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 칼럼>폴리페서 권장하는 서울대 ´학통은 무너지고´
최익현 등을 키워낸 이항로 선생같은 참 스승은 어디 있나
지난 번, 국회에서 있었던 난장판을 지켜보면서 지식인 사회의 가치기준이 무너진 데 대한 좌절의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해머가 등장하여 벽을 뚫고, 전기톱이 문짝을 뜯었으며, 소화분말이 난무하였고, 국회의원들은 쇠사슬로 자신들의 몸을 묶는 등의 목불인견의 추태를 보였다.
그들이 누군인가. 더러는 장차관을 지낸 사람이며, 더러는 판검사를 지낸 사람이며 또 더러는 대학의 강단에 섰던 교수들도 있다. 외국의 언론들은 한국 국회의 고질병이 도졌다고 비아냥거렸다.
대체 그 의원들은 누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누구에게서 지식인의 도리를 배웠기에 그리도 후안무치한 지를 묻고 싶고, 그 정도로 나라망신을 시켰으면 한 두 사람 쯤 국회의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지식인들의 도리일 것인데도 다음날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희희낙락이다.
예전에는 역사의 큰 구비를 돌때마다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다. 존경하는 스승의 문하에 들어 공부하는 제자들을 문도(門徒)라고 했고, 스승은 자신을 찾아 온 문도들에게 학문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궁행(實踐躬行)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런 큰 스승의 학통이 넓고 깊게 퍼져나갔던 탓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니, 영남학파(嶺南學派)니 하는 학맥이 형성되었고, 또 그것은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는 지식인의 행동지침으로 자리매김 되었기에 언제나 나라의 큰 힘이 되었다.
요즘은 참 스승을 눈 닦고 찾아도 없다. 학문도 학문이려니와 인품을 겸하여 갖추고, 자신의 학문을 실천으로 옮기는 참 스승이 없고 보면 지식인 사회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장관자리라거나 감투자리라도 하나 생길 기미가 보이면 학문도 제자도 헌 신짝처럼 차버리는 사이비 스승들이 태반이라, 제자들이 역사인식(歷史認識)을 가다듬을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참 스승의 문하에서 제대로 된 제자가 나오는 것은 스승의 인품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평생 초야에 은거한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들어가고 나가는 일)하나에 달려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는 벼슬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군왕의 명이 있다 해도 응하지 말 것을 가르쳤고, 물론 본인도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 같은 스승의 귀감이 있었기에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등 많은 문도들이 의병장이 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지식인의 참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일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 명종 10년 11월 19일 자 <실록>
남명 조식 선생이 올린 상소문의 한 구절이다. 꼭 454년 전의 글이지만, 어쩌면 오늘 우리나라의 처지와 이리도 같은가. ´…마치 일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지가 이미 오래입니다´라는 구절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의 가르침인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신을 이어받은 최익현(崔益鉉), 유인석(柳麟錫) 등은 오직 그 일념 하나만으로 평생을 실천궁행하지를 않았던가.
면암 최익현 선생은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백성들보다 한 발 앞서나가는 구국의 결단을 몸소 실천해 보이면서 적지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국하였고, 매천 황현 선생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에 접하면서 ‘지식인 노룻하기 참으로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향년이 55세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 함석헌 선생은 하얀 수염발을 날리면서 태연히 감옥엘 드나들면서도 <씨알의 소리>를 주장하면서 민족의 정기와 진로를 제시하지를 않았던가.
모두들 어디에 계시는지 그립기만 하다. 그분들에게는 오직 공익(公益)만 있었을 뿐, 사욕(私慾)은 눈을 닦고 찾아도 없었다.
그 핵심은 나라의 정체성과 역사인식의 발현에서 비롯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우치면서도, 그분들은 이를 오직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실행하였을 뿐, 여기에 논리를 달고자 하지를 않았다.
아!, 오늘의 스승들은 어디에 계신지 답답한 마음 가늠할 길이 없다.
글/신봉승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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