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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①] 칫솔질 76번 하는 남자 ‘스트레인저 댄 픽션’


입력 2021.02.04 12:48 수정 2021.02.04 12:48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 스틸컷 ⓒ이하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제공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 스틸컷 ⓒ이하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제공

너무 기막힌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을 때, “영화라고 해도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 믿기지 않는 일이 ‘드라마틱’ 하게 전개되면 “소설도 아니고, 이게 말이 돼?”라고 탄식한다. 영화나 소설의 ‘믿기지 않는 허구성’에 대한 인식이 바탕에 깔린 말들이다. 그런 소설보다 더 비현실적인 남자가 있다, 국세청 직원 헤롤드 크릭이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2007), 소설보다 이상한 캐릭터와 스토리에 빠져들자면, 어느 영화나 그렇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현실이고 영화 속 소설은 소설로 생각해야 한다. 영화 재미있게 보자고, 영화 좋게 평가하자고만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참 어려운 숙제, 삶과 죽음에 대해 무척 깊이 있게 절감할 수 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서야 느끼는 것보단 훨씬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이제부터 헤롤드 크릭의 기막힌 이야기는 현실이다.


‘첫 번째 캐릭터’ 헤롤드는 국세청 직원인데 직장에서만 숫자에 휩싸여 있는 게 아니라 삶 전체가 숫자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 칫솔질을 세면서 한다, 정확히 76번. 앞에서 위아래로 38번,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38번. 넥타이를 매는 횟수도 매일 같고 그 횟수는 시간 절약을 위해 4번이면 맬 수 있는 가장 효율적 방법을 선호한다. 잠자는 시간과 기상 시간, 집에서 나서는 시간과 버스를 타는 시간도 매일 ‘분 단위’로 똑같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걸음의 수도 매일 똑같고, 오르는 계단마다 마음속으로 그 수를 세고 있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동료가 묻는 어려운 곱셈 문제도 암산으로 척척 대답한다. 세무회계 일을 얼마나 잘할지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해서 동네 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했다는 철학자 칸트를 연상시키는 헤롤드의 일상. 이미 들었지만, 그 일상 스케줄 안에는 가족도 연인도 없다. 철저히 혼자다. 혼자 살고 혼자 먹고 혼자 일한다. 하지만 그는 평안해 보이고 신사적이다.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삶, 안분자족, 그의 삶엔 정말이지 부족함이 없는 걸까.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첫 번째 캐릭터, 헤롤드 크릭, 숫자 천재 국세청 직원 ⓒ 첫 번째 캐릭터, 헤롤드 크릭, 숫자 천재 국세청 직원 ⓒ

평화롭던 헤롤드의 일상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어느 날 아침부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해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칫솔질을 어떻게 하는지, 넥타이를 어떻게 하는지, 어디선가 다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헤롤드가 하는 행동을 설명하는 것인지, 목소리대로 헤롤드가 움직여지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을 만큼 동시에 일어난다. 헤롤드는 ‘당신 누구냐’고 허공에 소리도 질러 보고, 직장 동료에게 이 목소리가 들리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허사다. 길가는 사람에게도 동료에게도 많이 이상해 보일 뿐이다. 헤롤드는 느낀 시선을 수용하고 정신과를 찾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온 일을 너무 잘 알고 내가 하려는 동작을 알고 내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목소리가 나의 죽음을 말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단지 환청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헤롤드는 뭐라도 해야 했다. 우선 정신과부터 갔다.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몰이해와 약 처방뿐. 그래도 큰 도움이 된 건, 해설이 마치 책 문장 같으니 문학 전문가를 찾아가 보라며 줄스 힐버트 교수를 추천해 준 것이다.


두 번째 캐릭터, 줄스 힐버트, 문학 전문 교수 ⓒ 두 번째 캐릭터, 줄스 힐버트, 문학 전문 교수 ⓒ

헤롤드는 ‘두 번째 캐릭터’ 힐버트에게 목소리 정체의 실존을 믿는다고, 그 정체를 찾아가 나의 죽음을 거론하지 말라고 내가 죽는 것으로 말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다고 간절하게 말한다. 힐버트 교수는 처음엔 도우미를 거절하지만, 헤롤드가 들었다는 ‘그는 전혀 몰랐다’는 문장에 꽂혀 도움을 자청한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문장, 그 문장 하나로 논문도 쓴 적이 있다며 목소리가 들린다는 헤롤드 이상의 독특한 모습으로 돕는 이유를 대지만, 아마도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 수영장 봉사를 하는 심성이 매몰차게 막막한 처지의 헤롤드를 내쫓지 못했을 것이다.


힐버트는 헤롤드의 귀에 들리는 문장을 분석해 비문학 문학 가운데 문학, 문학 중에서 소설, 소설 가운데 비극 희극 중에서 희극이라고 답을 내놓으며 이런 류의 소설을 쓸 만한 현존 작가 리스트를 헤롤드에게 추천한다. 바로 그때 헤롤드는 힐버트 서가에 마치 책처럼 끼인 TV에서 내 귓속의 목소리를 듣는다. “저 목소리”라고 알리니 힐버트가 괴로워한다. 안 그래도 목소리가 혹시 천상의 누구인가, 혹시 우리네 인생은 천상의 ‘나 담당’ 작가가 쓰는 대로 펼쳐지는 것인가 엉뚱한 상상을 해온 차인데 힐버트가 괴로워하니 ‘저 작가는 죽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 같은 예감에 미리 절망하고야 마는데. “10년 전 인터뷰”라고 말한다. ‘아, 아직 살아있다는 것인가’ 절반은 안도하며 TV 속 내용을 들어보니, ‘세 번째 캐릭터’ 케이 에이펠이라는 이름의 작가는 앞으로 쓸 책 제목이 ‘죽음과 세금’이라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캐릭터 케이 에이펠, 비극 전문 작가(왼쪽). 그 곁에는 베테랑 비서 페니 에스처 ⓒ 세 번째 캐릭터 케이 에이펠, 비극 전문 작가(왼쪽). 그 곁에는 베테랑 비서 페니 에스처 ⓒ

아뿔싸, 제목부터 죽음이 나오고. 헤롤드의 인생 그대로가 작가의 스토리 발상으로 옮겨졌고, 작가가 쓰는 방향으로 헤롤드의 인생이 흐르고, 그렇게 우리는 연결돼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책이구나 깨달을 때. 힐버트가 말한다, 저 작가는 비극만 써, 주인공이 꼭 죽지, 하지만 아름다운 죽음이야. 아름다운 죽음? 이건 소설이 아니라 내 목숨이고 인생이라고! 힐버트가 좋아한다는 작가 에이펠의 연락처를 묻지만, 저 인터뷰를 한 후 10년간 잠적·은둔해 있단다. 허탕도 치고 헛수고도 하지만 목숨을 건 추적인 만큼 헤롤드는 나를 주인공으로 비극적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전화번호를 찾아낸다. 그리고 전화를 거는데.


세 번째 캐릭터 에이펠은 첫 번째 캐릭터 헤롤드가 말하는 문장 하나만 듣고도 상황을 알아챈다. 이럴 수가! 10년간 소설이 풀리지 않아 힘겨워하다 출판사가 붙여준 비서, 작가들이 마감 시간 지켜 탈고하도록 훌륭하게 관리해 내는 페니 에스처의 압박 속에 글 좀 풀리고 있었는데. 마지막 엔딩을 어떻게 할까, 정확히는 헤롤드를 어떻게 죽일까를 놓고 교통사고로 물에 빠져도 보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취재하다 욕도 듣고 그러다 드디어 아직 타이핑은 하지 않았지만 멋진 엔딩을 구상했는데! 내 소설의 주인공이기만 하리라 생각했던 헤롤드가 멀쩡히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전화를 걸었다. 작가인 나는 예정대로 헤롤드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에이펠은 최대 난관에 봉착한다.


네 번째 캐릭터, 안나 파스칼, "법보단 빵" 베이커리 까페 사장 ⓒ 네 번째 캐릭터, 안나 파스칼, "법보단 빵" 베이커리 까페 사장 ⓒ

헤롤드 인생에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고 해놓고, 두 번째 사건에 관한 얘기가 늦었다. 다행히 별다른 사건 없긴 하지만 무료하다 못해 외로운 헤롤드 인생을 흔드는 사람이 등장한다. 네 번째 캐릭터 안나 파스칼이다. 안나는 직접 빵을 굽는 베이커리 카페 사장이다. 하버드 법대에 입학했지만, 스터디 모임 친구들은 토론하고 과제를 하는 동안 자신은 친구들을 위해 과자를 굽고 더 맛있는 빵을 만들겠다고 레시피를 연구했다.


그렇게 1년, 안나는 하버드를 박차고 나와 빵집을 열었다. 복지와 평등을 위해선 얼마든지 세금을 낼 수 있으나 국민은 보살피지 않고 정쟁만 하는 정치인들 월급을 줄 순 없다는 신념 아래 세금의 70%만 낸 결과, 헤롤드가 전담으로 파견됐다. 세금은 덜 내도 자신의 가게를 찾는 노숙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나눔에는 앞장서는 멋진 사회인이다. 그래서 헤롤드가 안나를 더 좋아하게 됐겠지만, 그래서 좋아한 건 아니다. 안나는 섹시하고 헤롤드의 굳어 있던 마음에 크릭(틈새)을 만들 만큼 열정의 진동 폭이 큰 인물이다.


헤롤드와 안나, 사람은 둘일 때 더 아름답다 ⓒ 헤롤드와 안나, 사람은 둘일 때 더 아름답다 ⓒ

사실 외롭다는 건 혼자 외로울 때보다 그 외로움을 떨쳐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실감이 몰려온다. 헤롤드는 안나를 만나고 자신의 삶이 외로웠고 누군가가 있어야 했고 그 누군가가 안나임을 알았다. 제대로 연애 한 번 못 해 본 남자, 결혼하려던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뺏긴 남자 헤롤드는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는데 그 열쇠를 쥔 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서툴러서 호감이 아니라 비호감을 쌓는 만남을 거듭하던 끝에 드디어 다채로운 밀가루로 안나의 마음을 얻어 두 사람의 연애에 푸른 신호등이 켜진다. 호사다마라고는 하지만, 헤롤드에게 사랑이 시작되자마자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끼어드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힐버트 교수에게 얘기하듯 안나에게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함께 죽음을 준비해 가는 게 사랑일까.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지만 헤롤드의 선택은 다른 길이었다. 그는 안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안나가 신념 대로 살되 탈세로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통해 도움을 주고 생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갔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힘, 감독 마크 포스터와 배우 윌 페렐(오른쪽부터) ⓒ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힘, 감독 마크 포스터와 배우 윌 페렐(오른쪽부터) ⓒ

첫 번째 캐릭터 헤롤드 크릭이 세 번째 캐릭터 케이 에이펠을 만나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알게 된 이후의 얘기는 생략하겠다. 끝까지 몸부림도 아니고 순순한 수긍도 아닌 선택은 영화를 통해 보는 게 좋다.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결말이자, 영화 속 소설 ‘죽음과 세금’의 결말을 두고 ‘맞아, 이게 맞아!’라고 공감하는 이도 있고 ‘아, 힐버트 교수 말대로 걸작일 뻔했다가 괜찮은 작품이 되고 말았네’라고 아쉬워하는 이도 있다. 당신의 판단이 중요하다.


의미 있는 죽음과 평범한 일상 중에 어느 게 낫냐고 물으면 후자라고 말하던 우리도 막상 이 영화가 풀어놓은 이야기 속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 적어도 즉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푸는 힘의 결과다. 그리고 다시 후자의 선택을 하더라도, 그냥 말로 질문받고 답했을 때와는 다른, 좀 더 묵직하게 후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힘이다. 이 힘은 연출을 맡은 마크 포스터 감독, 우직하고 정감 가는 숫자 천재 헤롤드 크릭을 연기한 윌 페렐, 뻣뻣하면서 따뜻한 줄스 힐버트를 만든 더스틴 호프만,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가 케이 에이펠의 고뇌를 생생히 표현한 엠마 톰슨과 작품의 산고를 함께하는 비서의 중요함을 보여준 퀸 라티파, 너무나 사랑스러운 안나 파스칼을 그려낸 매기 질렌할 등의 배우 그리고 제작진에게서 나온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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