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 대업
꾸준함에서 역대 최고 톱타자
6개월 동안 매일매일 경기를 치르는 야구선수는 오늘 웃다 내일 울기를 반복한다. 칭찬이 날이 선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것도 결코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차리라 무관심보다는 낫다. 당연히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비범한 현대 톱타자 전준호(38)를 과소평가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 과소평가된 최고 톱타자
전준호는 20일 KIA와의 수원 홈경기에서 2회 2루 베이스를 훔치며 시즌 10번째 도루를 기록했다.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17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600도루는 물론이고, 최초의 500도루를 돌파한 주인공도 전준호이기 때문이다. 통산 도루 부문 2위에 올라있는 KIA 이종범(485개)과도 100여개 이상 차이가 나는 전준호는 통산 도루실패 부문에서도 역대 1위(198개)다. 최다승 투수 송진우(한화)가 최다패 투수이듯 최다도루 기록 보유자 전준호에게 최다도루 실패는 장인들에게만 따라다니는 영광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마산고-영남대를 졸업하고 1991년 롯데에 입단한 전준호는 데뷔 첫 해부터 주전 톱타자로 자리매김하며 위대한 출발을 알렸다. 특히 1993년에는 이종범과 함께 사상 첫 70도루 시대를 열며 생애 첫 도루왕(75개)을 차지했다.
한 해 걸러 1995년에 생애 두 번째 도루왕(69개)에 오른 전준호는 2004년에 35살의 나이로 5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최고령 도루왕의 영예까지 누렸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전준호는 누상에 나갈 때마다 상대 배터리를 괴롭히는 성가신 존재다.
하지만 전준호는 대도(大盜) 이전에 최고의 톱타자이기도 하다. 물론 전성기적 이종범도 최고 톱타자로 명성을 떨쳤지만, 순수 톱타자로 제한하기에는 보여준 것이 너무 많은 5툴 플레이어였다.
반면 전준호는 예나 지금이나 고전적인 의미의 톱타자에 가깝다. 장타를 터뜨릴 파워는 없지만 정확하고 꾸준한 타격을 했다. 지난해까지 16시즌 통산 타율 2할9푼을 기록했는데, 톱타자 중 이종범(0.310) 다음으로 좋은 기록이었다. 3할 타율을 6시즌 기록했으며 2할6푼 밑으로 타율이 떨어진 적이 한 시즌밖에 없을 정도로 꾸준했다. 올 시즌에는 데뷔 17년째를 맞아 타격 전체 4위(0.333)에 오르며 생애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할 페이스다.
게다가 전준호처럼 오랫동안 톱타자로 활약한 선수는 없었다. 1991년 롯데에 입단할 때에도, 1997년 현대로 유니폼을 바꿔 입은 뒤에도 전준호는 언제나 맨 먼저 타석에 들어섰다.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톱타자로는 김재박·이순철·이종범·유지현·정수근 등이 있다. 그들의 톱타자 활동기간은 길어야 9년이었다. 풀타임으로 치자면 김재박이 7년, 이순철·정수근이 8년, 이종범·유지현이 9년간 톱타자로 활약한 것이 전부다.
전준호처럼 17년째 한 결 같이 톱타자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1번 타순은 전준호라는 영혼의 영원한 전쟁터이자 안식처다.
▲ 간과된 우승주역·모범생
프로세계에 우정은 있을지 몰라도 의리는 없다. 돌고 도는 것이 인생사라면, 팔고 팔리는 것이 프로세계다. 롯데는 입단 후 6년간 연평균 타율 2할8푼5리·68.0득점·40.5도루·47.0볼넷을 기록한 특급 톱타자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를 투수력 강화라는 목적으로 팔아버렸다. 1991년 1차 지명한 문동환을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서 데려오기 위해 전준호를 현금 5억원에 현대로 트레이드시킨 것.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두고 친정팀으로부터 트레이드된 충격으로 전준호는 그해 데뷔 후 가장 낮은 타율(0.247)을 기록하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8년에 전준호는 생애 첫 전 경기 출장과 함께 타격 2위(0.321)와 출루율 4위(0.398)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 현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롯데는 전준호를 보낸 후 아직도 부동의 톱타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2003년 말, 40억6000만원을 쏟아 부어 정수근(롯데)을 데려왔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있다. 롯데의 암흑기는 어쩌면 전준호의 트레이드부터 시작됐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도 롯데팬들은 전준호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달빛에 적신 목련처럼 애틋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전준호는 현대에서 더욱 빛났다. 마침 지휘봉을 잡고 있는 김재박 감독은 작전야구의 대명사였다. 국내에서 가장 번트를 잘 대고 작전수행능력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전준호는 김 감독과 환상의 호흡을 과시하며 4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합작했다.
현대의 4차례 우승에는 수많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 4차례 우승에 모두 기여한 선수는 정민태·이숭용·박진만과 함께 전준호가 있었다. 그리고 4차례 우승할 때에는 언제나 전준호가 1번 타자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선수들에게 돌아갔다. 삼성 박진만(45경기) 다음으로 가장 많은 한국시리즈 출장 기록(41경기)을 갖고 있는 전준호지만 간과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전준호는 FA 모범생이었다. 2001시즌 종료 후 4년간 총액 16억원에 현대와 재계약했다. 전준호는 계약기간 4년간 연평균 타율 2할8푼2리·71.0득점·29.3도루를 기록하며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계약기간 마지막 해에 상대적으로 부진했고 이후 1년 계약을 거듭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2005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지만 1년간 계약금 없이 연봉 2억8000만원에 현대와 재계약해야했고, 지난해에도 시즌 종료 후 3000만원이 삭감된 연봉 2억5000만원에 도장을 찍어야했다. 물론 고령의 나이는 구단 입장에서 언제나 부담되는 요소이지만, 전준호의 이름값과 변함없는 활약상을 고려하면 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스포트라이트를 비쳐라
올 시즌 프로야구의 화두는 ‘살아있는 타격의 전설’ 양준혁(삼성)이다.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2000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고지를 밟은 양준혁은 올 시즌 타격 주요 부문에서 상위권을 점령하며 나이를 무색케 하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특히 우리나이 39살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파워배팅으로 홈런레이스에 뛰어들어 주위를 경악케 만들고 있다. 각종 최고령 타격기록도 양준혁에 의해 새로 쓰여 지고 있다.
하지만 양준혁이라는 거대한 태양빛에 가린 전준호라는 은은한 달빛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문 분야인 도루를 비롯해 최다타수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고 있는 전준호는 양준혁에 이어 사상 두 번째 2000안타 달성의 유력 후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2000경기 출장이다. 21일 오전 현재, 전준호는 1911경기에 출장했다. 현역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경기에 출장한 선수가 바로 전준호다.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다경기 출장기록은 2005년 은퇴한 장종훈(전 한화)의 1950경기. 전준호가 현재 기량을 이어간다면 내년 5월께 사상 첫 2000경기 출장에 도달할 수 있다.
올해까지 17년 동안 전준호는 213경기에 결장했는데 경기 출장률은 90.0%에 달한다. 장종훈이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은 2005년을 제외한 18년 동안 318경기에 결장하며 경기 출장률 85.9%를 기록한 것보다 높은 수치. 물론 전준호가 데뷔하자마자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장종훈이 선수생활 말미에 부상 등으로 고생한 부분도 감안해야한다. 하지만 장종훈이 은퇴 수순을 밟은 나이에 전준호는 주전선수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사실 전준호도 데뷔 초에만 하더라도 체력이 약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경기 출장이 한 시즌밖에 되지 않은 것에서 잘 나타난다. 하지만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큰 부상이나 슬럼프 없이 선수생활의 상승곡선을 그려가고 있다. 그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특히 젊은 시절부터 빠른 발과 순발력으로 먹고 산 선수지만, 아직도 그 분야에서 정상을 다투고 있다.
선수가 나이가 들면 가장 처지는 것이 스피드지만 전준호는 예외다. 웨이트 트레이닝 기법과 현대의학의 발달로 선수생활이 길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선수 본인의 몫이다. 도태하는 그 순간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우아하지만 살벌한 프로세계에서 전준호는 지금도 생존하고 있다. 야구를 뒤늦게 깨우쳐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선수가 많지만 전준호는 머리도, 몸도 현역이다.
그러나 전준호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소속팀이 대표적인 비인기구단인 현대이며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화끈하지가 못해서 일수도 있다. 전준호처럼 톱타자로서 출루를 하고 번트를 대고 도루를 하는 선수들에게도 스포트라이트가 향해야 옳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지나치게 평범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평범함 속에서 전준호만의 비범함이 느껴진다. 그 비범함을 향해 이제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때다.
☞현대, 어색한 투수왕국·타자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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