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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㊱] 그를 보낸 지 18년, 장국영의 ‘아비정전’


입력 2021.03.29 07:05 수정 2021.03.29 07:06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장국영 ⓒ영화 '아비정전' 스틸컷, 이하 디스테이션 제공 배우 장국영 ⓒ영화 '아비정전' 스틸컷, 이하 디스테이션 제공

홍콩 감독 왕가위의 영화 6편이 ‘리마스터링’ 되면서 보다 밝은 화면과 또렷한 음질로 만나게 됐다. ‘중경삼림’ ‘화양연화’ ‘해피 투게더’ ‘타락천사’ ‘2046’ ‘동사서독’에 디지털 기술의 빛이 드리웠다. 분명 이번 주 올드 무비는 이 가운데 한 편을 소개해야지 마음먹고 있었다, 리마스터링 영화들이 극장에 또 OTT 서비스 왓챠에 공개되기를 기다리면서 이미.


어떤 영화가 좋을까, 고심하던 마음은 엉뚱한 곳으로 내달렸다, ‘아비정전’(1990)을 향해. 아마도 4월 1일이 얼마 남지 않은 영향이 클 것이다. 잊을 수가 없다, 2003년 4얼 1일. 배우 장국영이 사망했단다. 해마다 즐기는 만우절 농담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진짜란다. 최고의 만우절 농담이길 바랐지만, 뉴스가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깜찍한 거짓말로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던 만우절이 빛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2003년 4월 1일 이후 더는 만우절 농담을 즐기고 싶지 않았다. 장국영의 투신 사망을 넘어서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더는 만우절에 듣고 싶지 않으니까. 어떠한 이유로도 극단적 선택을 미화해서도 옹호해서도 안 된다. 남겨진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30년 전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고, 떠난 자는 우리의 그리움과 자신의 가치를 그곳에선 알지 못한다.


서로에게 휴식이 되어 준 아비와 수리진의 행복했던 한때 ⓒ 서로에게 휴식이 되어 준 아비와 수리진의 행복했던 한때 ⓒ

첫 장면부터 마음을 뺏긴다, 처음 본 영화처럼, 마치 아비(장국영 분)를 처음 본 것처럼. 수리진(장만옥)이 일하는 축구경기장 매점의 벽시계가 내는 초침 소리가 심장을 울린다. 한 발 두 발 아비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 것만 같다, “사실 그쪽 이름을 알아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마법처럼, 수리진이 되어 아비의 손목시계를 그와 함께 지켜볼 것이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가 3시 1분으로 바뀔 때까지의 1분을, 숨도 쉬지 못하고. 아비의 숨결이 스치는 수리진의 귓전, 닿을 듯 미끄러지는 서로의 콧날이 시선을 붙든다.


왕가위 감독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면을 얄미울 정도로 ‘매혹적으로’ 연출할 줄 안다. 손님과 매점 직원으로 선을 긋고 밀어내는 수리진에게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듯, 무심하게 병 콜라만 반복해 사다가 부지불식간에 ‘1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훔쳤다. 수리진은 순간인 줄 알았던 그 1분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어느 배우가 했어도 설렐 장면이지만, 불세출의 장국영이 시간을 멈추니 보는 이의 심장마저 멈춘다.


자신은 다를 거라고 자신했지만, 아비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공허하기만 한 루루 ⓒ 자신은 다를 거라고 자신했지만, 아비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공허하기만 한 루루 ⓒ

순간과 순간의 연속으로만 사람과 관계 맺을 뿐, 결혼과 같은 지속적 미래를 생각지 않는 아비에게 상처받은 수리진이 떠난 뒤. 루루(유가령 분)를 단숨에 압도하는 아비의 방식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부자 어머니, 자신을 길러준 양어머니의 돈을 노리고 만나는 연하 애인을 찾아 나이트클럽 분장실에 간 아비. 어머니의 귀걸이를 훔친 녀석을 흠씬 패고 다시는 얼쩡거리지 말라고 엄포 놓을 때 곁에 여자가 있다.


아비가 놓고 간 귀걸이를 자신의 가방에 넣는 댄서, 다시 돌아와 귀걸이를 찾는 아비. 남자와 똑같은 꼴을 당할까 벌벌 떠는 루루에게서 귀걸이를 빼앗아 가는 아비, 다시 뒤돌아보며 귀걸이가 맘에 드느냐고 묻는다. 그렇다는 여자에게 귀걸이를 던지는데, 받아보니 한쪽뿐이다. 다른 쪽을 받고 싶다면, 집으로 가자는 아비. 애초 일부러 귀걸이를 흘리고 간 것이다.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양아치 같은 행태에 루루가 따라나서는 데 동의할 수 없겠지만, 장국영이 하니 보는 이의 마음도 훔친다.


1분이 영원한 그리움이 되어 잠들지 못하는 수리진, 그의 등을 바라보는 이름없는 남자 ⓒ 1분이 영원한 그리움이 되어 잠들지 못하는 수리진, 그의 등을 바라보는 이름없는 남자 ⓒ

아비의 연애는 이처럼 시작은 달콤하지만, 과정은 일방적이고, 결말은 처참하다. 기억나지도 않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그가 현재에서 누구와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겠는가. 늘 등만 보이는 아비에 지쳐 “다시는 오지 않겠다”며 떠난 수리진, 차가운 선언도 잠시 아비의 집을 맴돌지만 이미 그곳엔 루루가 있다. 루루는 자신이 수리진보다 강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면 바보가 되는 법. 어떻게든 헤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지만,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나고, 루루는 그런 아비를 찾아 필리핀 차이나타운을 향한다.


수리진과 루루만이 아니다. ‘아비정전’의 주인공들은 누구랄 것 없이 외롭고, 자신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의 등만 바라본다. 아비의 집 주변을 배회하던 수리진의 괴로움에 잠들지 못하는 밤을 달래주던 경찰(유덕화 분)은 반복되는 심야의 대화 속에 수리진을 마음에 담지만 수리진의 눈은 아비를 향해 있고 경찰은 그런 수리진의 등만 바라본다. 수리진이 바라보는 아비는 이미 수리진에게 등을 돌린 상황, 수리진 역시 아비의 등만 바라본다.


아비를 만나러 갔다가 루루를 보고 한눈에 반해 밤이 새도록 문 앞을 뜨지 못한 친구(장학우 분)는 루루를 사랑하지만, 루루는 집착하듯 아비만 바라보니 친구는 루루의 등밖에 볼 수 없다. 등만 바라보면서도 루루가 아비를 찾아 필리핀에 갈 여비를 마련해 준다, 아비를 찾지 못하면 내게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루루는 자신에게 등을 보인 아비를 잊지 못해 그 등이라도 보려고 이국땅을 밟는다.


홍콩의 좁은 방에서 필리핀의 녹음으로 갔지만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한 아비 ⓒ 홍콩의 좁은 방에서 필리핀의 녹음으로 갔지만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한 아비 ⓒ

두 여자의 사랑을 받은 아비라고 행복하지 않다. 아비의 눈은 기억에 없는 생모를 찾아 헤맨다. 결국, 모든 걸 버리고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만나주지조차 않는다. 카메라는 친어머니에게 외면당한 아비의 등을 계속해서, 느리게 담는다.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어머니라면 나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아비는 내레이션으로 말하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는 얼굴은 눈물범벅일 것 같고 어머니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오래 보도록 느리게 걷는 것만 같다.


내일을 기대하지 않고 오늘,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며 ‘텅 빈’ 가슴과 눈빛으로 살아온 아비. 시작점부터, 근본부터 바꿔 보려고 쉽지 않은 여행을 떠나왔지만 모든 게 원점이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뒹굴 때 그를 구한 이가 있었으니 이제는 선원이 된 경찰이다. 이름 없는 남자는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아비를 돕는다. 어찌 됐든 수리진과 관련된 인물이어서일까, 선한 사람이어서일까. 필리핀을 떠나려 위조여권을 구하러 나서는 아비. 상황은 어려워지고 아비는 아무래도 홍콩을 가기 어려울 것 같고 착한 남자는 승선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왕가위 감독은 희망을 쉬이 허락지 않는다.


아비가 웃었다, 잊을 수 없는 맘보 댄스 ⓒ 아비가 웃었다, 잊을 수 없는 맘보 댄스 ⓒ

홍콩의 중국 반환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표현한 은유를 차치하더라도 내일이 보이지 않는 청춘의 불안과 버림받은 자의 아픔, 사랑보다 깊은 이별의 상처를 덤덤히 담은 ‘아비정전’이 명작인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언제나 흐트러진 머리를 반듯이 빗어넘기고, 자비에 쿠거의 ‘마리아 엘레나’ 음악에 맞춰 맘보춤을 추는 장국영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것도 같다. 동시에, 2003년 전과 후에 이 영화를 ‘똑같이’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느낌이 다르고, 가장 괴로운 건 여기다.


“옛날에 ‘다리 없는 새’가 살았다. 이 새는 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했다. 새는 날다가 지치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이 들었다. 이 새가 땅에 몸이 닿는 날은 생애 단 하루, 죽는 날이다.”


분명 1990년대,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이 내레이션이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다리를 빼앗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청춘을 위로했다. 지금은 장국영이라는 배우의 삶이 이토록 아팠는데 팬이라는 내가 너무 몰랐던 것이 마음 아프고, 결국 어디에서도 휴식을 얻지 못한 채 땅에 몸이 닿게 했다는 안타까움으로 치닫는다. 영화 초반 내레이션을 듣고 마음 한구석에 ‘다리 없는 새’를 안고 영화를 보다, 끝에서 결국 슬픔이 차 넘치고 만다.


그리운 얼굴, 배우 장국영 ⓒ 그리운 얼굴, 배우 장국영 ⓒ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던. 하지만 새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했다, 처음부터 새는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난 전에 그랬었지, 내가 정말 사랑한 여인이 누군지 평생 모를 거라고. 지금은 그녀가 그립군.”


계속 날기만 했던 그 역시, 어디에도 가지 못했을까. 적어도 지금은 아닐 것이다, 훨훨 날아갔을 것이고, 안식할 수 있는 다리도 생겼을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영화를 사랑하고 연기를 위해 모든 걸 했던 ‘바보’, 배우 장국영이 없는 지금, 그가 그립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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