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에서 4번 타자라 하면 가장 힘이 좋고 잘 치는 선수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정확성과 파워를 겸비한 3번 타자가 각광받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4번 타자가 팀 타선의 기둥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확실한 4번 타자의 존재감은 타선 전체에 힘을 불어넣는 효과까지 일으킨다. 상대 투수들은 4번 타자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3번 또는 5번 타자와 성급히 승부를 펼치다 얻어맞는 등 이른바 우산효과가 발생되기도 한다.
하지만 4번 타자가 팀을 이탈했을 때 대부분의 구단들은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며 타선의 침체기를 피하지 못했다. 실제로 2004년 삼성과 2010년 한화는 각각 이승엽과 김태균의 공백으로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003년 이승엽은 타율 0.301 56홈런 144타점이라는 가공할만한 기록을 남겼다. 특히 홈런과 타점은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이기도 했다. 이승엽 우산효과는 시즌 내내 삼성 타선 전체에 고루 퍼졌다.
이승엽 뒤에 배치됐던 마해영은 타율 0.291 38홈런 123타점의 MVP급 성적을 냈고, 5번 타자 양준혁 역시 타율 0.329 33홈런 92타점으로 활약했다. 이들 ‘이마양 트리오’는 무려 127홈런을 합작, 당시 팀 홈런 꼴찌였던 롯데(73개)보다 2배 가까운 수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2004년 이승엽이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로 떠나고, 마해영도 KIA로 이적하자 삼성 타선은 좌초되고 말았다. 이전 시즌 0.284였던 팀 타율은 0.269로 뚝 떨어졌고, 팀 홈런(213개→132개) 역시 반 토막이 났다. 양준혁이 28홈런, 진갑용이 24홈런으로 분전했지만 이들로 구멍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태균과 이범호가 동시에 떠난 2010시즌 한화도 난관에 봉착했다.
이전해 한화는 김태균이 뇌진탕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타율 0.330 19홈런 62타점으로 중심을 잡아줬고, 김태완(홈런 23개)과 이범호(홈런 25개)가 지원사격에 나서며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2010년 김태균과 이범호가 모두 떠난 한화는 무게감이 확 줄어들었다. 병역 의무를 마치고 돌아온 최진행이 32홈런으로 깜짝 활약을 펼쳤지만 김태완은 부진했고, 이적생 장성호도 김태균을 대신해주지 못했다. 당시 한화의 클린업 트리오는 타율이 0.294에서 0.253으로 급격히 하락했고, 홈런도 81개에서 60개로 감소했다.
지난 시즌 롯데도 4번 타자 이대호 효과를 톡톡히 본 구단이다. 롯데는 이대호를 중심으로 타선 전체가 고른 활약을 펼쳐 2년 연속 팀 타율 및 홈런 1위를 차지, ‘핵타선’의 위용을 과시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손아섭이 이대호 보호를 받으며 데뷔 후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상대 투수들은 이대호 앞에 주자를 내보내지 않기 위해 3번 타자와 승부를 펼쳤고, 이는 적극성이 뛰어난 손아섭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반면, 올 시즌 롯데는 이대호라는 큰 우산을 펼칠 수 없게 됐다. 롯데는 올 겨울 정대현과 이승호를 영입, 약점이었던 투수진 보강에는 성공했지만 ‘대체불가’ 이대호의 이적으로 타선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이대호의 이탈은 당장 중심타선의 타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대호 우산효과의 수혜자였던 손아섭은 이제 약점공략과 심한 견제에 시달릴 전망이며 노쇠화가 찾아온 홍성흔은 이미 지난 시즌부터 장타력이 줄었다. 강민호가 뒤를 받치고 있지만 포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공격에만 전념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2003~4 삼성과 2009~10 한화의 클린업트리오 성적.
일단 양승호 감독은 4번 타자 중심으로 운용되던 기존의 색깔을 기동력과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난 타선으로 변모시킬 계획이다. 무엇보다 빠른 발을 활용한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로 이대호의 공백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양승호 감독의 계산이다.
그동안 롯데는 이대호라는 해결사가 있었기 때문에 김주찬 정도를 제외하면 굳이 무리하게 도루를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타가 줄어들 올 시즌은 다르다. 루상의 주자들이 한 베이스라도 더 진루해야 득점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롯데는 김주찬을 비롯해 전준우, 황재균, 손아섭, 조성환 등 준족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
특히 전준우는 올 시즌 롯데 타선의 키플레이어다. 빠른 발과 만만치 않은 장타력을 보유하고 있어 양승호 감독이 추구하는 그림과 일치한다. 이에 대해 양승호 감독은 “4번 타자는 경험 많은 홍성흔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준우는 아직 어리고 부담을 느끼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면서도 “어차피 전준우는 롯데의 4번을 책임져줄 선수”라며 남다른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 삼성과 한화는 중심타자들이 팀을 떠난 뒤 약 7푼 정도의 장타율 하락을 보였다. 롯데 역시 이와 상황이 다르지 않다. 물론 삼성과 한화는 중심타자 공백 메우기에 실패하며 팀 성적에서도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롯데는 팀 컬러 변신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양승호 감독의 실험이 과연 제대로 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데일리안 스포츠 = 김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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