄, 어느날 당 현종 이융기와 애비 양귀비가 흥경궁(興慶宮) 침향정(沈香亭) 가에서 모란을 감상하는데, 악사들이 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도왔다.

막 몇 구절을 노래하는데 현종은 곧 손을 저어서 제지하며 “오늘 명화를 감상하는데, 귀비에게 어찌 옛날 노래를 들려주겠는가? 이학사(이백)를 빨리 궁으로 불러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다시 노래하자꾸나!”라고 하였다.

고력사(高力士)가 급히 사람을 보내 한림원(翰林院)으로 가서 이백을 찾았지만 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장안 길가의 한 술집에서 그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술에 크게 취하여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의 귀에 대고 크게 “황제의 조서를 알리노라! 이학사는 흥경궁의 침향정으로 임금을 알현하도록 수레에 올라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술에서 깨지 않아서, 몇 사람이 그를 말에 태워서 흥경궁(興慶宮)으로 싣고 왔다. 현종은 그가 떡이 되게 취한 것을 보고, 침향정가에 모포를 펼치라고 재빨리 명령을 내려서 이백을 쉬게 하고서, 친히 용포의 소매로 그의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고, 친히 그에게 해장국을 떠먹여 주었다.

조금 지나자 이백이 깨어나서 눈을 뜨고 보니, 현종이 눈앞에 서 있어서 황급히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인사를 드렸다.

현종은 죄를 묻지 않고 다정하게 그에게 말했다. “오늘 모란이 만발하여, 짐이 애비와 함께 감상하여 즐기는데 옛날 가락은 듣고 싶지 않으니, 새로운 노래를 지으려고 자네를 불러온 것이네.” 이백이 머리로 땅을 치고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현종에게 먼저 자신에게 술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현종은 이해할 수 없어서 “너는 막 술에서 깨었는데 어찌 술을 마시려고 하는가? 다시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이일을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이백은 답하여 “신은 한말의 술로 시 백편을 쓰고, 취한 뒤에는 시흥이 샘물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현종은 다만 사람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그에게 술을 내렸고, 이백은 연거푸 몇 잔을 마시고 천천히 술에 취하여 마침내 흥에 겨워 붓을 놀려서, 마침내 세 수의 유명한 <淸平調>를 곧장 완성하였다.

두보가 <飮酒八仙人>에서 “이백은 한 말의 술에 시 백편, 장안의 저잣거리 술집에서 잔다네. 황제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저는 酒中仙이오’라고 하네.(李白斗酒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라고 표현하였는데, 아마도 이 고사를 중심으로 이백의 기질을 읊었던 것 같다.

두보는 안사의 난 중에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숙종을 배알하여 관직이라도 얻으려고 가다가 반군에 포로가 되어 다시 장안에 연금되었으며, 나중에 봉상(鳳翔)으로 가서 숙종을 배알하고 좌습유를 받지만 이마저도 약 5개월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러한 두보의 입장에서는 생각하면, 이백의 기질과 재능이 얼마나 부러웠겠는가?

다섯째 시기.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동로(東魯) 태주(兗州: 지금의 河北省과 山東省 일대)에 집을 마련하고, 梁園(지금의 河南省 開封)을 중심으로 산동성, 산서성, 하남성, 하북성, 호북성, 호남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를 유람하였다. 이시기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고적(高適)과 양원에서 노닐기도 했다.

또한 749년 무렵에 금릉에 머물며 강남 지방을 유람했는데, 이무렵 네 번째 아내로 그와 말년을 같이 한 종(宗)씨를 맞아들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엔 남쪽의 역양(歷陽: 지금의 安徽省 和縣), 선성(宣城), 추포(秋浦: 安徽省 貴池縣) 등지를 유람하였다.

여섯째 시기. 안록산이 낙양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접할 때, 이백은 금릉에 있었고, 당 현종이 난을 피하여 촉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이백도 여산(廬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무렵 현종의 여섯째 아들인 영왕(永王) 린(璘)이 현종에게 산남(山南)․강서(江西)․영남(嶺南)․검중(黔中) 절도사로 임명되어, 병사 수만을 이끌고 강릉(江陵)에 머물렀는데, 이때 이백은 李璘의 막료가 되었다.

李璘은 肅宗의 명령을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高適이 이끄는 관군을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하고 李璘을 살해하였다. 이백 역시 반역죄를 받아 심양(尋陽: 지금의 江西省 九江市)의 옥에 갇힌다. 결국 최환(崔渙)․송약사(宋若思)의 노력과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여 야랑(夜郞: 지금의 貴州省 石阡縣)으로 유배당한다.

그리하여 동정호․삼협․무산을 지나는데, 758년에 사면을 받아 일년반에 걸친 유배생활을 마쳤다. 이후 강남일대를 유람하였고, 762년에 당도(當塗)의 현령 이양빙(李陽氷)에게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임종할 때 만권의 초고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이백을 접할 때, 얼핏 이백이 자신의 천재성과 호방한 기질만을 믿고, 술에 빠져 산 것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백의 생애를 다시 한번 보라.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띌 것이다.

첫째는 젊었을 때의 많은 독서와 시작(詩作)연습이다.

둘째는 관직에 나간 기간이 겨우 3∼4년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중국의 곳곳을 유람하며, 다양한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임종할 당시 그가 남긴 초고가 만권에 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은 점을 시사하는데, 그가 거칠것없는 행동으로 하늘을 찌르고 땅을 내달리는 듯이 시를 지은 것은 바로 많은 독서가 바탕이 되었고, 넓은 중국을 유람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다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백은 약 990여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대시인 이백의 입지를 지켜주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천재성을 지니고, 호방한 행동으로써 사람들에 회자되는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한들 시인으로서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한다면 술주정꾼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분명 이백의 등장은 당시의 잔잔한 시단에 물결을 일으키는 한 마리 용이었을 것이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 시명이 있던 하지장이 그를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天上謫仙人)’이라고 하였고, 두보도 이백의 명성을 듣고서 그를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백의 등장은 분명 하늘에서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세상에 나설 충분한 준비를 하고서 각지를 유람하며 자신의 명성을 높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백은 이러한 효과를 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玄宗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대(唐代)의 과거시험은 현종 때에 이미 시행되었지만 완전히 정착되지 못하고, 추천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안사의 난 이후에는 제법 과거시험이 정착되면서 가난한 집안의 자재들이 진사를 통하여 등용되어 힘을 발휘하게 되지만 말이다.

또한 시나 문장 속에서 자주 접하는 ‘민첩(敏捷)’이란 용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현종 때에 과거시험이 정착되지 않았지만 시문으로 관리를 뽑았기에 사인계층은 항상 시문을 공부하였고, 술자리에서 주령(酒令) 등을 통하여 자신의 작시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韻’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시를 지었을 때, 바로 ‘민첩’이란 것이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람의 재능을 대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백에게 있어 천재적인 재능에다가 습작을 하고서, 나아가 제자백가와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해박하게 독서를 하는 등 사회에 나설 준비를 어느 정도 마쳤기에, 여러 사람과 마음껏 교제를 하는 것이 관직에 나가는 하나의 첩경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백은 도사 吳筠의 추천을 받아 현종을 알현하기도 했지만, 하지장이 그의 <촉도난(蜀道難)>을 읽고서, 감탄한 나머지 ‘天上謫仙人’이란 별칭을 지어주고, 자신이 차고 있던 황금거북이(金龜)를 풀어서 술을 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어쨌든 이백의 시를 읽으면, 거칠 것이 없는 호쾌한 가운데 절묘한 싯구가 사람을 매료시킨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삼백잔을 마시고 시를 읊기에, 이백은 고체시와 악부 등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시에서 그의 재기를 드러내었고, 또한 짧은 절구(絶句)에 절묘한 시가 많다.

그러므로 이백의 음주에 관련된 시 또한 이백의 장기와 재기를 충분히 감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백의 시 천 여수 중에 음주에 관련된 수가 170여수 정도가 된다고 하니, 이 역시 이백과 술을 분리시켜 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호쾌한 모습, 달을 노래하는 모습, 친구와의 우정, 자유로움을 추구한 산속 생활 등으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호쾌하고 스케일이 큰 것이 이백 시의 매력이다. 도사나 신선을 좋아했던 자유로운 기질에다가 젊었을 때의 독서로 인하여 옛날의 전설이나 옛 사람의 고사를 적절하게 운용하였는데, 인위적인 모습이란 절대 보이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워, 역시 이백시답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먼저 권주가라고 할 수 있는, 장진주(將進酒)를 보자.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복회). 내달려서 바다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고대광실에선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하지만,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에 금방 세는 것을!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는 모름지기 즐겨야하거늘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달을 마주하고서는 황금 술통 헛되이 두지마라.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고;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 양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岑夫子․丹丘生(잠부자단구생)! 잠부자여! 단구생아!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 술 권하노니 잔 멈추지 말고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그대에게 노래 한곡 부를 테니
請君爲我側耳聽(청군위아측이청). 그대여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나 주게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고상한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 귀할 것도 없고
但願長醉不願醒(단원장취불원성).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지 않기를!
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하지만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 오로지 술꾼만이 그 이름 남겼다네.
陳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 그 옛날 진사왕 曹植은 평락관 연회에서,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하게 즐겼다네.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주인양반 어찌 돈이 모자란다 하시오,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곧 술 사다가 함께 마시리.
五花馬․千金裘(오화마천금구)! 털이 아름다운 명마․천냥의 가죽옷!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아이 불러 좋은 술과 바꿔오게나
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천고의 명시라는 이 한편의 시에 이백의 기질이 모두 드러난다.

구절구절이 명구다. 술을 마시는 이유가 만고의 시름을 잊어보는 것이다. 만고의 시름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래와 방패로도 막을 수 없다는 세월, 인생무상이다.

‘君不見’으로 연결된 구절이 두 개가 들어있다. 첫구절의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다로 내 달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은 뒷 구절의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고대광실에선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하지만, 아침에 검은머리 저녁에 금방 세는 것을!”로 들어가기 위해, 내세운 이백의 천부적인 재능이 드러난 구절이다.

이 시가 첫 구절을 생략하고 두 번째 구절부터 시작되었다해도 웬만한 시인의 시상(詩想)으로서는 나무랄 것이 없지만 역시 스케일도 작고 이백답지 않다.

첫 구절은 우주자연의 운행법칙에 대해 ‘黃河’와 ‘天上’을 빌어서 설명한다.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의 물도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써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세월이란 한번 가면 오지 않는데, 하찮은 인간에게 있어 세월의 흐름을 어찌 하겠는가?

그 다음구절부터는 이백의 낭만적이고 호쾌한 성격이 드러난다. “인생에서 뜻대로 되었을 때는 모름지기 즐겨야하거늘, 달을 마주하고서는 황금 술통 헛되이 두지마라.”,“하늘이 나를 낳았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고, 천금을 다 써버리면 또 다시 생기는 것.”,“양 삶고 소 잡아 맘껏 즐겨 보세나!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그 옛날 진사왕 曹植은 평락관 연회에서, 한말에 만냥 술로 질펀하게 즐겼다네.”,“털이 아름다운 명마, 천냥의 가죽옷! 아이 불러 좋은 술과 바꿔오게나.”

참으로 거칠 것이 없고, 화끈하고 시원시원하다. 이 시에서 ‘人生得意’한 일이 뭐겠는가? 바로 당시 736년 무렵 숭산(嵩山)에 은거하는 친구 元丹丘와 岑勛을 만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기(知己)를 만났으니, 손에 쥔 돈이 없으면 또 어떤가?

이백에게 이런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타고 온 명마와 입고 있던 귀한 옷을 맡기고 술을 받아오면 되었다. 협객의 기질이 있었던 이백으로서는 지음(知音)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나, 형가(荊軻)와 고점리(高漸離)의 고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원래 보통 손님이 찾아오면 식사를 대접하고, 좋은 친구가 찾아오면 술을 대접하고, 더욱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차를 대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백에게 있어 차보다는 술에 취하는 것이 더욱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고상한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 귀할 것도 없고, 다만 영원히 취하여 깨지 않기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친구를 대하는 모습이 이러할진대, 이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재능이 아까와서, 혹은 지음으로써 대하던 이백의 진심을 알기에 너도나도 그를 구원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백은 괜찮은 삶을 살고 간 것이다. 우리는 일생동안 지기를 한명도 얻기가 어려운데......

다시 <襄陽歌>를 보자.

落日欲沒峴山西(낙일욕몰현산서), 해는 현산 서쪽으로 넘어 가려는데,
倒著接䍦花下迷(도저접리화하미). 흰 모자 거꾸로 쓰고 꽃 아래 방황하네.
襄陽小兒齊拍手(양양소아제박수), 양양의 어린이들 나란히 손뼉치고,
攔街爭唱白銅鞮(난가쟁창백동제). 거리를 막고 ‘백동제’란 동요를 다투어 노래하네.
傍人借問笑何事(방인차문소하사), 옆 사람에게 무슨 일로 웃는가 물어보니,
笑殺山公醉如泥(소살산공취여이). 山簡이 질펀하게 취한 모숩이 생각나 웃겨 죽겠다네.
鸕鷀杓,鸚鵡杯(노자표, 앵무배), 가마우지모양의 술국자, 앵무조개로 만든 술잔,
百年三萬六千日(백년삼만육천일), 백년은 삼만육천일,
一日須傾三百杯(일일수경삼백배).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셔야지.
遙看漢水鴨頭綠(요간한수압두록), 멀리 보이는 漢水는 청동오리의 머리처럼 푸른데,
恰似葡萄初醱醅(흡사포도초발배). 마치 포도주가 막 익을 때와 같구나.
此江若變作春酒(차강약변작춘주), 이 강물이 변해서 봄술이 된다면,
壘麴便築糟丘臺(누국편축조구대). 누룩이 쌓여서 술지게미누대가 되리라.
千金駿馬換小妾(천금준마환소첩), 천금의 준마를 소첩과 바꾸고,
笑坐雕鞍歌落梅(소좌조안가락매). 화려하게 안장에 미소띄고 앉아서 <落梅>를 노래하리.
車傍側掛一壺酒(차방측괘일호주), 수레 옆에는 술 한병 매달고,
鳳笙龍管行相催(봉생룡관행상최). 봉황을 새긴 생황과 용을 새긴 피리로 서로 재촉하네.
咸陽市中歎黃犬(함양시중탄황견), 함양의 저잣거리에서 李斯 부자를 탄식하는 것이,
何如月下傾金罍(하여월하경금뢰). 달 아래서 황금 술잔을 기우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君不見!(군불견) 그대여 보지 못했는가!
晋朝羊公一片石(진조양공일편석), 진나라 羊公의 墮淚碑는,
龜頭剥落生莓苔(구두박락생매태). 비석의 거북머리는 떨어져 나가고 이끼가 낀 것을!
淚亦不能爲之堕(누역불능위지타), 눈물 역시 양공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고,
心亦不能爲之哀(심역불능위지애). 마음 역시 양공을 위해 슬퍼할 수 없다.
清風朗月不用一錢買(청풍랑월불용일전매), 청풍명월을 가지는데는 한푼의 돈도 들지 않고,
玉山自倒非人推(옥산자도배인추). 玉山이 저절로 무너지는 것은 사람이 밀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舒州杓,力士鐺(서주표, 역사당), 서주의 술국자, 역사가 겨우 들던 술그릇.
李白與爾同死生(이백여이동사생). 이백은 이것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
襄王雲雨今安在(양왕운우금안재), 양왕이 함께 노닐던 雲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江水東流猿夜聲(강수동류원야성). 장강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니, 원숭이가 밤중에 우는구나.

이 시는 양양(襄陽: 지금의 湖北省 陽樊市)를 지나면서, 역사적인 인물인 ‘죽림칠현’의 하나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에 얽힌 ‘倒著白接䍦’의 노랫말, 하(夏)나라를 망친 桀王이 주지육림으로 매일같이 잔치를 했음으로 술지게미가 쌓여 누대가 되었다는 고사,

위(魏)나라 조창(曹彰)이 준마가 탐이 났으나 말 주인이 팔려고 하지 않자 자신의 소첩과 바꾸었다는 고사, 진(秦)의 수도인 함양의 저잣거리 이사가 죽기전에 아들을 향해 “다시 한번 너와 함께 黃犬을 끌고서 고향의 교외에서 토끼사냥을 해보았으며 좋겠다”고 한 고사, 진(晉)의 양호(羊祜)가 양양을 잘 다스려 민심을 얻고서 죽자, 백성들이 양호가 놀던 현산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을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고 하여 ‘墮淚碑’라고 했다는 고사, 진(晉)대 혜강(嵇康)은 술에 취해 쓰러지는 것이 마치 옥산같았다는 고사, 초(楚)양왕이 운몽에서 무산의 신녀와 즐겼다는 운우에 얽힌 고사 등등을 인용하였는데, 결국 이 또한 만고의 시름을 잊고, 지금을 즐기자는 또 다른 권주가인 셈이다.

이속에서도 그는 “백년은 삼만육천일,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마셔야지.…이 강물이 변해서 봄술이 된다면, 누룩이 쌓여서 술지게미누대가 되리라.”라고 하여, 인생을 넉넉히 백년으로 계산하고서 평생 술을 마시면 끝없는 장강의 술로 인해 그 옆에는 당연히 술지게미 누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인데,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스케일이다.

그러면 도대체 평생 몇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백은 “舒州의 술국자, 역사가 겨우 들던 술그릇. 이백은 이것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은 연습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또한 <양원음(梁園吟)>을 지었다. 양원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漢)대 양효왕(梁孝王)의 정원으로, 이백이 이 정원을 유람하면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이 시속에서도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을 달관하면 어찌 근심할 여가가 있겠는가? 다만 좋은 술을 마시고 높은 누대에 오르는 것만이 있을 뿐.……옛 사람은 信陵君을 호걸로써 귀하게 여겼지만, 지금 사람은 신릉군의 무덤에 밭을 가네. 황폐해진 성벽에는 푸른 산위에 뜬 달만이 공허하게 비추고, 고목은 순임금이 돌아가신 창오산 위에 뜬 구름 속으로 들어갔네.

양왕의 궁궐은 지금 어디에 있나? 매승과 사마상여가 먼저 죽었지만 기다리지 않을텐데. 춤추는 모습과 노랫소리만이 맑은 연못 위에서 흩어지고, 텅빈 변수만이 동쪽 바다로 흘러든다.(……人生達命豈暇愁, 且飮美酒登高樓.……昔人豪貴信陵君, 今人耕種信陵墳. 荒城虛照碧山月, 古木盡入蒼梧雲. 梁王宮闕今安在, 枚馬先歸不相待. 舞影歌聲散淥池, 空餘汴水東流海.)”고 하였다.

여기까지 조금 정성들여서 읽은 사람이라면 <장진주>,<양양가>,<양원음>에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回‘,‘江水東流’,‘汴水東流海’ 등이 공통으로 들어가는 점을 알아챘을 것이다. 인생사 ‘一場春夢’으로, 흐르는 세월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만고의 시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득의한 일을 얻거나 만들어서 술에 취해 인생을 즐기자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시간이 아까우니, “밤을 밝혀 놀아야 한다(秉燭夜游)”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한 ‘江水東流’는 훗날 송대 소식(蘇軾)이 <염노교(念奴嬌)>(赤壁懷古)의 첫구절에서 “장강은 동쪽으로 흐르네, 파도속에 천고의 풍류로운 인물들을 다 집어 삼키고(大江東去, 浪淘盡, 千古風流人物.)”라고 표현하여 유명해졌으며, ‘大江東去’는 “세월의 흐름이나 인생무상”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었고, 훗날 장한수(張恨水)의 소설 제목과 매염방(梅艶芳)의 노래 제목이 되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소식 또한 이백의 싯구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염노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식 또한 “옛 땅에서 혼백으로 노니는 다정한 이여(이미 죽은 자신의 부인을 말함) 마땅히 나를 비웃겠지, 일찍 머리 셌다고! 인생이란 꿈만 같은 것! 한잔 술을 들어 강에 비친 달에게 바친다(故國神遊․多情應笑我, 早生華髮. 人生如夢! 一尊還酹江月.)”라고 하지 않았던가!

천하의 이백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의 흐름과 인생무상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늙어감을 아쉬워하기가 평범한 우리네들과 같겠는가? ‘재주를 가진 사람은 때를 만나기가 어렵다(懷才不愚)’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세상을 한탄하는 경우가 우리네들하고 같겠는가?

천재나 총명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재주만을 믿기에 경박함으로 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고, 아울러 포부가 크지만 이룬 성과물이 많은 경우가 드물다. 술은 뜨거운 성질을 가졌기에 사람의 기질을 사납게 만든다. 그렇기에 총명한 사람이라면 더욱 술을 마실 때 가벼운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며, 옛 사람의 말을 빌린다면 독서로써 이를 보강해야 한다.

세상에 눈꼽만큼의 손해도 없으며, 오로지 이익만이 있는 것이 독서라고 했다. 책 한 쪽을 읽으면 한 쪽만큼, 하루를 읽으면 하루만큼 이로움이 있지 않은가? 각자 자신에게 맞는 일로써 자신을 보강할 일이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하는 이백도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만큼 많은 시를 남겼는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는 지금 어떤가? 어떻게 해야 할까?

[참고]: 그의 호쾌함을 알 수 있는 시로는 <여산의 노래를 侍御 盧虛舟에게 부침(廬山謠寄盧侍御虛舟)>/<꿈에 天姥와 노닐다가 시를 지어 이별선물을 대신함(夢游天姥吟留別)>/<집안 숙부 형부시랑 李曄과 중서사인 賈至를 모시고 동정호에서 놂(陪族叔刑部侍郞曄及中書賈舍人至游同庭)>第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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