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보유´와 남한의 ´핵 인질´문제 정면 주시한 정치풍자극 ‘그라운드 제로’개막
´우리 민족끼리´의 허상…거침없는 풍자와 냉소로 ´불편한 진실´ 담아
당신에게 핵폭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세계 평화를 위해 전량 폐기? 아니면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 폭정의 독재자에 대한 응징? 자, 그렇다면 장난은 어떻습니까? 절대 권력을 위한 장난,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값비싼 장난은...
삶은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의미있다는 말은 연극 ‘그라운드 제로’(복거일 작·정일성 연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라운드 제로’는 예측하지 못했기에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그린다.
작품의 배경은 29세기, 목성의 가장 큰 위성인 개니미드 공화국. 동서로 나뉜 개니미드 공화국은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남한을 비유한 ‘이스트 개니미드’와 북한을 비유한 ‘웨스트 개니미드’는 소위 ‘핵인질’로 전락한 현 상황을 그린다.
자유주의와 시장 경제를 통해 번창한 우파 이스트 개니미드에 반해 좌파 웨스트 개니미드는 민족사회주의 이념과 명령 경제 체제로 경제가 무너진다. 내전의 역사로 평화와 안정에 대한 국민적 염원이 큰 개니미드의 상황은 웨스트 개니미드에 정략적으로 농락당한다.
웨스트 개니미드의 독재자 조지프 메가리스는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핵 개발과 무력 침공을 강행한다. 이스트 개니미드의 대통령인 골드슈타인은 개인적 권력욕을 위해 메가리스의 웨스트 개니미드 자금 지원 요구에 끌려다닌다.
연극은 굉장히 직설적이다. ‘햇볕정책’으로 표현되는 대북포용정책의 현주소와 본질을 묻는 화법은 에둘러 말함없이 거침없다. 때때로 현실의 대통령 또는 정치인의 언행과 그대로 중첩되는 대목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연극이 형상화하는 상황은 대북불법송금,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대표되는 ‘북풍’의 재가공이다. 이스트 개니미드의 결단을 촉구하는 웨스트 개니미드의 위협은 ‘불바다’ 운운하는 북한의 ‘반보수대연합’ 논리를 연상케 한다.
핵문제를 둘러싸고 소모적인 논쟁과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는 야당 대표 그리고 타인을 깎아 세우고 밟고 쓰러트려야 하는 적으로만 인식하는 호전적 대통령의 모습은 북한 핵실험 이후 외부의 정보에 의지한 채 다만 서로를 닦아 세우고 비난하던 정치권의 모습과 닮은 꼴이다.
‘그라운드 제로’는 현실적이다. 정치풍자극이라는 장르적 성격을 교과서대로 구현한 작품이다. 그래서 연극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하기만 하다. 정색하고 무게잡으며 말하는 이 극은 90분간의 환상과 일탈을 꿈꾸는 이들에겐 다소 버거울 수 있다.
더욱이 간간이 터지는 웃음조차도 밝은 폭소가 아니라 침침한 냉소 또는 허탈한 실소기에 연극이 진행될수록 잊고자 했던 현실에 더욱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라운드 제로’는 우리가 애써 잊으려 했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핵이라는 군사적 긴장과 위협이 평화, 화해·협력과 공존해야 하는 모순적이며 이중적인 현 상황을 주시하고 극한의 상황을 설정, 관객들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촛불시위와 높아지는 반미감정, 주한미군철수와 갑작스런 안보공백 등 절망적 시나리오는 핵폭발이라는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그라운드 제로’의 논리가 허황될 수 있다. 게다가 웨스트 개니미드의 특공대가 휴대용 핵폭탄을 이스트 개니미드로 들여온다던지 휴대용 핵폭탄에 대한 ‘호기심’이 파멸을 불러왔다는 전개는 중간과정이 압축되면서 다소 거칠고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라운드 제로’가 형상화하는 세계가 현실에서의 인간군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목 뒤를 섬뜩함이 찌른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합친듯한 이스트 개니미드의 대통령 골드슈타인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닮은 독재자 메가리스는 버릇이나 행동, 말투 뿐 아니라 권력에 대해 강렬한 의지와 욕망, 집착을 지녔다는 점에서 현실의 그들과 쌍둥이다. 즉, 핵과 두 지도자는 절대권력과 오직 ‘권력의, 권력을 위한, 권력에 의한’ 정치로 주변을 무시하는 압제자를 함축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생명을 장난감처럼 가볍게 여기는, 그래서 생명을 담보로 인질극을 벌이는 독재자와 정치적 입지를 위해 ‘서풍’을 이용하려다 실패한 후 또다른 정략적 수단을 찾는 대통령의 모습은 오만과 독선, 자기애에 빠진 지도자의 위험한 이상과 의지가 세상을 살육과 비명에 빠트리는 덫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완성되지 않은 동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완의 존재이기에 ‘오직 하나’를 강조하고 그에 현혹되는 게 인간인 것이다. 금단의 상자를 연 판도라처럼 강력한 물리적 힘 앞에서 거부할 수 없는 끌림으로 핵폭탄의 단추를 누르는 ‘그라운드 제로’의 상황은 한반도의 현실이자 인간성에 대한 냉철한 고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극은 절망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인간보다 더 인간미 넘치는 로봇만이 남은 개니미드의 폐허 속에서 인간의 시체를 비료로 꽃이 핀다. 핵의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이 진실없는 장난으로 비극을 자초한 인간이 꽃으로 다시 환생하는 것.
‘하나의 이름’으로 개개인의 의미를 인정했던 김춘수의 ‘꽃’처럼, 저버리지 못할 약속과 희망을 담은 이육사의 ‘꽃’처럼 생명을 잃고 비로소 인간의 무게와 가치를 깨달은 영혼의 회귀, 그것은 추상적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북한 문제는 인간의 관점에서 생명의 무게는 공평하다는 것을,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라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 놓쳐선 안되는 기회이며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건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음을 상기시킨다.
무로 돌아간 땅에서 다시 유를 창조하는 극의 마지막은, 어쩌면 멀리 가고 있는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해법은 ‘처음으로 돌아감’에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원칙과 소신, 국민의 동의가 전제된 대북정책이 이뤄질 때 비로소 남북관계가 더디지만 정상적으로 흘러간다는 소박한 진리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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