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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⑰] 거장의 유작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입력 2020.11.09 00:00 수정 2020.11.26 09:36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포스터 ⓒ이하 ㈜영화사 조제 제공 영화 포스터 ⓒ이하 ㈜영화사 조제 제공

삶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삶이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지 않은 존재에게 죽음은 없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관한 사유는 삶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닿는다.


명감독들의 전성기 시절 영화도 좋아하지만, 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의 작품들을 사랑한다. 루게릭병으로 죽음을 앞둔 교수를 제자가 매주 화요일 찾아가 14번을 함께한 인생 수업을 담은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을 때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어서다. ‘올드무비’ 코너를 통해 꼭 얘기해야지 마음을 먹고 있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 그리고 오늘 얘기할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등등이 그렇다.


사실 제목을 ‘[홍종선의 올드무비]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달아놓고 시작한 글이었다. 그런데 불과 두 문단을 쓰기도 전에 다른 영화로 바꾸었다. 세 번째 문단을 쓰며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느 감독을, 어느 영화를 더 좋아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거장의 작품들이 오르지 못할 태산으로 느껴질 만큼 존경하고 존중해서다. 사랑하면 상대나 대상이 크게 보이지 않는가. 하물며 그들이 생의 마지막 즈음에 남긴 영화들이다 보니, 소개하려 마음먹는 일부터가 쉽지 않고 우왕좌왕이다.


극작가 앙뜨완의 부음으로 시작하는 영화 ⓒ 극작가 앙뜨완의 부음으로 시작하는 영화 ⓒ

솔직히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쓸 자신이 없다. 그러함에도 쓰려 하는 건 일상에 매몰되고, 나의 관점에 매몰되어 내가 지금 인생의 어디쯤을 어떤 태도로 살고 있는지를 잊기 쉬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 생각할 시간을 주는 ‘쉼표’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마 최근 영화 ‘내가 죽던 날’을 본 영향도 있겠다. 그 영화 역시 우리가 상처투성이 일상을 살면서 잊어버리기 쉬운 ‘나’와 인생의 방향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유명 극작가 앙뜨완의 부음으로 시작한다. 부고를 받은 배우들이 하나둘, 고지대의 저택을 찾는다. 앙뜨완이 쓴 연극 ‘에우리디스’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 역으로 출연했던 두 쌍의 배우들 그리고 오르페우스 어머니와 아버지 역이었던 배우들, 죽음을 상징하는 무슈 앙리를 맡았던 배우 등이다.


영화는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가 그리스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연극 ‘에우리디스’, 그리고 ‘사랑하는 앙뜨완’을 원작으로 한다. 알랭 레네 감독은 스무 살 젊은 시절 ‘에우리디스’를 보고 압도됐고, 70년이 지나 90세의 나이에 영화화했다. 영화에서 1세대 에우리디스 역을 맡은 사빈느 아젬마, 오르페우스 어머니 역의 아니 뒤프레, 1세대 오르페우스 역의 삐에르 아르디티는 실제로 장 아누이의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이고, 특히 2세대 오르페우스 역의 램버트 윌슨은 이 영화의 원작인 ‘에우리디스’에 출연했다.


앞줄 왼쪽부터 램버트 윌슨, 앤 콘시니(극중 2세대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스를 맡았던 배우들 역), 마티유 아말릭(무슈 앙리로 출연한 배우 역), 사빈느 아젬마, 삐에르 아르디티(1세대 에우리디스, 오르페우스였던 배우 역) ⓒ 앞줄 왼쪽부터 램버트 윌슨, 앤 콘시니(극중 2세대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스를 맡았던 배우들 역), 마티유 아말릭(무슈 앙리로 출연한 배우 역), 사빈느 아젬마, 삐에르 아르디티(1세대 에우리디스, 오르페우스였던 배우 역) ⓒ

부음을 듣고 찾아온 13명의 배우를 맞이한 집사는 영상을 보여준다. 앙뜨완이 생전에 남긴 메시지와 감사 인사, 그리고 부탁이 재생된다. 부탁의 내용은, 젊은 창작자 집단 ‘콤파니 드 라 콜롬보’ 단원들이 새롭게 해석한 ‘에우리디스’ 데모 영상을 보고 평가해 달라는 것이다. 처음엔 관객이 되어 영상을 보던 배우들은 자신이 맡았던 대사가 생각난 듯, 마치 다음 대사를 조금 미리 알려주듯 읊조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서 혹은 자리를 바꿔 앉아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춰 연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연기가 어느 순간, 마치 과거의 그때로 돌아간 듯 혹은 기억 속에서 해당 장면을 끄집어낸 듯 제3의 공간에서 실연이 이루어진다. 조금 더 나이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의 공간, 조금 더 창창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의 공간, 그리고 두 공간을 오가는 죽음의 무슈 앙리.


데모 영상 안과 밖, 현재와 과거,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허물어지는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그려낸 알랭 레네 감독의 실험적 표현들이 황홀하다. 영상 안과 밖, 현실과 기억, 현재와 과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를 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영상 안 퍼포먼스 단원들과 영상을 보던 배우들, 영화 안 그들과 영화 밖 우리,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가. 모두가 진짜이고 다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게 인생이라고 알랭 레네가 말하는 것만 같다.


인간의 깨달음이 신화가 되고, 신화가 연극이 되고, 연극이 영화가 되고, 영화는 우리에게 와 깨달음의 순간을 선물한다. 그렇게 순환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예술은 끝없이 소통하고, 영화는 인류 역사의 일부가 된다. 철학자 질 들뢰즈가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영화감독’이라고 부른 알랭 레네답게, 평생을 영화에 바친 거장은 영화의 예술적 지위를 분명히 하는 작품을 생애 끝에 남겼다. 영화의 정치, 영화의 바른 자리는 예술임을 일깨운다. 함께 프랑스영화에 새 장(누벨바그)을 연 장 뤽 고다르 감독이 ‘무(無)에서 영화 테크닉의 신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라고 평한 감독답게 신선한 실험으로 가득한 영화를 완성했다. 내용과 형식 면에서 두루 예술적이다.


과거 연기했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 감정에 빠져든 배우들 ⓒ 과거 연기했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 감정에 빠져든 배우들 ⓒ

영화에 관한 얘기를 이어가기 위해 잠깐 신화를 상기하자면. 아폴론의 아들이자 뛰어난 시인이자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더없이 사랑했다. 에우리디케는 양치기의 추근거림을 피해 도망치다 뱀에 발목을 물려 죽었다. 오르페우스는 죽음의 세계에서 아내를 찾아오겠다고 결심하고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뱀 같은 머리칼을 한 머리가 세 개 달린 문지기 개 케르베로스를 비롯해 괴물과 망령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잠재우고 마침내 하데스와 왕비 페르세포네의 마음마저 노래로 얻은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부활을 약속받는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붙었으니, 지상에 올라갈 때까지는 되돌아보지 말 것. 좁고 어두운 길을 오르페우스가 앞장서고 에우리디케가 뒤에 서서 한마디 말도 없이 잘 올랐는데. 지상에 먼저 올라온 오르페우스는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내의 몸이 아직 반은 지하에 있었다. 그대로 추락해 버린 에우리디케. 오르페우스는 다시 한번 지하세계로 가고자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한다. 슬픔을 노래하는 오르페우스에게 숱한 아가씨들이 반하지만, 거절을 거듭하던 오르페우스는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죽어서 명부로 간 오르페우스는 아내와 재회한다.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 앙뜨완은 오르페우스다. 앙뜨완의 집에 배우들이 들어설 때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의 음악이 들린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음악을 통해 지하세계의 관문을 통과했듯이. 다만 앙뜨완의 집은 지하가 아닌 고지대에 있다, 배우들이 들어서는 곳이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장소임을 명확히 하듯이. 스포일러라 상세히 말할 수 없지만, 앙뜨완은 극 중 두 번 죽는다.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구하러 지하세계에 간 것은 말하자면 죽은 것이고, 다시 비참한 주검이 되니 그 또한 두 번 죽었다. 오르페우스는 첫 번째 죽음으로 아내를 되살렸다, 앙뜨완은 첫 번째 죽음으로 자신과 연극 ‘에우리디스’가 출연 배우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실감한다. 오르페우스는 두 번째 죽음으로 아내와의 영원을, 앙뜨완은 두 번째 죽음으로 영원히 기억될 작품 ‘에우리디스’를 얻는다. 영화는 ‘현대인의 신화’라는 사실을 알랭 레네는 웅변한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디렉팅 중인 알랭 레네(맨 오른쪽) ⓒ 영화 촬영현장에서 디렉팅 중인 알랭 레네(맨 오른쪽) ⓒ

‘왓챠’에서 이 영화를 본 정민지 씨가 소감 대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했다. 아래 인용문의 일부였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관람평으로 매우 적절한 인용이어서 곱씹는다.


“많은 필름메이커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있다. 실제 일상에서는 다양한 호기심을 갖고 이웃의 창문을 들여다보고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들던 사람들이 영화관에 들어오면 그저 모든 것이 스크린 위에 설명되기만 기다리는 나태한 상태에 빠진다. 영화가 보내는 사인(시그널, 신호)을 합쳐 언어와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 시작 전에는 로비에서 잡지의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면서 머리를 쓰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얼굴을 하는 영화를 난 만들고 싶지 않다.


내 영화 같은 유형의 영화는 관객에게 스스로 세계를 지어 올릴 가능성을 준다. 큰 항아리에 물이 담겨 있고 관객은 각자의 잔을 들고 와 자신의 물을 떠 가는 거다. 관객은 영화에 깊이를 더해 줄 수도 있고 영화가 보여주는 바다에서 헤엄을 칠 수도 있다. 모두 각자 다른 영화를 본다. 시네마는 제7의 예술인 만큼 가장 완전하고 창의적인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영화는 스토리텔링에 경도됐고 그로 말미암아 소설에 패배했다. 왜냐하면, 오히려 소설의 독자는 스스로 로케이션을 상상하고 인물을 캐스팅해서 강력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가장 진보된 예술이어야 하는 시네마가 소설에 뒤처져 있다.”


영화를 볼 때, 영화가 모든 것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혹시 생각하는 나라면, 스토리 전개에 빈틈이 없고 관객이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라면, 그래서 모두가 똑같이 좋다고 느껴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나라면,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보자. 영화가 결코 그럴 필요 없고, 아니 그렇지 않았을 때, 모호하고 좀 어려운 듯도 하고 그러나 아름다운 건 분명할 때 얼마나 충일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내 머릿속에 영화 제목이 붙은 새로운 집을 한 채 지어 올리는 즐거움,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를 얻은 기쁨을 맛볼 것이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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