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 5월 5일 독일제국 왕자 아달베르트(Wilhelm Eitel Friedrich Christian Karl Prince of Prussia, 1883. 7. 7. ~ 1942. 12. 8.)는 독일 동아시아 전대 예하 SMS 헤르타(Hertha)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는 제물포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해 당시 독일 공사였던 잘데른의 집에서 머물면서 서울을 구경하였다.
아달베르트 왕자는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공작의 딸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사이에 낳은 세 명의 아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달베르트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이후 해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빌헤름 3세는 이른바 ‘세계정책(Weltpolitik)’을 추진하기 위해 해군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애정은 프로이센 함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아달베르트(Adalbert von Preußen, 1811~1873)의 이름을 따와 막내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1890년대까지 독일 해군의 전략은 독일 북부와 발트해 연안 등에서 어뢰정과 연계하여 독일의 항구와 근해에 접근하는 적 군함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영국 해군의 북해 봉쇄에 대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에 맞춰 설계한 지크프리트급 군함 등은 상대적으로 낮은 흘수와 결정적으로 킬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규격에 맞춰 건조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적극적으로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해안에서 벗어나 먼바다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군함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설계된 대표적인 군함이 SMS 퓌르스트 비스마르크이다. 이 군함이 배치된 곳이 바로 자오저우만(膠州灣)의 독일 조차지를 근거지로 한 독일 동아시아 함대였다.
1897년 독일은 중국 산둥성에서 독일인 선교사가 살해당하는 사건(Juye-Vorfall, 중국어 표기 曹州教案)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군대를 보내 중국 산둥성 남부 해안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곳이 우리에게 맥주 등으로 잘 알려진 칭다오이다. 독일은 1898년에는 청 정부와 자오저우만 일대를 조차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독일 제국이 자오저우만 조계지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함대를 배치하면서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러일전쟁 중 아달베르트 독일제국 왕자의 대한제국 방문은 자칫 대한제국과 독일제국 간의 관계를 오해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고종은 여러 차례 독일 공사관에 사람을 보내 아달베르트 왕자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요청하였다. 반면 아달베르트 왕자 측은 고종과 만나는 것이 자칫 독일제국과 대한제국 간의 우호적 관계로 보일 것을 우려해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아달베르트 왕자는 1박 2일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후 고종은 독일 공사 잘데른을 만난 자리에서 아달베르트가 만남 요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일 공사 잘데른은 정치적 인물의 외교적 행보와 관련하여 사소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이를 통해 국제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입장 등을 고려할 때 독일 왕자의 상황을 고려해 달라고 변명하였다.
하지만 당시 아달베르트 왕자는 고종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근거는 아달베르트 왕자가 대한제국 방문 기간 중 공식행사를 제외하고 방문 자체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는 점과 그가 돌아간 이후 잘데른 독일 공사가 독일 뵐로 수상에게 보낸 전문에서 ‘젊은 장교처럼 행동’하는 아달베르트 왕자에 대한 언급 때문이다. 흔히 정치적, 외교적으로 경험이 많고 적음에 대해 나이가 많고 적음으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잘데른의 노련한 경험은 왕자의 치기 어린 행동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중요한 조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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