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부터 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까지
세대교체와 장신화에 역점 둔 14개월
지난 2005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23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는 한국남자농구에 큰 충격이었다.
1960년 처음으로 개최된 아시아선수권에서 4위에 그친 이후 무려 45년 만에 최악의 성적을 올린 탓이었다. 넋 놓고 있던 대한농구협회는 미뤄왔던 세대교체와 장신화 그리고 체질개선을 위해 손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프로팀 감독들에게 사령탑을 맡기지 않는 대신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를 택했으며, 상비군 체제도 준비했다.
그리고 대한농구협회는 사령탑의 중임을 최부영(57) 경희대 감독에게 맡겼다. 지난달 28일부터 5일까지 일본 도쿠시마에서 열린 제24회 아시아선수권은 최부영호(號)의 마지막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최부영號의 지난 14개월을 되돌아본다.
◆ WBC (월드 바스켓볼 챌린지)
지난해 5월, 대한농구협회는 1976년생을 국가대표팀 선발 기준으로 삼았다. 세대교체를 위한 목적으로 서장훈을 제외한 10여년 넘게 국가대표팀을 이끌어온 문경은·이상민·추승균·현주엽·신기성 등 베테랑들을 국가대표팀 명단에서 제외했다. 대신 김태술·양희종·김민수·김진수 등 젊은 피들을 대거 발탁했다.
아시아선수권에서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한국농구로서는 급진적으로라도 세대교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6월 최부영 감독을 국가대표팀 전임 사령탑으로 선임한 한국은 한국농구 도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WBC(월드 바스켓볼 챌린지)에서 미국·리투아니아·이탈리아·터키 등 5개 농구강국들을 상대로 첫 시험무대에 올랐다.
1998년 그리스 세계선수권을 끝으로 세계의 농구강호들과 맞붙을 기회 자체가 없었던 한국에게는 의미 있는 대회였다. 한국은 예상대로 4전 전패했다. 이탈리아와 미국에게 각각 35점·53점차로 참패했지만 터키와 리투아니아전에서는 각각 3점·2점차로 패할 정도로 선전해 희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대회에서 한국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차디찬 현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세계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NBA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 드림팀의 화려한 공격 이면에는 끈끈한 수비가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타고난 신체조건이나 기술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체질적으로 고착화된 스타일에 대한 문제점까지 총체적으로 뜯어고쳐야 함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희망도 발견했다. 하승진을 비롯해 김민수·양희종·김진수 등이 가능성을 보여주며, 미래를 밝게 했다. 특히 하승진은 비록 미국이나 이탈리아를 상대로 고전했지만 ‘유럽의 강호’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골밑을 장악하며 한국농구 장신화의 꿈을 높여주었다.
또한, 최부영 감독은 체질개선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 선수에게 의존하는 스타파워보다는 팀원 전체가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으는 팀워크를 강조했다. 방성윤과의 코트 안팎 팽팽한 신경전도 체질개선의 일환이었다. 기대대로 방성윤은 대회 막판부터 팀플레이에 주력하는 등 한층 달라진 모습으로 최 감독을 흐뭇케 했다. 게다가 양희종·김민수·김진수 등 한국농구의 미래를 책임질 또 다른 젊은 피들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대회였다.
◆ 도하 아시안게임
WBC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최부영號는 아시안게임에 대한 기대도 부풀었다. 특히 역대 최장신 라인업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다. 과거 한국은 번번이 높이 콤플렉스에 발목을 잡혀야했다. 매번 슈터들의 외곽포에 의존하는 양궁농구 또는 로또농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전 포지션에 걸친 낮은 높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승진·서장훈·김주성·김민수로 구성된 센터진의 신장은 역대 최고였다. 게다가 신구와 공수의 조화가 이뤄져 야오밍이 빠진 중국과도 견줄만한 골밑을 구축했다. 또한, 방성윤·김성철·이규섭·송영진 등 높이와 슈팅력을 갖춘 장신 포워드들도 대거 합류, 전포지션의 장신화라는 꿈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도하 아시아선수권에 이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도 굴욕을 맛봐야했다. 이른바 ‘도하의 굴욕’이다. 중국과의 8강전에서 패하며 순위결정전으로 떨어진 한국은 결국 5위로 대회를 마쳤다. 한국남자농구가 아시안게임에서 노메달에 그친 것은 지난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이후 무려 48년만의 일이었다.
야심 차게 세대교체의 닻을 올린 결과치곤 실망스러웠다. 기대했던 세대교체는 미완성이었고, 조직력을 가다듬을 시간도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역대 최고의 장신 라인업도 결국에는 허상이 되고 말았다. 하승진의 성장세는 다소 더뎠고, 장신 포워드들은 돌파나 점프슛보다는 외곽포로 일관, 외국인선수 제도의 폐해를 드러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최부영號는 그야말로 ‘부상병동’이었다. 당시 대표선수 12명 중 무려 5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것도 김승현·방성윤·양희종·서장훈·이규섭 등 핵심멤버들만 다쳤다. 최부영 감독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게다가 정신력 해이까지 겹치며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질타를 받아야했다.
한창 리그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몇몇 선수들은 은연 중 몸을 사리는 소극적인 플레이로 일관했다. 카타르전이나 중국전을 제외한 대회 초반의 무기력한 플레이는 결국 8강에서 일찍 중국을 만나 결과적으로 노메달을 초래하고 말았다. 대회 초반의 정신력 해이가 더욱 뼈아프게 느껴졌던 이유다.
◆ 아시아선수권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실패했지만, 최부영號는 어차피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제 막 닻을 올린 세대교체에서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하의 치욕을 씻고 올림픽 출전을 향해 최부영號는 일찌감치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4월에는 상비군 엔트리 23명을 발표하며 프로시즌 종료와 함께 훈련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포워드라인에서만 방성윤·현주엽·송영진·조상현·김성철·조우현 등 무려 6명의 선수가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됐고, 결국 김동우·차재영을 추가 발탁해야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시아선수권을 대비해 나선 윌리엄 존스컵에서 이규섭마저 부상으로 낙오해 전력에 큰 차질을 빚고 말았다.
최종 엔트리 구축에 시간이 걸리자 훈련시간도 매우 부족했다. 상비군 체제의 실효성마저 사라진 셈이었다. 하지만 최부영號는 존스컵에서 실전감각을 키우고 손발을 맞춰나가며 조직력을 다져나갔다. 대회 초반에만 하더라도 외곽포에만 의존하는 답답한 농구가 재현됐지만 대회를 치를수록 높이를 활용하며 내외곽의 밸런스가 이상적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특히 부상에서 회복한 김주성이 가세하자 경기력 자체가 달라졌다. 존스컵에서 한국은 5승4패를 올리며 5위를 차지했지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존스컵을 통해 선수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중동팀들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이로 인해 아시안게임에서의 정보력 부재라는 실패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을 수 있었다.
아시아선수권에서 최부영號는 비로소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특히 경기당 28.1분을 뛰며 평균 17.3점·9.1리바운드를 기록한 하승진의 성장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국은 하승진을 활용해 높이의 농구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번 대표팀은 방성윤·이규섭 등 전문슈터의 부재로 외곽라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약했지만 예선부터 8강 두 번째 경기까지 5전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높이의 힘이었다.
게다가 최부영 감독이 WBC 때부터 심혈을 기울여온 투가드 시스템도 일본전에서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포워드진이 사상 최악이었지만 가드와 센터는 훌륭했다. 그러나 8강 마지막 카자흐스탄전에서 덜미를 잡히더니 결국 레바논과의 준결승전에서 74-76으로 석패하며 올림픽 직행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개최국인 중국이 제외된 만큼 가능성이 높았으나 찰나의 집중력에서 2% 부족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이 역대 최연소 대표팀(평균 25.6세)이며 훈련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실망스러운 결과만은 아니다.
다행히 최부영號는 3·4위전에서 카자흐스탄을 80-76으로 꺾고 3위를 차지하며 내년 7월 열리는 올림픽 세계예선전 출전권을 얻는 데에는 성공했다.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우승을 하지 못한 한국이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오세아니아 등 농구강국들과의 대결에서 3장의 티켓 중 한 장이라도 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98년 그리스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실질적으로 세계농구와 인연이 끊긴 한국으로서는 올림픽 출전 여부를 떠나, 한 단계 더 높은 레벨의 선수와 팀을 상대한다는 점만으로도 새롭고 소중한 기회다. 어쩌면 이것은 최부영號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
최부영 감독의 임기는 이번 아시아선수권까지다. 사상 처음으로 시행된 국가대표 전임 사령탑으로 지난 14개월간 최부영號는 부상선수 속출과 행정적 문제라는 갖은 악재에도 최선을 다해 달려왔다. 특히 세대교체와 장신화에 역점을 둔 최부영號의 성과는 당장의 성적을 떠나 미래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시행착오도 많았고 질타도 많이 받았지만 아시아선수권에서 최부영號는 한국농구의 미래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이제는 현재의 실패보다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 달려가야 할 시점이다. 최부영號가 남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유산을 빛내는 길도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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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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