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저녁 행안부의 서울광장 시민추모제 사용을 불허한 가운데 덕수궁 돌담길 안쪽 정동 로터리 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 시민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고 노무현 대통령 시민 추모제´에서 시민들이 영상물을 보며 울고 있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추모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대한문 으로 이어진 조문행렬을 따라 이어진 리본 사이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이 걸려 있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대통령입니다.”
27일 어스름이 내려 앉은 서울 덕수궁 인근 서울시립미술관 앞.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추모의 촛불이 정동길을 밝혔다.
불교,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등 4개 종단과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45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시민추모위원회’가 주최한 시민추모제는 당초 계획과 달리 행정안전부가 서울시청 앞 광장 사용을 불허하면서 정동로터리로 장소를 옮겨 진행됐다.
좁은 정동로터리에는 4000여명(경찰추산, 주최측 추산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렸다. 참석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이 담긴 영상이 나올 때마다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봤다.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깨무는 시민들도 있었다.
재임 시절, 이념과 세대, 계층 간 대립과 분열을 증폭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던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국민통합’이었다. 이날 정동로터리에 모인 시민들도 생전에 고인에게 가졌던 지지나 기대, 원망과 회한을 뛰어넘어 비극적 최후에 함께 안타까워하고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기원했다.
차분한 분위기 속 4000여명 시민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추모제는 오후 7시 20분부터 약 3시간 동안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추모사와 추모시가 낭독됐고, 추모 노래와 공연, 추모영상 등이 이어졌다. 4대 종단의 추모기도로 시작된 추모제에는 동국대 유지나 교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석태 전 회장, 백무산 시인, 주부 정미경씨, 대학생 최초로씨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추모사에 나섰다.
시민들은 추모사에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고, 추모영상에서는 눈가의 이슬을 닦아냈다.
정진우 목사는 “부활이란 게 죽은 사람이 실제로 살아난다는 게 아니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사 속에서 살아났다. 어떤 권력도 그를 무덤에 가둘 순 없다”고 말했다.
동국대 유지나 교수는 “힘들고 외로울 때, 고뇌에 빠져 허우적댈 때 책을 읽고 마음을 가다듬을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죽음과도 같지 않겠느냐”며 “우리의 연인이자 오빠, 형님, 친구였던 그 분은 우리에게 소명을 깨우쳐주셨다”고 추도했다.
이석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 회장은 추모사에서 “온몸으로 민주화를 위해 기여한 노 전 대통령이 이렇게 떠나버리니 참으로 막막하다”면서 “민중의 요구를 배반한 법은 무리한 권력임을 온 몸으로 보여줬던 노 전 대통령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소중히 지키겠다”고 추도사를 가름했다.
백무산 시인은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라는 추도시를 헌정하고, “오늘 우리가 한 인간에게 보내는 이 뜨거운 열정과 감정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일어나는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폭력과 그에 희생되는 모든 분들에게 동일한 감정을 가져야 하고, 그것이 인간 노무현에게 보내는 최대의 예의가 될 것”이라고 기렸다.
주부 정미경씨는 “내게 80년 5월이 아직도 가슴 아픈 날로 남아있고 그때 그 피가 식지 않았는데, 2009년 5월 또한 너무나 가슴 아픈 그런 날일 것 같다”고 운을 뗀 뒤 “무엇이 그를 데려갔는지 비통할 따름이고 너무나 무심하게 지켜주지 못한 우리들의 무책임도 밉지만 한없이 자책에 빠져 있거나 좌절하지 않겠다. 그것만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노래”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A4 용지에 고인에게 못 다한 말을 전하는 편지를 적는가 하면, 노 전 대통령의 추모 영상을 사진에 담기도 했다. 추모위는 이날 작성된 편지는 책으로 엮어 봉하마을에 보낼 예정이다.
노래를찾는사람들의 공연과 민속춤 연구가 이삼헌씨의 진혼굿으로 절정에 달한 추모제는 참석자 전원이 ‘아침이슬’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상당수의 시민들은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대형 텔레비전으로 노 전 대통령 추모 영상을 지켜보거나 대한문 분향소를 조문하기 위한 행렬에 합류했다.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에서 정동로터리에 이르는 인도 곳곳에는 ‘추모의 학 접기’ 등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행사와 함께 4~5미터에 달하는 대형천에 그려진 노 전 대통령 걸개그림 등이 전시되고 있다. 귀가길의 시민들은 학종이를 집어 들고 종이학 접기에 공참했고, 몇몇은 경찰과 이명박 정부의 대응에 놓고 시민들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추모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돌담길 한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노제가 진행되고 있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고 노무현 대통령 시민 추모제´에서 시민들이 영상물을 보며 울고 있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추모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돌담길 한편에 그려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에 촛불이 둘러져 있다. ⓒ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서울시청 앞 광장 불허에 시민들 반발…거리행진 시도로 한때 마찰 빚기도
한편, 이날 정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로 서울시청 앞 광장을 사용하는 것을 불허하자,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진출을 시도하면서 한 대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다.
당초 추모제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오후 7시부터 열릴 예정이었다. 추모위측은 “오늘 오전 11시 20분 오세훈 서울시장과 면담한 자리에서 ‘비정치·비폭력 행사가 가능하다면 광장 사용을 허락하겠다’며 행정안전부 등 장의위원회와 협의한 후 답변하겠다고 말했다”면서 “그런데 행안부서 오후 5시 15분 이달곤 장관을 면담했으나 불허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정부의 서울시청 앞 광장 불허방침에 반발한 시민들이 거리진출을 시도하면서 경찰과 대치했다.
일부 시민들은 “광장이 이명박거냐 오세훈거냐. 시민의 것인데 왜 막냐”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게 아니냐”며 경찰에 격하게 항의했고, 몇몇은 상복을 갖춰 입고 미리 준비한 목관과 노 전 대통령 영정사진을 들고 어깨에 지며 거리행진을 시도했다.
이에 경찰이 행진을 차단하자, 시민들은 “명박퇴진”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대치했다. 경찰은 “차도로 내려서지 말아달라”고 거듭 방송했다.
그러나 ‘불법집회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데다 안전상, 그리고 29일 영결식의 차질없는 준비를 위해 이런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경찰에 시민들은 ‘과잉대응’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은 이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덕수궁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인근에 32개 중대 2500여명의 경력을 배치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광장으로 통하는 지하철 입구를 봉쇄하는가 하면 차벽으로 에워쌌다.
이로 인해 방송차량과 무대차량도 ‘불법 집회 물품’으로 간주돼 경찰에 묶이면서 행사가 40여분 간 지연되자 민주당 안민석, 원혜영, 이석현, 강기정 의원 등이 행사 차량을 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수용하지 않았다. 민주당측 의원들은 “정부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국민장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추모위측도 강하게 반발했다. ‘고인을 기리는 영결식까지는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겠지만, 그 이후 쌓였던 할 말을 하겠다’며 벼르는 모습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사무처장이 “국민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정부에 할 말은 많지만 29일 영결식까지는 참겠다. 하지만 오늘을 기억하자”고 말했고, KYC 천준호 대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분노가 솟지만, 장례식이 끝나는 29일까진 경건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보내자. 너무 아프고 슬플 땐 슬픔을 표현해야 하는데 우리를 제발 슬플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고, 참고 또 참고 기억해야 할 순간”이라고 불편한 심정을 토로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대표도 “인간의 슬픔마저도 경찰버스로 막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인데, (그런 면에서) 현 정부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냉혹한 정권”이라며 “전임 대통령 서거에 예우도 제대로 못하는 속 좁은 정치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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