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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따기전에 축하전문 쓴 대통령


입력 2008.08.25 08:48 수정        

<그리운 나라, 박정희>아시안게임 ´눈물의 반납´ 절치부심

박정희 조국 근대화 대장정의 피날레…중국 퍄오정시 바람

´여자 헤라클레스´ 장미란이 16일 베이징 항공항천대학 체육관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 여자역도 최중량급(+73kg)에 출전, 용상 3차 시기에서 186kg을 들어 올리며 용상 세계신기록을 달성하고 있
고독한 자기 희생의 집념에 보내는 갈채

베이징올림픽 열기가 지나가고 나니 어느덧 2008년 여름도 끝자락이다. 한국은 종합 성적으로 기대 이상의 아주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잘 싸워준 각 종목의 많은 선수들에게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데, 여자 역도 75kg 이상급에서 월등한 실력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차지한 장미란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가 아닌가 싶다.

역도는 홀로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올리는 극기 훈련이 요구되는 비인기 종목이다. 게다가 장미란의 경우 역도에 걸맞는 체격을 위해 여성다운 몸매를 포기해야 하는 자기 희생이 따른다. 대중은 그 고독한 자기 희생의 집념에 열광하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녀의 금메달은 단순히 가장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올린 결과물이 아닌, 경제의 양극화로 맥없이 주저앉은 서민대중의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를 번쩍 들어올리는 환희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도 비인기 종목 레슬링에서 나왔다. 1976 몬트리올올림픽의 양정모가 그 주인공이다.

베이징에서 장미란의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 격이라고 경기 시작도 하기 전에 주최측이 시상식 예행연습으로 애국가를 방송했다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양정모의 몬트리올에서는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외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번도 따보지 못한 금메달을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두손 모아 비는 심정이어서 30여년 전후의 우리네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리 써놓은 금메달 치하 전문

몬트리올올림픽 때 대통령 박정희에게서 흥미로운 움직임이 발견되고 있다. 진해에서 여름 휴가를 보낼 예정이었던 그는 양정모가 경기를 하기 전에 청와대를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양정모의 금메달 가능성을 점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간절한 희망사항일 뿐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는 양정모의 금메달을 치하하는 전문을 미리 썼다. 그래 놓고 금메달을 따거든 몬트리올 선수단 앞으로 보내라고 지시를 했다.

뒤에 레슬링 코치 정동구가 밝힌 말에 의하면 몬트리올로 떠나기 전에 매일 밤 양정모를 사찰에 데리고 가서 부처님 앞에 절을 하면서 “금메달!” 소리와 함께 1천배의 기원을 올렸다고 한다.

코치와 선수가 이러할진대 대통령이라고 무엇이 다를 것인가. 금메달을 충분히 낙관해서 전문을 미리 써놓은 것은 아니었다. 지도자에게는 때맞춰 판단을 내려야 하는 책무가 있다. 잘되든 잘못되든 때를 놓치지 않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책무이고, 최초의 금메달을 고대하는 국민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은 강렬한 열망 또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양정모는 “고대하던 금메달을 조국에 바쳤다”고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그의 금메달은 국가적인 경사였다.
그 시절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는 스포츠 약소국의 열등감에서 벗어나 국력을 키우자는 용틀임 소리였다. 불만 세력들 사이에서는 국가권력이 스포츠를 이용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국민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베이징올림픽에서도 북한 선수가 여자 역도 63kg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장군님이 경기를 지켜본다는 생각을 하니 힘이 솟았다”고 말하는 그 선수가 안쓰럽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를 비아냥거릴 수 있을까. 우리도 “대통령 각하께서…”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듯이 국력이 약할 때는 스포츠의 국가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1964 도쿄올림픽 때 우리는

베이징올림픽은 ‘체력이 국력’임을 다시한번 절감케 했다. 올림픽은 선수 개인의 기량과 체력 외에 국력의 우열을 가리는 경연 무대이기도 한 것이다. 부자 나라의 선수들은 활달한 반면 가난한 나라의 선수들은 어딘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다. 잘 먹어야 체력과 기량도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역도의 장미란과 수영의 박태환들은 산업화가 이루어진 다음의 세대이다. 체력도 국력도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금메달이 개인의 영광을 넘어 국민의 행복감에 기여하는 것은 이들을 길러낸 국력이 오랜 세월 땀과 눈물을 흘린 국민 모두의 보람이라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길러낸 세대에게는 국제무대에서 기를 펴보지 못하던 보릿고개로부터의 뼈마디마디에 맺힌 설움과 아픔이 있다.

일본이 도쿄올림픽을 개최했던 1964년의 우리 처지가 어땠을까.
도쿄올림픽에서 북한의 육상 선수 신금단과 남한에 사는 아버지의 10분도 안되는 비극적 해후를 보고 대통령 박정희는 “피를 토하고 통곡할 일이며 우리 민족의 쓰라린 시련”이라고 말했다.

1964년은 대통령 취임 첫해였다. 연초부터 “부지런히 일합시다”라는 화두를 던지며 우리만이 잘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사태로까지 이르러 긴장과 혼란의 수렁이었다.

당시의 세태를 묘사한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은 병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돈으로 바꾼 30대의 월부책 판매원이 자살을 하고, 그와 선술집에서 만났던 20대 두 젊은이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허무주의 늪에 빠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겨울에 돈을 빌리러 서독에 간 대통령 박정희는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만나 줄곧 흐느끼는 부인을 달래야 했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내외가 눈이 퉁퉁 붓도록 함께 울어 한 수행기자는 대통령 내외의 다음 공식행사가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광모 <청와대>)

또 다른 신문기자는 1966년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을 따라 말레이시아에 갔다가 그 나라의 수출이 한국의 15배나 되고, 인구 900만에 자동차가 150만대인데 한국은 4만 1000대에 불과한 것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1년에 자동차를 1만대씩 생산을 해도 말레이시아를 따라가려면 얼추 150년이나 걸린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히더라고 했다. (김종신 <영시의 횃불>)

그런 시절에 부총리 장기영이 덜컥 1968년 아시안게임 유치에 성공했다고 보고를 했다. 박정희는 고개를 저었다. 돈이 없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장기영이 개최권 반납의 어려움을 말하자 박정희는 “돈을 붙여서 다른 나라에 넘기면 될 것”이라고 했고, 결국 태국에게 수백만 달러를 주고 아시안게임을 넘겨야 했다.

일본이 도쿄올림픽 이후 눈부신 국력의 신장으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며 경제대국을 향해 신명나게 달려가던 그 시기에 우리 한국의 실정이 이러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호돌이)와 심벌마크.

대역전 드라마, 1988 서울올림픽

그로부터 절치부심의 10년 세월이 흘렀다.
박정희는 그의 집권 마지막 해가 된 1979년에 이르러 올림픽 유치를 결정한다. 비로소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일본 나고야에서도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해서 경쟁이 붙을 판이었다.

“일본이 올림픽을 두번씩이나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우리가 가져와야 해.”

박정희는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9년 9월 19일 국민체육심의위원회가 제24회 하계올림픽 유치 결의한 것을 9월 21일 정부가 정식으로 승인하고, 이어 10월8일 서울특별시장이 이를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10월 13일 제60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80년대에 아시안게임과 세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10여일 후 10.26사건이 발생했고, 1986 서울 아시안게임에 이어서 열린 1988 서울올림픽에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다.

서울올림픽과 관련해 누구도 박정희를 말하는 이 없고,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의 ‘독재’를 매도하는 소리만 무성한 가운데 유가족은 거의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 은둔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섰던 박근혜는 어쩌다 거리에 나가도 화장품 선전하는 아가씨들이 메이크업을 하고 가라고 붙잡을 정도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심지어 대통령을 모셨던 인사들이 추모 모임을 만들어 박근혜에게 연락을 하려 해도 어디로 이사가서 사는지를 몰랐던 적도 있었다.

그런 시절의 박정희가 없는 서울올림픽은 참으로 볼 만했다.

앞서 올림픽 유치를 위해 1981년 9월 제83차 IOC 총회가 열린 독일 바덴바덴에서는 박정희 시대부터 세계시장을 누벼온 정주영, 조중훈, 김우중, 최원석 등 재벌들이 너덜너덜해진 명함을 고무줄로 동여맨 채 몇날 며칠 곳곳을 누비며 득표 활동을 벌였다. 자기 돈과 시간을 쓰면서 오로지 국익을 위해 똘똘 뭉쳤던 ‘재벌 특공대’는 대한민국 서울이 일본의 지방도시 나고야에게 개망신을 당하리라는 예상을 뒤집고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서울올림픽의 대역전 드라마를 예고했다. (정주영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서울올림픽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두번째였다. 그것은 한국보다 월등히 앞서가 열등감을 안겨주던 동남아 각국을 멀찌감치 뒤로 따돌리고 이뤄낸 대역전극이었으며,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신생국 중에 경제성장에 성공하고 올림픽을 개최하는 최초의 사례였다.

서울올림픽 이전까지 하계올림픽을 개최해본 나라는 불과 15개국. 그런데다 분단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는 한국의 올림픽 개최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동아일보80년사>)

올림픽 기간 동안 인천항의 대형 여객선을 숙소로 사용한 소련 선수와 임원들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이뤄놓은 성과에 “기절할 정도로 감명받았다”고 토로했다. (전 주한미대사 릴리 회고록)

각국의 매스컴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3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올림픽을 개최하게 됐는가?”라며 “한국인들은 부지런하고 교육열도 매우 높으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정신과 미래에 투자하는 진취적 기상을 갖고 있다”는 소개와 함께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및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국민들이 이에 호응해 단기간에 이룩한 한국의 기적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의 합작품”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인들의 입에서는 박정희의 ‘박’자도 나오지 않은 서울올림픽이었다. 올림픽 개폐회식 문화축전의 연출을 1971년 제7대 대통령 박정희 취임 경축예술제의 무대감독을 맡았던 국내 공연예술계의 제1세대 감독 유경환이 총지휘했어도 아무도 박정희를 말하는 자 없는 서울올림픽은 참으로 볼 만한 것이었다.

박정희 “성기수 박사,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줘야겠소”

가장 볼 만한 서울올림픽의 백미(白眉)는 올림픽 운영 전산시스템을 개발한 한국의 과학기술이었다.

알기 쉬운 한 예가 베이징올림픽 수영 400미터 자유형 결승에서 박태환이 터치패드에 손을 대는 순간 1위 자막이 떠오르고 0.01초를 다투는 선수들의 기록과 순위가 정확히 나타나는 시스템이다. 터치 순간의 기록이 컴퓨터DB와 전광판에 자동으로 입력되고 게시되는 방식의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한 것이 20년 전의 서울올림픽이었다. 박태환이 태어나기도 전이다.

그것이 바로 1984 LA올림픽의 흑백 디스플레이 시대를 청산하고 컬러 그래픽으로 현란한 마술과도 같은 첨단 기술을 연출해 외국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서울올림픽의 GIONS(Games Information On-line Networks System)였다.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시스템공학연구소(SERI)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경기의 운영관리와 결과처리 시스템인 GIONS는 서울올림픽 기간인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 동안 34개 경기장의 경기 결과와 각종 통계를 현장에서 처리하여 메인프레스센터(MPC), 본부호텔, 국제방송센터(IBC), 경기안내센터, 선수촌, 기자촌 등에 한치의 오차 없이 전달함으로써 1964 도쿄올림픽에 처음 컴퓨터가 도입된 이래 가장 진보된 전산시스템이라는 찬사와 함께 “서울올림픽의 또 다른 금메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남자 육상 100미터 결승에서 1위를 차지했던 캐나다의 벤 존슨이 근육강화제를 복용한 사실이 밝혀져 금메달을 박탈당한 사건에서 첨단의 도핑테스트 실력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도 KIST의 생체대사연구센터 연구진이었다.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인 KIST의 과학자들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에 대통령보다 봉급을 더 주고 길러낸 최고의 인재들이었으며, 그중에 서울올림픽에서 진가를 발휘한 대표적인 인물이 GIONS 개발의 주역인 KIST 시스템공학연구소장 성기수였다.

성기수는 1979년 박정희 생전의 마지막 5.16민족상 수상자였다. 그는 ‘한국기술 발전에 헌신하고 특히 컴퓨터 한글실용화와 능률화로 산업계에 획기적인 발전을 기여한 공로’로 학예부문을 수상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1979년 5.16민족상 수상자들과 만찬을 함께 한 청와대 영빈관은 갖가지 추억담과 웃음꽃이 가득한 축제 분위기였다.

헤드테이블에서 칵테일 잔을 들고 수상자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던 박정희가 성기수를 소개했다.

“성 박사는 하버드대학 3백년 역사에 2년 만에 최단기 석사와 박사학위를 따서 기록을 세운 천재지요.”

그러고는 컴퓨터에 관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우리나라의 전자계산 보급 및 기술수준은 어떠합니까?”

“운용기술은 상당히 발전했지만 제작이 문제입니다.”

“컴퓨터 원리는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더군요. 전에 KIST 성 박사 방에 가보니 키를 조작하니까 금방 내 얼굴이 그려져 나오더군요.”

“그 당시에는 미술대학생들에게 각하의 모습을 그리게 한 뒤 컴퓨터에 기억시켰던 것인데 지금은 사진만 있으면 됩니다.”

박정희는 KIST를 방문할 때면 성기수의 안내로 전산실에 들러 컴퓨터가 작동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흐뭇해하곤 했다.

그가 기분이 좋을 때면, 머리를 기르지 않고 유별나게 소년처럼 항상 짧게 깎고 다니는 성기수를 놀리듯이 칭찬하는 말이 있었다.

“성 박사는 아무리 봐도 박사 같지 않고 중학생 같은데 머리는 꼭 컴퓨터처럼 명석하군요.”

박정희는 만찬장에서도 여러 사람이 듣도록 이렇게 말했다.

“성 박사의 머리가 왜 짧은지 아십니까? 미국서 이발소에 갔더니 중학생인 줄 알고 머리를 짧게 깎아 지금 다시 기르느라고 그렇답니다.” (동아일보 1979년 5월17일)

폭소가 터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만찬이 끝난 뒤, 정원에서 수상자들을 일일이 악수로 배웅하던 박정희는 성기수를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탁의 말을 했다.

“성 박사,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줘야겠소.”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후 성기수는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첨단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1992년 KIST의 시스템공학연구소를 떠났다. 남들이 한국 정보산업(IT)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공직 생활에 관해 질문을 하면 그는 “나를 껴안았던 박 대통령의 말이 귓전에 생생하다”면서 별다른 설명이 없이 “나는 성삼문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성기수 개인 웹사이트 www.sungkisoo.pe.kr)

화기애애한 만찬장의 대통령. 1979년 5월16일 5.16민족상 수상자들과 만찬을 함께 한 박정희 대통령이 학예부문 수상자인 당시 KIST 전산실장 성기수 박사의 팔을 잡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박정희 “올림픽은 근대화시대의 종점이며 본격 민주주의 시대의 시점”

서울올림픽은 박정희 시대로부터의 소프트웨어를 80년대 정권이 ‘엔터 키’를 쳐서 펼친 현란한 디스플레이였다.

그것을 박정희는 조국근대화 장정(長程)의 피날레로 보았다.

“올림픽을 해야 조국근대화를 달성하는 거야.”

올림픽 유치의 의미와 목적을 그렇게 말했다.

일본이 올림픽을 두번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고, 한국이 올림픽을 해야 조국근대화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는 일련의 발언은 국무총리 최규하와 청와대 참모진, 그리고 체육회 관계자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서울올림픽에 박정희는 없었고, 박정희를 말하는 자도 없었다.

하긴 박정희가 밥솥에 밥을 지어놓으니 그 다음 누구누구가 맛있게 먹고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 먹어 나중에는 밥솥까지 망가뜨리더라는 유머가 있다. 누구누구들은 그러려니 각설하고, 이런 우스갯소리에서도 애써 이룩한 보람을 느껴보지 못한 박정희에게는 야릇한 연민의 정이 복선(伏線)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백골이 진토되어서도 억울해하거나 원통해할 박정희가 아닐 터이다.

5.16혁명이 대한민국 역사에 격렬히 부팅을 하는 순간, 박정희 개인은 그 인생과 함께 역사 화면으로 초기화된 몸이었다.

그는 당대에 울타리를 치고 나무 심어 결실을 보려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에게 역사는 과거의 기록만이 아닌, 과거와 당대와 미래가 이어지는 무한대의 흐름이다. 나무를 심어 푸른 숲의 국토를 미래 몫으로 물려주겠다는, 그의 일거수일투족과 그가 지휘한 모든 국가사업이 그런 역사 흐름에 한줄기로 꿰어지고 있다.

그가 경제의 근대화 기간에 겨울 보리밭 밟듯이 꾹꾹 밟아두었던 정치의 봄날, 즉 역사 흐름으로 다가올 정치의 근대화 시점을 거의 정확히 예측한 것도 보통의 역사 안목은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국민 개인당 GNP 4천달러 시대가 되면 본격적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

1978년 11월 장기 경제정책을 확정하면서 4천달러 목표 달성을 1986년으로 잡고, 그 시점이면 아시아에서 실패한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닌 우리 토양에 맞는 민주주의 체계를 본격적으로 갖추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경제성장이 국가사회 구성원의 품위에 걸맞는 또다른 욕구를 발생시키는 획기적인 시점의 역사 이정표를 예시한 것이었다.

겨우내 밟히고 밟혀 땅속에서 뭉쳐진 겨울 보리밭의 기운이 해토머리에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폭발하더니 1986 아시안게임을 지나 1987년 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이듬해 1988년에 국민소득이 4000달러를 넘어 4040달러를 기록했고 그해에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마음 독하게 먹고 앞일을 대비하는 데는 달인(達人)이라 할 박정희가 고속도로다, 새마을운동이다, 중화학공업이다 뭐다 하면서 3선개헌과 10월유신으로 도전과 저항을 물리치고 독주해온 정치의 업보(業報)를 모를 리 없다.

민주화와 동반 진행된 좌경화 광기(狂氣)의 극성스런 박정희 매도는 박정희 시대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가 보기 역겨워 사뿐히 즈려 밟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혼신을 짓밟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5.16혁명 기치에 내걸었던 혼신을 쪼개고 또 쪼개어 역사 발전의 여울목에 디딤돌로 기꺼이 깔아놓을 테니 맘대로 밟고 지나가라 했다.

-자신을 아끼고 보호하고 위할줄 아는 본능은 결국 그러한 앎을 가지고 어떻게 이웃을 위해야 하는가를 실천하라는 뜻일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큰 ‘자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본능이 자신에만 머물지 않고 많은 이웃에게 적용되므로.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써만 스스로는 더욱 커진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국가를 자기와 동일시했으며 국가의 주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1988년 10월17일 박근혜 일기)


서울올림픽이 지나간 뒤 박근혜의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일기에서 그가 누군가를 형용하고자 했다면 대한민국 역사에 투신(投身)한 아버지, 영욕(榮辱)의 역사 제단(祭壇)에 자신을 희생으로 올려놓은 대통령 아버지의 모습일 것이다.

서울올림픽에서 베이징올림픽 사이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함께 가자는 서울올림픽이 가져온 국제사회의 지각변동 또한 볼 만한 것이었다.

소련이 다가오고, 퍄오정시(朴正熙) 바람이 일어난 중공은 중국으로 바뀌어 역사 감정의 골을 메우기 시작했다. 박정희 시대에 10년간 홍위병의 난동(문화대혁명)으로 역사를 크게 후퇴시킨 중국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잘사는 한국, 올림픽을 하는 한국에 오버랩되는 인물이 박정희인지라 중국 지도부가 박정희 전기를 출판해 간부들에게 읽히더니 국교 수립을 먼저 제의해 왔다.

뒤에 러시아 대통령이 된 푸틴은 지방 대학의 관리로 있던 1990년에 한국 외교관을 만나 “어린 시절 사람의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에서 살았다”면서 “한국어 책이든 외국어 책이든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책을 가리지 말고 모조리 구해 달라”고 했으며, 한국의 달라진 모습에 놀란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선 공동체의식이 흐물흐물 녹아버려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소련이 러시아로 바뀌면서 동서냉전의 벽이 무너지는 역사의 굉음이 참 요란도 했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러 베이징올림픽이 열렸다. ‘100년의 기다림’이라는 오랜 꿈을 실현하듯 중국은 세계 60억 인구를 향해 장엄한 중화민족주의 이벤트와 함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자부심을 펼쳐 보였다.

베이징올림픽을 보노라니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국 선수들이 미국과 싸우면 미국을 응원하고 일본과 싸워도 일본 편을 들면서 한국이 패하면 잘코사니하고 기뻐하는 것이 놀부 심뽀만은 아니었다.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악감정을 갖고 있는 데는 만만치 않은 이유가 도사려 있을 것이다.

올림픽으로 20년을 앞선 우리가 중국이 자존심 접고 ‘한강의 기적’을 곁눈질로 배울 때 중국으로 동남아로 돈주머니 차고 가서 거들먹거리는 게 어지간히도 눈꼴 사나웠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까부작거리다가 외환위기로 “I am F”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차려 중국이 유인 우주선을 띄우고 환호할 때 우리는 고작 청계천 뚜껑을 열고 개천에 빠져 희희낙락거렸다.

베이징올림픽을 보면서 착잡하고 우울했던 것이 중국인들의 악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에 손 잡고”를 노래하던 우리가 중국은 두고라도 우리끼리도 화합의 손을 잡기는커녕 손에 쇠파이프 들고 양초 들고, 주먹 흔들어대는 소동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20년 전 서울올림픽의 희망과 열기가 무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좌파권력에 놀아난 ‘잃어버린 10년’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오류였다. 구 공산권에서도 옛날에 폐기처분된 좌파들의 이념 투쟁을 재활용 쓰레기로 가져와 그걸 “진보”입네 “민주주의”입네 떠들어대는 시골 돌팔이 약장수만도 못한 프로파간다에 놀아나는 사이, 국력의 상승동력이 시나브로 꺼지고 경제 양극화로 민생은 골병이 들었다. 교역규모 세계 10위권이라는 허장성세를 중얼거리는 동안 중국은 무섭게 우리를 따라왔고 여러 부분에서 앞질러 가는 기세가 도도하기만 하다.

2008년은 중국의 베이징올림픽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건국 60년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문마다 건국 60년의 역사와 성과, 현실을 돌아보는 연재물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거의가 자랑스럽다는 요지의 기사들이고, 역대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박정희가 최고 지도자로 압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은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박정희 시대의 업적을 가장 자랑스러워했고, ‘가장 훌륭한 대통령’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에도 오직 박정희뿐이었다.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새삼스럽지 않고 진부한 느낌마저 든다.

현실과 역사를 넘나드는 박정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박정희는 서울올림픽을 근대화시대의 종점이자 본격 민주주의 시대의 시점으로 보았다. 그의 미래 예측은 마치 그의 혼백이 서울올림픽까지 따라붙어 미주알고주알 챙기고 닦달하면서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뒤의 20년 세월 동안 겪어본 민주주의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정치 권력의 비정상적이고 부실한 지도력이 문제였다. 걸핏하면 도로를 점령해 주먹 휘두르고 구호를 외쳐대는 파괴적 이기주의를 잠재우고, 퇴행의 역사로 가는 좌파 행렬의 뒷덜미를 잡아 돌려세워 흐트러진 국론을 수습할 지도력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박정희가 예수도 아니니 부질없는 노릇이지만, 박정희만이 단골 압도적 1위로 똑같은 결과를 반복하는 국민 여론은 “왜 박정희인가”라는 화두(話頭)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한국에 박정희 동상이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게 오늘의 한국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 공동체정신의 실종을 잠시라도 잊게 해준 것이 베이징올림픽이다. 잘 싸워준 우리 선수들이 그래서 더욱 고맙다.

이제, 올림픽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현실로 돌아오려니 답답해진다. 중국과 일본, 양쪽만 둘러봐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때에 대한민국이 국가 진운(進運)의 정체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대책없이 헤매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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