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김수경, 역대 18번째로 개인통산 100승
인고의 세월 견뎌낸 수확…이제 ‘200승’ 향해
인천을 연고로 한 프로야구단에는 이른바 ‘안경잡이 에이스’가 에이스라는 전통이 있다.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진 모진 풍파 속에서도 안경잡이 에이스들은 인천이라는 연고지와 함께 그들을 묶어준 하나의 구심점이었다. 삼미에서는 임호균, 청보에서는 양상문, 태평양에서는 박정현·김홍집, 현대에서는 정민태가 안경을 썼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대를 이은 안경잡이 에이스가 있었으니 바로 현대 김수경(28)이었다. 2002년 1월 라식수술을 받은 후 안경을 벗어던졌지만 파릇파릇한 약관의 안경잡이 에이스는 팬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런 김수경이 2일 롯데와의 수원 홈경기에서 의미 있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날 경기에서 롯데 타선을 6⅔이닝 1실점으로 막으며 시즌 10승을 개인통산 100승으로 장식한 것. 역대 18번째 100승이자 김시진-선동렬-정민철에 이어 역대 4번째 최연소 100승(28세11개월13일).
▲ 화려한 등장에서 40승까지
인천고 출신 김수경은 일찌감치 현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낙점됐다. 1998년 1차 지명된 후 계약금 2억1000만원을 받고 현대에 입단한 것. 사실 지명 당시만 하더라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고교시절부터 슬라이더는 명품으로 알아줬지만 슬라이더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강점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볼도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수 보는 눈이 좋기로 소문난 현대 스카우트는 김수경을 놓치지 않았고, 김수경은 데뷔 때부터 인천야구의 새로운 황태자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1998년 데뷔 첫해부터 12승을 올리며 신인왕을 차지한 김수경은 현대의 창단 첫 우승을 확정지은 LG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선발투수로 나서 6⅓이닝 무실점 역투로 승리투수가 되는 기쁨도 누렸다. 당시 김수경의 나이 만 19세2개월이었다.
김수경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9년에는 방어율이 4점대(4.14)로 치솟았지만 184⅔이닝을 던져 10승11패1세이브를 기록했다. 특히 데뷔 2년차에 탈삼진 부문 1위(184개)에 올랐다. 1이닝에 한 명꼴로 탈삼진을 잡아낸 셈이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한 해를 보냈다. 데뷔 후 가장 많은 195이닝을 소화하며 18승8패 방어율 3.74를 기록한 것. 그해 당당히 팀 선배 정민태·임선동과 함께 다승왕에 등극한 김수경은 2000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도 가장 중요한 1·7차전에서 선발승을 따내며 실질적인 에이스 노릇을 해냈다.
그 때 당시에도 김수경의 나이는 만 21세3개월에 불과했다. 데뷔 3년 만에 40승을 쌓은 김수경은 그해 시드니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병역혜택까지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데뷔 첫 3년간 김수경은 쉽게 공략할 수 없는 투수였다. 고교시절 그리 빠르지 않았던 볼 스피드는 프로에서 시속 150km까지 육박했다. 고교시절부터 하드웨어가 좋았던 김수경은 다듬기에 따라 충분히 볼 스피드를 늘릴 수 있는 투수였고, 프로 입단 후 체계적인 트레이닝과 지도를 받으며 구속을 끌어올렸다. 게다가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는 당시 최고의 마구 중 하나였다. 높은 타점에서 뿌린 슬라이더였기에 낙폭이 포크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불같은 강속구와 슬라이더라는 위닝샷은 김수경은 ‘닥터K’로 만들었다. 데뷔 첫 3년간 김수경은 무려 524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는데, 9이닝당 탈삼진은 8.7개에 이르렀다. 실력뿐만 아니라 마인드와 자기관리에 있어서도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은 김수경의 미래는 그의 경쾌하고 다이내믹한 투구 폼처럼 한없이 밝을 것만 같았다.
▲ 느닷없는 내리막길에서 90승까지
데뷔 3년 만에 40승 고지를 점령한 김수경이라면 산술적으로는 벌써 100승을 돌파했어야 했다. 2000년 커리어-하이 시즌을 찍은 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 김수경이지만, 2001년부터 갑자기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일시적인 부진이 아니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간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지만, 최다승은 12승이었다. 한 시즌 최소 15승은 올려줄 특급 선발투수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나날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2년간 도합 11승을 올리는데 그쳤다.
김수경의 내리막길은 결코 느닷없는 내리막길이 아니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만, 김수경은 스스로 오르막의 최고점을 오르지 않은 채 내리막을 택했다. 다이내믹하다는 투구 폼을 교정한 것이 패착이었던 것.
투구 폼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경쾌한 투구 밸런스를 잃은 김수경은 제구력마저 잃었다. 물론 데뷔 첫 3년간 김수경은 볼넷도 많은 투수였다. 하지만 제구력이 나빴다기보다는 삼진을 잡는 피칭을 하다 보니 볼카운트가 몰리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2001년부터 제구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야구선수는 변화에 민감하다. 타자가 타격 폼 변신에 민감하다면 투수는 당연히 투구 폼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변화란 순리적으로 이루어져야했지만 그 당시 김수경은 순리가 아닌 과욕이 부른 변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간 꾸준히 두 자릿수 승수를 챙기며 솔리드 한 2~3선발로 활약한 것은 김수경은 그만큼 뛰어난 투수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
그러나 지난 2년간에는 두 자릿수 승수조차 챙기지 못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부상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깨와 무릎을 차례로 다쳤다. 투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어깨와 하체를 많이 쓰는 김수경에게 무릎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김수경은 과거의 강속구를 잃고 말았다. 어깨는 팔꿈치와 달리 무조건 구속의 감소를 부르는 부위였다. 또한, 볼 끝에 힘을 실어준 무릎의 힘 있는 반동도 잃어버리게 됐다. 지난 2년간 계속된 부상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비우거나 거르는 것은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데뷔 첫 3년간 40승을 올렸지만 이후 50승을 추가하기까지는 그 두 배에 달하는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 인고의 100승 그리고 200승
FA를 앞둔 2년간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부상에 대한 염려가 있었던 김수경은 FA 시장에서 찬밥대우를 받아야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로에 뛰어든 고졸 출신 박명환(LG)이 당당히 4년간 총액 40억 원이라는 FA 역대 투수 최고액을 받는 사이 김수경은 어느 구단으로부터도 영입제의를 받지 못한 채 원 소속구단 현대와 굴욕적인 ‘1+2’ 계약을 맺어야했다. 계약금 1억원, 연봉 4억원 등 올해 1년간 총액 5억원을 받고 올 시즌 활약 여하에 따라 2년간 계약을 연장하는 조건.
김수경의 부활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 물 간 투수’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한 물 간 투수라고 하기에 김수경은 너무 젊었다. 아직 김수경은 1979년생으로 만 28살밖에 되지 않았다.
젊은 나이인 만큼 올 시즌 부활을 위해 김수경을 이를 악 물었다. 지난 2년간 무던히도 괴롭혔던 어깨 통증에서 벗어난 김수경은 전지훈련에서 최근 몇 년을 통틀어 가장 많은 훈련량을 소화해냈다.
단조로운 구질을 보강하기 위해 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을 연마했다. 과거의 같은 강속구를 다시 뿌릴 수 없게 됐지만 부상에서 자유로워진 데다 동기부여까지 된 김수경이었기에 올 시즌에 대한 전망은 회의에서 기대로 바뀌어갔다.
시즌 돌입 후 김수경은 기대를 현실화하고 있다. 21경기에서 126이닝을 소화하며 10승4패 방어율 3.29를 기록하고 있는 것. 퀄리티 스타트는 10회. 팀내 최다승이자 최다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고 있다. 탈삼진도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88개나 된다. 현대의 투수왕국이 무너졌다지만, 김수경이 있었기에 지금껏 순위다툼에서 낙오하지 않았다.
올 시즌 김수경은 완전한 기교파는 아니지만 맞춰 잡는데 재미를 들린 모습이다. 과거 김수경은 탈삼진 능력은 좋았으나 맞춰 잡는 데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던 투수였다. 지난해까지 9년간 김수경의 이닝당 투구수는 18.0개로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에는 이닝당 투구수가 16.3개로 줄었다. 최근 10경기에서는 15.8개. 좋은 투수는 탈삼진을 잡는 것에 집착을 보일 것이 아니라 맞춰 잡는 데에도 능해야 한다. 올 시즌 김수경이 긍정적으로 비쳐지는 결정적 이유다. 물론 탈삼진 개수는 리그 전체 6위로 많은 편이지만 굳이 탈삼진에만 의지하지 않다.
비록 과거와 달리 구위는 떨어졌지만, 낮은 코스로 제구 되는 공을 바탕으로 타자와 효과적으로 승부하고 있다. 완전한 기교파는 아니지만, 높은 타점에서 뿌리는 공이 구위의 하락을 어느 정도 감싸주기 때문에 아직은 굳이 기교파로 변신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 지금의 변화만으로도 김수경에는 더없이 긍정적이다.
90승에서 다시 100승의 고지를 밟은 김수경에게 다음 목표는 우선적으로 150승을 노려야한다. 지금까지 150승을 넘은 투수는 송진우·이강철·정민철뿐이다. 현역투수로 100승을 넘긴 투수 중 송진우·정민철을 제외하면 정민태·김원형·임창용 그리고 김수경이 있다.
이 가운데 올 시즌 가장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투수는 단연 김수경이다. 희망적인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기교파로 변신함으로써 롱런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 송진우와 정민철 모두 강속구 투수에서 한 차례 부침을 겪고 난 후 기교파로 변신해 다시 승수 쌓기에 나섰다. 김수경도 그 과정선상에 있는 셈이다.
초고속으로 40승을 쌓았지만 이후 느닷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처럼 앞날은 결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롱런하는 투수가 많지 않은 한국프로야구 풍토에서 김수경의 200승을 향한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런 면에서 100승은 김수경에게 종착역이 아닌 200승을 향한 정거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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