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14년차, 이제야 중심에서 ‘포효’
부진 뒤로하고 홈런·타점 2관왕 향해
2003년은 심정수(32·삼성)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느껴야했던 한 해였다.
2003년 심정수의 성적은 133경기 타율 3할3푼5리·53홈런·142타점으로 지금 기준으로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특히 타격·홈런·타점에서 모두 리그 전체 2위였다. 홈런과 타점은 역대 프로야구 2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역대 홈런·타점 1위가 같은 해에 나왔다. 이승엽이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승엽에게 쏟아졌고, 심정수는 반드시 꺾여야 할 적이었다. 그해 심정수는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페이스메이커로 기억되겠지만 동시에 주목받지 못한 2인자의 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사례로 남을 것이다.
◆ 최고연봉자의 어두운 굴레
2004시즌 종료 후 심정수는 현대를 떠나 삼성과 계약기간 4년에 총액 6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FA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국내 프로스포츠 역대 최고액으로 심정수는 스포츠재벌 자리에 올랐고 2005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으로 프로야구 최고연봉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엄청난 FA 계약은 심정수에게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웬만한 성적으로는 결코 몸값을 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계약 첫 해였던 2005년 성적(타율 0.275·28홈런·87타점)은 준수했지만, 몸값이나 기대치를 고려하면 오히려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에는 무릎과 어깨를 차례로 다치며 100경기에나 결장했다. 시즌 막바지에 복귀했지만 실전감각이 떨어진 상황에서 큰 활약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웠다. 삼성은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지만 심정수가 공헌도는 채 1그램도 되지 않아 보였다. 일각에서는 아예 ‘심정수 무용론’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특히 최고연봉자와 역대 최고액 계약의 굴레는 심정수를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였다. 물론 심정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을 알기에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반팬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심정수의 야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어떠하든 눈에 보여지는 성적 자체가 실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올 시즌 삼성 선동렬 감독은 심정수를 4번으로 믿고 기용했다. 한 때나마 무용론이 제기됐지만 지난해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에서 뼈저리게 느낀 장타의 부재는 심정수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심정수도 전지훈련에서 누구보다 많은 훈련을 소화하내며 몸을 만들었다.
헤라클레스라 불릴 정도로 거대했던 몸은 팀 동료들과 구분 짓기 어려울 정도로 호리호리해졌지만 체지방을 줄인 결과로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부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그렇게 철저하게 시즌을 준비했으나 초반부터 심정수는 헛방망이질하기에 바빴고 상대 팀들은 3번 양준혁을 고의4구로 거르고 4번 심정수와의 승부를 택하길 반복하며 심정수에게 숱한 굴욕을 안겼다.
◆ 느닷없는 부활 ‘돌아온 슬러거’
6월까지 심정수는 타율 2할3푼·13홈런·45타점을 기록했다. 홈런과 타점은 많은 편이었지만, 타율이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홈런과 타점의 체감수치가 실제수치보다 크게 떨어졌다. 결승타로 기록된 타점도 시원한 안타보다는 3루 주자를 홈으로 부르는 밋밋한 땅볼이 많았던 탓이었다.
결정적으로 6월까지 심정수가 홈런을 때린 12경기에서 삼성의 성적은 6승6패였다. 심정수의 홈런이 승패에 그다지 크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팬들이 바라보기에는 소위 말하는 ‘영양가’가 없어 보였던 것이 사실. 최고연봉자라는 굴레는 그렇게 심정수의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7월부터 심정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안경이었다. 심정수는 최전성기였던 2003시즌 종료 후 라식수술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이후 성적이 떨어졌다. 잦은 부상도 한 요인이었지만 부상과는 별개로 타격의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다. 모두가 그의 라식수술과 눈을 문제로 삼았지만 심정수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대호(롯데)가 체중에 예민한 것처럼 심정수는 눈에 예민했다. 올 시즌에도 6월까지 홈런의 상당수가 주간경기와 일몰 전에 터졌다. 의학적으로 ‘제2의 뇌’로 불리는 눈은 자율신경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부상이나 타격 메커니즘보다는 눈이 심정수 부진의 결정적 이유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6월까지 주황색 특수 선글라스를 쓰고 경기에 임했던 심정수는 7월부터 검은 테에 투명한 렌즈의 일반안경을 썼다. 집 근처 안경점에서 직접 맞춘 안경이었다. 스스로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그리고 그 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공의 실밥과 회전이 보이자 타격에도 자신이 생겼다. 기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해결하기 힘들었던 문제를 안경 하나 바꾼 후 단번에 극복해낸 것이다.
안경을 바꾼 후 시작된 느닷없지만 반가운 부활은 성적으로도 잘 나타난다. 7월 이후 치른 30경기에서 타율 2할9푼4리·11홈런·32타점을 올린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결승타도 무려 5개나 된다. 그 중 4차례는 땅볼이나 희생플라이로 만든 밋밋한 결승타가 아니라 화끈하고 폭발적인 결승 홈런이었다. 서머리그 기간 동안에는 타율도 3할1푼9리나 된다. 삼성의 서머리그 초대 챔피언 등극에는 누가 뭐래도 심정수가 일등공신이었다.
◆ ‘무관의 제왕’ 이제는 없다
심정수는 그동안 상복이 따르지 않은 편이었다. 개인타이틀은 2003년 차지한 장타율·출루율이 전부다. 장타율과 출루율은 공식타이틀이지만 타격·홈런·타점·안타·도루보다도 그 값어치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장타율·출루율을 제외하면 2002~03년, 2년 연속으로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게 그나마 내세울만한 경력이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에 길이 남을 슬러거로 기억될 심정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빈약한 수상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선수생활의 최전성기였던 2002~03년에 홈런과 타점에서 모두 이승엽에게 뒤진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만하다.
하지만 올 시즌에야 심정수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울분을 씻어낼 조짐이다. 사실상 예약한 서머리그 MVP는 예외로 치더라도 슬러거의 표상인 홈런과 타점 타이틀 수상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12일 오전 현재, 심정수는 홈런(24개)과 타점(77개)에서 모두 1위를 달리고 있다.
홈런랭킹 2위 클리프 브룸바(현대·23개)와는 불과 1개 차이이며 타점에서는 2위 김태균(한화·72개)과 5개 차이다. 하지만 7월 이후 리그에서 가장 많은 홈런과 타점을 쌓은 심정수는 13.95타수당 1개꼴로 터뜨리는 홈런 페이스에서 전체 1위이며 타점 쌓는 속도도 빠르다. 가속도가 붙은 최근의 페이스를 감안하면 시즌이 종료될 시점에는 더 많은 수치를 기대해도 좋을 전망이다.
타이틀 수상의 가시화만큼이나 고무적인 것은 심정수의 홈런이 팀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은 심정수가 홈런을 터뜨린 7월 이후 8경기에서 8승을 기록했다. 심정수가 홈런을 때린 경기는 무조건 이겼던 셈이다. 특히 결승 홈런이 돋보인다.
7월 이후 결승 홈런만 4개이며 그 이전까지 넓히면 결승 홈런이 무려 7개로 리그에서 가장 많다. 홈런의 영양가로만 따지면 심정수를 따라올 선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심정수는 올 시즌 13개의 결승타를 기록해 이 부문에서도 역시 전체 1위에 올라있다. 공식 집계되는 기록은 아니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결승타가 많았다는 것은 4번 심정수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요소다.
지난 1994년 동대문상고(현 청원고)를 졸업하고 OB에 입단할 때부터 심정수는 가능성 있는 선수였다. 입단 당시 계약금(3800만원)은 보잘것없지만 대학진학과 프로진출을 놓고 고민을 하는 바람에 몸값을 올릴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친 탓이었다. 고졸 2년차 때부터 21홈런을 때려내며 장사의 힘을 보여준 심정수는 그러나 최전성기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프로 14년차가 된 올 시즌에야 최고연봉의 정당성을 입증해내며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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