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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⑨] 가스라이팅의 시작, ‘가스등’


입력 2020.09.04 14:53 수정 2020.09.04 14:54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조지 큐커 연출,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1944년 영화

가스라이팅을 소재로한 영화 '가스등' ⓒ출처=네이버 블로그 minbyulhee 가스라이팅을 소재로한 영화 '가스등' ⓒ출처=네이버 블로그 minbyul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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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목에 등장한 가스라이팅의 몇 가지 예다. 자신을 가스라이팅 한 유명 유튜버, 정치인에게 피해를 봤다고 호소하는 여성들도 있다. “확진이라고 속여 우리를 감금하려 한다”, 믿기 어려운 주장이 이구동성으로 여러 사람에게서 나오기도 한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가스라이트 이펙트(Gaslight Effect), 가스등 효과는 1938년 패드릭 해밀턴이 연출한 영국 연극 ‘가스등(Gaslight)’에 기원을 둔다. 1940년 영국에서 먼저 영화화됐고,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1944년 작 동명의 영화를 통해 대중화됐다.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현실감각과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심리적 학대’ 행위다.


그레고리를 통해 행복을 꿈꾸는 폴라 ⓒ출처=네이버 영화 '가스등' 그레고리를 통해 행복을 꿈꾸는 폴라 ⓒ출처=네이버 영화 '가스등'

1944년에 만들어진 ‘가스등’ 영화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한 폴라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음악선생으로부터 성악 지도를 받고 있다. 자신의 이모 앨리스를 세계적 오페라 가수로 키웠던 스승이다. 한 살 때 어머니를 잃은 폴라에게 이모는 엄마이자 친구였는데 10년 전 영국에서 살해당했다. 이모의 유산을 모두 상속받아 부유하지만, 기구한 자신의 운명에 늘 서글픈 폴라이다. 그런 폴라에게 유독히 친절한 이가 있었으니 성악 교습 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레고리(샤를르 보와이에 분)이다. 연로한 선생님은 반주자와 제자의 밀애를 모른 채, 이모와 달리 노래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이 딴 데 있다고 말하고 폴라는 맞는 말씀이라며 성악을 그만두겠노라 선언한다.


폴라에게 결혼을 재촉하는 그레고리, 홀로 호수 여행을 다녀와 답을 주겠다는 폴라. 하지만 폴라가 목적지 기차역에 내린 순간 그레고리가 기다리고 있다. 호숫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신접살림을 차릴 곳에 관해 얘기 나누는데. 폴라는 프랑스에 살고 싶은데, 그레고리는 영국 런던에서 끝내 성공하지 못했던 아픈 시절을 얘기하며 런던을 희망한다. 이모가 끔찍한 죽음을 맞은 곳이기에 다시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런던이지만 폴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쏜튼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집이 있다며 그것을 당신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한다. 아픔의 장소로 돌아온 폴라, 이모의 모든 물건을 다락방에 넣고 문을 봉쇄하는 그레고리.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그림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놀라는 폴라 ⓒ출처=네이버 블로그 arouse1 그림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놀라는 폴라 ⓒ출처=네이버 블로그 arouse1

그레고리는 이웃의 방문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집안일을 돕는 요리사, 가정부에게 마님이 아프다며 외출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고 세상 사람과 얘기를 나눠야 해요”, 남편에게 불만인 폴라. 그레고리는 런던탑 나들이를 제안하고 폴라에게 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것이라며 브러치를 선물하고 자신의 손으로 폴라의 핸드백에 넣어 준다. 당신은 뭘 잘 잃어버리니까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남편에 대한 서운함을 잊고 나들이에 나선 폴라. 런던탑 안에서 땀을 닦다 브로치가 없는 것을 알아챈 폴라는 안절부절,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에 해설사의 설명에 집중할 수가 없다. 몸이 좋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가자는 폴라, 귀가해 브로치를 찾는 남편에게 분실을 고하고 마는데. 이로써 폴라는 뭔가를 잘 분실하는 사람, 바깥 외출이 어려울 만큼 몸이 아픈 사람이라는 남편의 말을 입증한 결과가 된다. 그레고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반지가 없어졌다, 그림이 떼어졌다 등의 빌미를 만들어 하인들 앞에서 폴라를 망신 주고 폴라에게 문제가 있음을 기정사실 화한다. 여기까지가 가스라이팅 1단계. 이제 폴라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나에게 정말 문제가 있나?’ 스스로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가스라이팅 2단계가 시작된 것.


가정부 낸시 앞에서 무시 당하는 폴라 ⓒ출처=네이버 블로그 minbyulhee 가정부 낸시 앞에서 무시 당하는 폴라 ⓒ출처=네이버 블로그 minbyulhee

그레고리의 이러한 작업은 하인들에 대한 가스라이팅 효과도 가능케 했다. 마님은 아프며 그의 기억과 판단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 앞에서 윽박과 트집을 당하는 폴라를 은근 무시하는 마음이 들도록 한 것이다. 특히 새로 들인 젊은 가정부 낸시에게는 심화 가스라이팅이 진행되는데, 폴라 앞에서 더 예쁘다고 추켜세우며 마님에게 화장법을 알려주라고 말하는가 하면, ‘가정부로 끝나기엔 아까운 인물’이라며 묘하게 차기 마님이라도 될 것 같은 희망을 부추긴다.


밤이 되면 사라지는 그레고리 ⓒ출처=네이버 블로그 iyou718 밤이 되면 사라지는 그레고리 ⓒ출처=네이버 블로그 iyou718

그레고리는 집에서는 작곡일이 불가능하다면서 밤이 되면 작업실에 간다며 집을 나선다. 남편이 나가고 나면 잠시 뒤 집안의 가스등 불 크기가 작아진다. 1940년대 당시에는 집안의 다른 곳에서 가스등을 켜면 불 크기가 작아졌다는데. 폴라가 하인에게 ‘누가 집안 다른 곳에 가스등을 켰느냐’고 묻지만 돌아오는 건 ‘아니다’라는 답뿐이다. 다른 곳에 불을 켜지도 않았다는데 흐려지는 불빛, 그리고 연이어 천장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하인들과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폴라는 내게 환영, 환청까지 생겼나 싶어 더욱 괴로움에 빠진다. 가스라이팅 2단계의 완성이다.


가스등이 졸아드는 공포 ⓒ출처=네이버 블로그 iyou718 가스등이 졸아드는 공포 ⓒ출처=네이버 블로그 iyou718

당연히 환영, 환청이 아니었다. 집을 나선 그레고리가 안개 자욱한 런던의 밤거리를 돌아 뒷집 지붕으로 해서 다락방으로 돌아왔던 거다. 폴라가 환영, 환청으로 착각하게 해 정신을 교란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레고리에게는 찾는 게 있었다. 10년 전 이모가 살해당하던 날에도, 그 조카를 유혹해 결혼하고 이모의 집으로 들어온 지금도 목적은 하나였다. 바로 유명 가수 앨리스가 보유하고 있던 천문학적 가치의 보석을 훔치려는 것이다. 쥐새끼 마냥 밤다마 먼지를 뒤집어쓰고 뒤지건만 손에 잡히지 않는 보석, 그레고리는 마음 놓고 대낮에 찾기 위해 가스라이팅 3단계를 시작하는데. 바로 폴라의 DNA, 가족력을 흔드는 것이다.


그레고리는 폴라에게 너만 몰랐던 진실이라며 ‘당신의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너의 어머니가 생전에 했던 말이 말달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고 거짓말한다. 어머니에 관한 놀라운 얘기를 듣는 것으로도 충격인데, 폴라는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남편 말에 세뇌돼 더욱 심신이 쇠약해지고. 자신도 어머니처럼 이 집에서 쫓겨나 정신병원에 감금되리라 불안에 떨지만, 남편에 의해 집안에 감금된 폴라의 눈에는 자신을 믿어 줄 사람도 도움을 청할 이도 없다.


앨리스 광팬이었던 브라이언의 등장 ⓒ출처=네이버 블로그 iyou718 앨리스 광팬이었던 브라이언의 등장 ⓒ출처=네이버 블로그 iyou718

한 명 있었다. 런던 경시청장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브라이언 경위(조셉 거튼 분). 런던탑에서 황망히 집으로 돌아가는 폴라를 보고, 앨리스를 빼닮은 외모에 놀란 브라이언. 경찰의 촉으로 폴라에게서 불안감을 본 브라이언은 친분 있는 순찰 경찰을 폴라 집 구역에 배치시켜 주변을 살피게 하는데. 경찰은 낸시와 데이트를 하며 철저히 폐쇄된 집안 얘기를 듣고 브라이언에게 전한다. 브라이언 집안에서 열린 조용한 연주회에서 소리를 지르는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폴라를 보며 이제는 자신이 움직여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감지한다.


그레고리가 또다시 집을 나선 밤, 브라이언은 폴라를 만나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마음이 급해진 브라이언, 열두 살 광팬 시절에 앨리스로부터 직접 받은 장갑 한 짝을 가져와 보여주자 폴라는 나머지 한 짝을 보여주며 마음의 고삐를 조금 늦춘다. 작아지는 가스등 불이 환청이 아님을 확인해 주는 브라이언을 보며 갑갑했던 마음에서 해방구를 찾는 폴라. 과연 브라이언은 가스라이팅 당해 심리적 학대를 받고 유산을 갈취당할 위기에 놓인 폴라를 구해낼 수 있을까. 10년 전 놓친 앨리스 살해범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폴라 스스로가 그레고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흑백영화의 아름다움 ⓒ출처=네이버 블로그 minbyulhee 흑백영화의 아름다움 ⓒ출처=네이버 블로그 minbyulhee

‘가스등’은 흑백영화다. 1944년이 아니라 2020년에 만든다 해도 흑백이 진리라 할 수 있을 만큼 집요한 압박과 협박, 그로 인한 갈등과 고통이 빚어내는 심리적 긴장 표현에 제격이다. 할리우드 누아르(검다는 뜻의 프랑스어) 초기 영화라 흑백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18~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공포와 로맨스가 결합된 고딕 문학이 프랑스로 건너와 ‘로망 누아르’로 불리고, 프랑스에서 발전한 누아르 영화가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가 제2차 세계대전의 여진 속에서 필름 누아르를 형성했다. 처음엔 탐정소설을 유럽에서 건너온 영화 인력들이 스크린으로 옮겼고 이후 갱스터 무비로 발달하면서 폭력성이 좀 더 짙어졌다.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출처=네이버 영화 '가스등'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출처=네이버 영화 '가스등'

영화 ‘가스등’에서 단연 빛나는 것은 잉그리드 버그만이다. 불행하기만 했다가 한 남자를 만나 행복을 느끼고, 사랑인 줄 알았는데 자신을 가두는 남편에게 반발하고, 여린 마음을 파고드는 그레고리의 치밀한 가스라이팅에 자신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스스로 의심하며 스러져가는 폴라의 변화무쌍한 감정과 혼돈을 탁월하게 연기했다. 스웨덴 왕립 연극영화학과에서 수학, 탄탄한 연기력을 지녔고 조각상을 옮겨 놓은 듯 완벽하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에게 할리우드가 러브콜을 보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온 잉그리드 버그만은 ‘가스등’으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제1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샤를르 보와이에), 여우조연상(낸시 역, 안젤라 랜즈베리),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이 후보에 올랐는데 수상의 기쁨을 안은 건 여우주연상과 미술상이었다.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가스등'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가스등'

시대를 앞서간 조지 큐커 감독의 연출력이 명작 탄생의 일등 공신이다. 1891년생, 19세기에 태어난 그가 20세기 중반에 만든 영화라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2층 방에서 다투는 폴라와 그레고리, 두 사람은 보여주지 않고 방문에 비친 폴라의 그림자와 방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 보이는 상황, 그것을 난간 아래 1층에서 응시하는 듯 촬영한 장면은 미장센의 백미다. 성적 소수자로 알려진 큐커 감독은 여자 배우의 과감한 기용과 재능 발굴에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주디 갈랜드의 ‘스타탄생’을 비롯해 오드리 헵번과 함께한 ‘마이 페어 레이디’, 마릴린 먼로 주연의 ‘사랑을 합시다’, 소피아 로렌의 ‘헬러 인 핑크 타이즈’, 제인 폰다·에바 가드너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출연한 ‘파랑새’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가스등’에 대서양 건너 잉그리드 버그만을 캐스팅한 것도 그중 하나다. 아카데미 트로피는 받지 못했지만, 낸시 역을 맡은 안젤라 랜즈베리를 발굴한 것도 큐커 감독이다. 미국 드라마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주인공, 랜즈베리의 데뷔작이 ‘가스등’이다.


최근 장 뤽 고다르의 1965년작 ‘미치광이 피에로’를 ‘올드무비’ 코너에 소개하기 위해 다시 보면서 현시대 영화는 여기서 얼마큼 더 나아간 걸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보다 21년 앞선 ‘가스등’을 보며 더 굳어졌다. 시대를 앞서간 수작은 시간을 초월해 유효하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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