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1752~1800)를 다룬 MBC 월화 역사드라마 ‘이산’(극본 김이영, 연출 이병훈 김근홍)의 시청율이 20%대를 넘으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노론)세력이 세손(世孫)인 ‘이산’마저 없애려는 음모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홍국영(洪國榮.1748~1781)의 활약상이 돋보여 재미를 더해 가고 있다.
세손인 ‘이산’을 보호해 왕으로 즉위토록 한 홍국영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조선시대 ‘세도정치’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홍국영은 17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외교문서와 궁중서적 검토·교정하는 벼슬)를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세자의 선생.정7품)가 되어 벽파의 음모를 막아 ‘이산’의 신임을 얻어 사서(司書.정6품)가 된다.
홍국영은 세손인 ‘이산’의 승명대리(承命代理,대리청정)를 반대하던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자 벽파의 후기기수인 정후겸과 자신의 아재비뻘인 홍인한(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부친의 인척), 정순왕후의 오빠이자 벽파의 실세였던 김구주 등을 탄핵으로 물리치고 1776년 정조로 등극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홍국영이 유배당해 숨졌던 강릉 노암동 ´김윤기가옥´
이어, 홍상간, 홍인한, 윤양로 등이 역모를 적발, 처단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 정3품)로 특진해 숙위소(宿衛所 : 왕궁경비)를 설치해 대장에 올라 정조왕의 신변보호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도승지(都承旨 : 승정원의 장, 정3품)가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얻어 정조가 지향하는 왕권강화의 1등공신이 되었으나, 정후겸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고 불릴만큼 횡포와 전횡을 일삼은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홍국영은 좌참찬 김시묵의 딸인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 1753~1821)에게 소생이 없자, 1778년 누이동생을 원빈(元嬪)으로 삼아 세도정치의 권력을 다져갔으나, 원빈이 1년만에 병사로 인해 외척(外戚)의 집권이 수포로 돌아가자 정조가 새로 빈을 맞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횡포를 부리기까지 했다.
이어,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1755~1801)의 아들 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은 다음 세자로 세워 권력을 강화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역모죄를 씌워 죽게 하기도 했다.
홍국영은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대제학(大提學. 정2품), 이조참판(吏曹參判. 정2품), 대사헌(大司憲. 종2품)까지 했으나, 1780년 효의왕후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발각되어 가산을 몽땅 잃고 집권 4년만에 귀양지인 강릉에서 이듬해 죽었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정조´
조선시대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꿈꾸던 홍국영의 마지막 생을 마친 곳이 강릉인 데 현재 노암동에 위치한 ‘김윤기가옥(문화재자료제58호)’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홍국영은 이곳에서 2개월을 살다 병으로 숨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윤기가옥은 안채와 행랑채 등 70칸에 넘는 대가로 김윤기씨의 장남 김익남(81)씨는 부친이 홍국영의 유배생활을 했던 집이라는 것을 알고 구입했다라고 하며, 드라마 ‘이산’으로 인해 요즈음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드라마로 인해 ‘정조’에 관한 책들이 여러권 출판되고 있으며, 특히, 조선의 군주열전의 저자 이한우씨는 정조에 대해 “정조는 결코 개인적인 피해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포용의 정치보다는 불신(不信)의 정치로 나아갔다. 집권 이후 10년 이상 계속된 역모와 반란, 백성들의 한 무리는 천주학에, 또 한 무리는 예언사상에 기대려 했다”라며 개혁적 군주라는 평에 부정을 하고 있다.
또한 “나라, 임금, 조정에 대해 더 이상의 희망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식이 뛰어났다고 해서 성군(聖君)이라 명명한다면 그것은 역사인식의 기본을 잃은 태도다. 정조가 정말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듯 뛰어난 국왕이었다면, 그 다음 임금부터 곧바로 나라의 운명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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