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신체의 장애와 욕망의 분출구, 상충되는 상징의 의미
아래 글은 영화 <박쥐>의 내용 일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보신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글을 읽으시기전에 판단하시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을 다룬 ‘렉스’의 캐슬린 루이스는 자신의 아들이 복합 장애를 가진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렇게 절규한다.
“신이여,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자신이 장애에 걸린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는 그렇게도 신을 원망했다. 정작 당사자가 그러한 장애의 큰 고통을 당한다면 더욱 더 탄식과 원망의 절규를 쏟아낼 법도 하다.
영화 ‘박쥐’의 주인공도 이러한 절규를 할법했다. 장애는 신실(神實)함과는 인과관계가 없으니. 젊은 신부는 상현(송강호)는 평소에 신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다했고, 독실한 종교인으로 시각장애인이자 하반신 장애인 노신부(박인환)는 그에게 “너도 친구가 있냐”고 물을 정도였다.
심지어 상현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바이러스 임상 실험에 참여한다. 그 바이러스 임상실험에서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는 자진해서 참여했던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그의 몸 안에는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퍼졌다. 물집이 수없이 잡히더니 결국 피를 쏟으며 혼절해 버렸고, 응급실에 실려간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다.
그를 진료한 의사들은 최종 사망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곧 그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살아난다. 실험에 참가한 50여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국내에 돌아와 일약 기적을 희생정신으로 실현한 영험한 신부의 반열에 올라와 있었다. 병자들은 그에게 자신들에게 그 영험함을 나누어 달라고 매달린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하는 흡혈귀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평소에 자신이 돌보아주던 환자의 피를 먹어야 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피를 먹으며 살 수 있는 것은 그 길 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놓았던 그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해야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신의 뜻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식량을 위해서 그 환자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에게 먹이고 재우고 몸을 닦아주는 것은 신선한 피를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대신 목에 직접적인 상처를 내어 피를 빨아먹는 다른 흡혈귀나 뱀파이어 대신 그는 링거를 통해서 쪽쪽 빨아먹을 뿐이다.
핵심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남을 봉사하기 위해 스스로 치명적인 바이러스 실험에 참가했는데, 그는 치명적인 장애를 안고 온 것이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며, 살아있으면서 죽은 존재,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존재이다. 지젝이 말하는 중간자적 존재, ‘똥’이다. 더구나 그는 신부이기 때문에 남의 피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성직자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아니 성직자는 흡혈귀와 맞서 싸워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니 더욱 그 모순성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지 않은가. 물론 왜 하필 뱀파이어인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박쥐라는 제목이 주는 철학적 의미는 그렇게 깊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가면성을 제시하려는 의도는 넘친다.
하지만 그러한 가면성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의 잘못이라면 자살하지 않고 살아난 것인데, 어찌 신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겠는가. 결국 전체적으로 모순이다. 이러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 그 가운데 장애는 그 종교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설명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남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흡혈귀가 되면서 드는 그동안 금기로 억압했던 욕망에 쉽게 마음을 열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욕망의 상징은 성욕이다. 종교인의 파계, 세속화는 성욕에 달려있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서 대중 통속성을 강화했다. 우연히 병원에 어린 시절 친구 강우(신하균)가 입원하게 되면서, 친구의 집에 놀러가게 된다. 병을 고쳐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이 주효했다. 마침 수요일마다 ‘오아시스’라는 마작 놀음이 있는 날이었다. 그곳에서 태주(김옥빈)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다. 태주는 자신의 친구 강호의 안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마는 상현과 태주였다. 두 사람 모두 금욕의 새장 안에 있었다. 태주는 강우가 성적으로 무능했기 때문에 밤마다 송곳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며 지냈다. 상현은 신부의 몸이기 때문에 욕정이 솟아오를 때마다 피리로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며 견디었다. 두 사람의 허벅지에는 멍과 상처투성이다.
두 사람의 욕정은 분출하기 시작하면서 그 욕정은 누군가에게 칼이 되었다. 즉 목숨을 빼앗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무기의 희생자는 바로 태주의 공식적인 남편인 강우이었다. 강우는 사실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 증상을 통해 명확하게 지적해낼 수 없지만, 육체와 정신이 모두 심약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태주도 정상적인 행동거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세살 때부터 집안에서 갇혀 지내면서 두 모자를 위해서 노동을 해왔다. 학대행위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마치 나사가 하나 풀려있는 듯싶다. 또한 언제나 억압의 환경 속에서 생활해왔기 때문에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욕망이 살아있었다. 욕망의 분출구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고, 그 분출한 곳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 상현이었다.
상현도 여전히 욕망은 살아있었지만 그것을 억압해왔을 뿐이다. 한번 무너진 금욕의 벽은 겉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우는 욕망이 없는 존재였다. 특히 성적인 욕망은 더욱 그러했다. 그 욕망의 결핍은 태주의 욕구 불만으로 이어졌다. 결핍은 혼자만의 영역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 특히 부부의 관계이다. 어떻게 보면 부부의 관계, 인간의 관계는 욕망의 상호성이 엄연하게 작동하는 관계인지 모른다.
태주와 상현은 결국 욕망이 없는 존재를 제거해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 없는 존재는 장애인이었다. 장애인은 무성욕의, 무사랑의 존재로 그려지고는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욕망이 없는 존재는 욕망이 있는 존재에게서 제거 당했다. 마치 욕망이 적은 장애인이 욕망이 큰 비장애인들에게 배제되듯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욕망의 존재인 강우는 자신이 태주에게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르면서 어느새 그녀를 학대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장애인이라고 그의 행동 모두를 긍정적으로 받아줄 수만은 없는 점을 드러내준다. 오히려 무욕의 존재는 긍정적이지 않을 수있다. 욕망이 있는 존재들은 그 욕망을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예의를 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우와 같은 무욕망의 존재는 다른 이들을 전혀 의식하고 배려하지도 않기 때문에 주위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무성욕의 존재로 그려진 장애인은 누군가의 아들일 것이다. 그 누군가의 아들, 즉 아들의 어머니 라여사(김해숙)는 아들의 죽음에 혼절한다. 그리고 뇌혈관의 이상으로 사지를 못 쓰는 존재가 된다. 즉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그러한 장애는 오히려 비장애인일 때 알 수 없는 진실을 알게 해준다.
사지를 못 쓰고 말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태주와 상현은 그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마음대로 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들이 그녀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조차 말이다. 더구나 장애인이 된 무용한 존재라고 여긴 그들은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 결국 죽는 사람들은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들이다. 장애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장애가 없기 때문에 죽었다.
태주와 상현은 자신의 친구이자 남편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항상 주변은 물로 가득하고,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죽은 강우는 가슴위에 돌을 얹고 나타난다. 그것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지만, 두 사람의 의식 작용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한 장면은 뱀파이어의 초능력이 빚어내는 현상과 함께 호접몽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결국 일순간의 욕망을 위해 영원히 마음의 장애자가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죽은 강우처럼 무욕의 존재만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젊은 신부 상현에게 언제나 멘토 역할을 했던 노신부(박인환)는 눈이 안보이고, 항상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노신부다. 항상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강조하는 신부이고, 존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인품을 지닌다. 뱀파이어가 되어 돌아온 젊은 신부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는 행동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 노신부는 결국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존재로 다시금 재등장한다.
뱀파이어가 되면, 눈이 보일 수 있고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젊은 뱀파이어 신부에게 피를 나누어 달라고 한다. 상현은 거절하지만 계속 달라고 요구하는 가운데 더 이상 뱀파이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상현은 그 노신부의 심장을 찌르고 그 피를 받아먹는다. 결국 상현에게 정신적 물리적 양식을 주고 말았지만, 그 생명까지 주고 말았다. 한번 세상을 보고자 했던 욕망은 세상을 느낄 수 있는 기회까지 앗아가 버렸다.
인생은 고해(苦海)를 넘어서 인생은 장해(障海)다. 장애의 바다이다. 그것에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 인과 관계에는 오로지 상황에서 판단하고 선택하는 인간의 행위만이 존재한다. 그 행위 때문에 다시 다른 행위들이 인과 법칙처럼 등장할 뿐이고 다른 이들이 반응한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그곳에 있을 뿐 박쥐같은 이중성은 부차적이다. 오로지 사람안의 양심과 영혼만이 스스로 모든 죄과를 거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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