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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먹여 살린 망자에 대한 예의


입력 2020.10.28 08:30 수정 2020.10.28 08:25        데스크 (desk@dailian.co.kr)

대통령은 나라의 제일가는 기업인 별세에도 조문하지 않았다

진보좌파 정치인들, 추도문과 부고문 구별하는 공부부터 해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년 사진.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년 사진. ⓒ삼성전자 제공

1980년대 초 어느 늦은 가을날 주말이었다.


대학 졸업반이던 필자는 서울 남산 기슭의 동국대 시험장으로 갔다. 삼성그룹 입사 필기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군대를 아직 갖다 오지 않은 미필자(未畢者) 신분이라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지만, 태평로의 세련된 고층 빌딩 본사에서 일하게 된다면 참 좋겠다는 소박한 선망(羨望)은 있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영어를 포함한 다른 과목들(대학입시 같은 일반 과목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이 꽤 어려웠는데, 준비도 철저히 하지 않았고 미필자를 뽑아 주겠나 하는 반신반의(半信半疑) 자세였기 때문에 붙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보니 미필자인 친구들 중에 합격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중에는 호남 출신도 포함돼 있었다.


필자는 그 시험 경험을 통해, 삼성은 성적을 가장 우선해서 본다, 그 성적이란 것도 영어뿐만 아니라 일반교양 분야들을 두루 살펴본다, 출신 지역은 별로 관계가 없다(당시에는 삼성의 기반인 영남 출신들을 선호하고 호남은 기피한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삼성을 달리 보게 됐다.


이때는 선대 회장 이병철이 살아 있을 때였다. 삼성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받은 그의 3남 이건희는 그 빛나는 삼성 공채 전통을 시대정신에 맞춰 더 발전시켰다. 학력을 보지 않고 남녀를 불문(不問)했다. 현재 삼성에 다니는 한국사람 인구는 20만명 이상이다. 대한민국 최대의 자이언트 고용 기업이며 하이 퀼리티 직장으로서 신분 상승을 보증하는 기능도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무원 시험이 현대판 과거(科擧)라면 삼성 시험은 민간 취업 시장의 과거가 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가정을 일구며 나라를 위해 일하는 좋은 직장을 갖게 하는, 그야말로 부친 이병철의 신념인 사업보국(事業報國, 삼성이 한 개인이나 가족의 차원을 넘은 국민적 기업이며,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업이라야 한다는 것) 정신을 실천하는 인재 채용 방식으로 정착됐다.


지난 수십 년간 해외에서 코리아는 몰라도 쌤~썽(Samsung)은 알았다. 지금은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직도 노스 코리아냐, 사우스 코리아냐라고 물어보는 이들이 태반이다. 코리아 대통령 이름 문재인은 몰라도 삼성 스마트폰 이름과 제조국 이름은 안다.


2018년 기준 삼성의 매출액은 약 400조원이다. 이건희가 1987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당시는 10조원에 불과했다. 이를 약 40배 늘려 놓은 것이다. 이익은 72조원으로 약 250배 증가했다.(이 모든 것이 이건희 혼자 이룬 업적은 아니고 몸 바쳐서 뛴 임원들과 일반 사원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리더의 정신과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같은 해 한국의 GDP가 1.6조 달러이므로 지금 환율로 약 1800조원이니 400조원을 해낸 삼성이 담당한 몫은 22%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안다. 한 기업이 나라 생산의 1/4에 가까운, 이토록 거대한 부분을 맡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불합리와 편법(아마 불법도), 폐해 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裏面), 긍정적인 부분을 우리는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왜? 대한민국이 삼성 때문에 먹고 살 수 있게 됐고, 삼성 때문에 경제 선진국(세계 10위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중학생들도 외우고 있을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한 이건희의 선견지명 통찰력, 혁신 의지가 있었기에 삼성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세계적 기업으로 클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삼성 제품은 해외 선진국들에서 겉만 번드르르 하고 값싼, 현재의 Made in China 제품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것을 일류 브랜드로 만들어야 살아남고, 그런 제품을 남기고 가야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이건희의 철학이 바꿔 놓은 것이다. TV에서 난공불락(難功不落) 같기만 하던 SONY를 무너뜨리고 스마트폰과 반도체에서 정상급에 올랐다.


이런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이병철의 아들이어서 (자동으로 경영권을 승계해) 그런 위업을 이룬 게 아니고 비범한 경영인 이건희여서 가능했던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한국의 진보 좌파들은 이념적으로 재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기여를 무시해야 진보적이고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번 상중에도 망자(亡者)의 흠결을 지적하는 결례와 무지를 드러냈다.


세상을 떠난 이에게 바치는 율로지(Eulogy, 추도문)는 그가 남기고 간 기념할만한 일, 유쾌한 추억들을 유족, 지인들과 함께 나누는 글이며 오비츄어리(Obituary, 부고문, 사망 기사)는 사망자의 공과(功過)를 기술하는 미니 전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이건희 별세에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해 추도의 말을 드려야 할 때 사망자의 음과 양을 굳이 드러내는 부고(訃告) 기사를 써 그들의 공부 부족과 협량(狹量)을 스스로 고발했다.


집권 민주당 대표 이낙연은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 강화, 노조 불인정 등 ‘부정적 영향을 끼치셨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삼성은 과거의 잘못된 고리를 끊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고언까지 아끼지 않았다. 이낙연은 돈을 버는 직장 생활을 거의 해보지 않은 다른 운동권 출신 진보 좌파 핵심 인사들과 달리 서울법대 졸업 후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한 ‘직장인’ 출신이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그 시대 언론사들은 구독료보다는 재벌들을 비롯한 기업의 광고 수입이 회사 운영비용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했다. 삼성이 없었다면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 이낙연도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잠재적 대선 경쟁자인 경기도지사 이재명은 확실히 이낙연보다는 한 수 위 감각을 보인다. 그는 빈소를 직접 찾아 ‘한 시대의 별이신데, 명복을 빈다’고 기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현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기업들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기회가 공평하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경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고인의 넋을 기리는 일이자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과제일 것”이라고 적었다. 검찰 수사 등으로 아들 이재용에게 경영권 이양이 순탄하게 완료되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눈을 감은 이건희가 하늘나라로 가는 도중 이 말을 들었다면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은, 재계의 큰 별이자 이 나라 현대사를 이끈 최고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될 이건희의 죽음에 대통령 문재인은 직접 예를 표하는 일은 (예상대로) 생략했다. 그의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의 결정적 약점이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안 해 버린다. 반면 안 해도 될 일은 하고 그것이 또 감성적 또는 감상적인 톤으로 홍보돼 다수 국민들로부터 별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발생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삼성 이건희 빈소에 가지 않는다면(장례식은 가족장이니 못 간다 치더라도) 나라에 누가 죽어야 그가 갈 것이란 말인가?


ⓒ

글/정기수 자유기고가(ksjung7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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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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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슛돌이 2020.10.28  09:05
    전 삼성과 1도 관련이 없는 중견기업 직원으로서 제 기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년전 일본으로 해외 출장을 갔었습니다. 몸담고 있는 회사가 Global 기업이어서 전세계 지사장 또는 담당자들이 모여 얘기하다가 삼성 얘기가 나왔었는데....결론은 수많은 일본기업 도시바, 히다치, 파나소닉, 나쇼날, 소니 등등등 80년대 전세계를 주름잡던 일본기업들 거의 전부가 힘잃고 시들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Samsung 때문이다 였습니다. 일본인들이었지만 질시와 미움이 아닌 진심에서 나온 엄지척을 보여주었습니다. 거짓없는 fact 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전세계 어딜가도 한국 질문 다음은 Samsung 이었구요... 모든 인간에게 공과가 있겠지만 적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근대사에 이렇게 기여한 인물이 있었을까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존경합니다.  천국에서 편안한 휴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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