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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국회 출범 ②]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있다'…야당 없이 35조 추경 '뚝딱'


입력 2020.06.30 00:15 수정 2020.06.30 05:59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소위 구성 않고 여당끼리 전체회의…추경 의결

정부원안 통과, 되레 증액…예상된 '막장심사'

"35조를 일주일만에? 국회가 통법부·거수기냐"

정세균 국무총리가 29일 오후 미래통합당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3차 추경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정세균 국무총리가 29일 오후 미래통합당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3차 추경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국회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더불어민주당이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국회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해 대한민국의 시계를 절차적 민주주의 이전으로 되돌린데 이어, 1972년 유신시대 이래 최초인 한 해 '3차 추경'을 야당의 존재를 배제한 채 통과시키기에 나섰다.


예산안 심의는 국회의 본질적인 기능이라는 점에서 상임위 예산소위를 거치기는 커녕 소위 구성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체회의를 열어 예산안을 정부 원안대로 통과시키기에만 급급한 여당의 행태는 국회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당은 29일 오후 여당 의원들만으로 단독 개회한 본회의에서 지난 15일 선출한 6개 상임위원장에 이어, 정보위원장을 제외한 잔여 11개 상임위원장을 모두 독식했다.


이렇게 뽑힌 여당 소속 상임위원장들은 선출 당일 바로 각 상임위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35조 원 규모의 3차 추가경정예산안을 문재인 대통령이 '하명(下命)'한 시한 내에 통과시키기 위해 범여권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전체회의 의결을 강행한 것이다.


상임위원장이 새로 선출되면 먼저 여야 교섭단체 간사를 선임한다. 이후 위원장과 간사의 협의 아래 법안소위·예산소위·청원소위 등 소위원회를 구성한다. 소위원장이 예산소위 회의를 소집해 상임위 관련 예산안의 합의를 이루면, 전체회의에 상정해서 예결위로 넘기는 게 순서다. 이후 예결위 예산소위를 거쳐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의결되면 비로소 본회의에서 의결하는 수순을 밟는다.


당연히 해야할 상임위 예산소위 구성조차 하지 않고 전체회의에서 예산안을 바로 의결한다는 것은 국회에서 거쳐야할 최소한의 절차조차 무시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통합당 관계자는 "여당이 군사작전 하듯 추경안 의결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이제는 최소한의 눈치조차 보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규탄했다.


이날 범여권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각 상임위 전체회의에서의 추경 예산안 심사는 예상대로 '막장 심사'의 향연이었다는 분석이다.


산중위에서는 무려 2조3100억 원의 예산을 증액 의결했으며, 교육위에서도 2718억 원의 예산을 증액했다. 범여권 의원들이 증액을 의결하는 가운데, 참석한 유은혜 교육부총리가 증액에 "동의한다"고 밝히는 등 정부와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의 유착이 '짜고치는 고스톱'을 방불케 했다는 관측이다.


법사위에서는 권성동 무소속 의원이 4연속 당선되며 민주당이 차지하는데 실패한 지역구인 강원 강릉의 교도소 관련 예산 4000만 원만 감액한 채, 대법원·헌법재판소·감사원·법제처 예산은 정부에서 보내온 원안대로 그대로 의결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정무위와 행안위, 운영위에서도 추경안이 속전속결식으로 의결됐다. 특히 운영위에서는 이날 '독식 국회' 출범에 따라 사실상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한 국회의 위상을 보여주듯, 국회 예산은 무려 73억5000만 원이나 삭감된 반면 청와대 비서실·국가안보실 예산은 25억3400만 원을 깎는데 그쳤다. 범여권 의원들이 감히 '상급기관'인 청와대의 예산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통합당 관계자는 "일반 국민들은 35만 원을 쓰는 일도 이런 식으로 결정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국민의 혈세에서 염출하거나 후손의 부담으로 지워질 35조 원 거액 예산을 거의 정부 원안대로 의결해주거나, 오히려 더 얹어주지 못해 안달인 모습에서, 여당 의원들이 헌법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단념하고 대통령의 추경 처리 엄명을 받드는 청와대 출장소 직원들로 전락했다는 게 분명해졌다"고 성토했다.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말대로 국회는 납세자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을 정부가 허투루 쓰지는 않을지 대표를 보내 예산안을 심의하는 것으로부터 유래된 기관이다. 이러한 국회의 연원을 고려할 때, 이날 여당이 예산안 심사를 위한 소위조차 구성하지 않은 채 전체회의에서 속전속결식으로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은 '국회의 자살' 선언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온다.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가 이날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추경 빨리 하라'며 계속 독촉만 하고 있다. 한 해에 세 차례 추경하는 정부가 어디에 있느냐"라며 "7월 3일까지 추경하라는데 35조 원이라는 돈을 일주일만에 어떻게 추경하느냐. 국회가 그저 통법부이고 거수기냐"라고 토로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의 발언이라는 분석이다.


국회 본연의 기능인 예산심의를 방기하는 민주당의 행태로 볼 때, 국회의 또다른 중요한 기능인 법안심사도 상임위 법안소위부터 시작되는 제대로 된 절차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암울한 관측이 벌써부터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오만한 여당의 기고만장이 끝이 어디일지 알 수 없다"고 개탄했다.


민주당은 원구성 협상 과정에서 헌정 관례대로 법사위만 통합당에 돌려줬더라면 국회를 당장 가동할 수 있었는데도, 국토위·정무위·농해수위 등은 다 내줄 수 있지만 법사위만은 줄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결국 협상을 파탄냈다. 향후 법안심사 과정에서 '폭주'가 일어난다면 그 지점은 법사위와 관련된 법안, 특히 공수처 관련 법안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이유다.


이와 관련, 김은혜 통합당 대변인은 "이해찬 대표가 '공수처를 방해하던 법사위는 이제 없다'며, 본인들이 통과시킨 공수처법을 다시 입맛에 맞게 고쳐서라도 공수처를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며 "결국 법사위에 대한 비상식적인 집착이 청와대의 숙원사업 공수처를 위한 것임을 만천하에 알린 셈"이라고 내다봤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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