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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이승만 그리고 마크롱


입력 2020.07.02 08:00 수정 2020.06.29 10:56        데스크 (desk@dailian.co.kr)

드골, 프랑스 국민들에게 저항의 씨 뿌려

이승만, 일제 치하 조국 광복(光復)의 꿈 지키게

마크롱, 희망과 투쟁의 불꽃을 점화(點火)

샤를르 드 골 전 프랑스 대통령(왼쪽부터),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데일리안 DB 샤를르 드 골 전 프랑스 대통령(왼쪽부터),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데일리안 DB

지난 6월 18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BBC 방송 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 80년 전인 1940년 6월 18일, 드골 장군은 프랑스의 망명정부인 자유프랑스(Free France)를 대표해,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국민들에게 BBC를 통해 “프랑스 망명정부가 런던에 수립”된 사실을 전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의 저항(Resistance)의 불꽃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면서 희망과 투쟁의 불꽃을 점화(點火)했다.


이날 마크롱 대통령은 “BBC의 마이크는 자유프랑스에게 첫 번째 무기였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전하고, 자유프랑스를 받아준 런던시에 대해서 프랑스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네르 훈장을 수여했다. 런던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 유럽 9개국의 망명정부가 둥지를 틀었던 ‘망명정부의 요람’이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벨기에군 등 모두 33만 명의 대병력이 프랑스의 덩케르크에서 철수를 완료한 시점은 6월 4일. 드골 장군은 불과 열흘 만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보고했다. 남쪽 비시(Vichy)에 수립된 앙리 페텡 원수의 프랑스 정부는 자동적으로 독일의 괴뢰정부가 됐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드골은 2차 대전 기간 동안 자유프랑스를 이끌면서 지도자로 부상하고 1944년 파리 해방(解放)의 선두에 서게 된다. BBC의 첫 방송이 나간 뒤 4년만의 개선(凱旋)이었다. 장군 드골은 그 후정치지도자로 변신해 1959~1969년까지 대통령을 지내면서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라는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고향 땅에 묻혔다.


자유프랑스가 런던에 둥지를 틀 무렵 미국은 자유프랑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유럽 본토에서 쫓겨난 많은 저항 단체 가운데 하나로, 드골은 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대했다. 미국은 오히려 괴뢰정부인 ‘비시(Vichy)프랑스’를 인정했다. 오직 영국의 처칠 수상은 드골의 자유프랑스를 인정했다.


드골이 나치 점령하에서 신음하던 프랑스 국민들에게 BBC의 전파를 통해 저항(Resistance)의 횃불을 올리고 있을 무렵 대서양 건너 미주(美洲) 지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한국의 지도자도 마이크를 통해 동포를 만난다.


이승만 박사(1875~1965)는 1942년 6월 13일, 미드웨이 해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短波) 방송을 통해 일제(日帝) 치하에서 고통 받는 동포들에게 육성(肉聲)으로 고(告)한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왜적(倭敵)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이어 이 박사는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라고 호소했다.


7분 남짓한 이승만 박사의 육성은 6월과 7월 두 달 동안 반복해서 방송됐다. 일제 치하에서 30년 이상을 시달리며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동포들은 은밀하게 전해지는 방송 내용을 들으며, 사그라져 가는 조국 광복(光復)의 꿈을 지켜갈 수 있었다.


일제는 194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두 신문도 강제로 폐간해 식민지 백성들은 오직 라디오를 통해 해외의 소식을 얻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몇 만대에 불과한 라디오, 그 가운데서도 소지가 금지된 단파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듣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1942년 말~1943년 초, 일제는 단파라디오를 통해 이승만 박사의 육성방송을 듣고 이 내용을 전파한 혐의로, 방송국[JODK, 경성방송국] 엔지니어 등 수백 명을 검거해 처벌했다. 멀리서 끊어질 듯 이어지며 가늘게 들려온 이승만 박사의 육성은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희망의 불꽃이었을 것이다.


드골이 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들에게 저항의 씨를 뿌리고 4년, 연합군은 파리를 탈환하고 이듬해 2차 대전을 마무리 지었다. 이승만이 뿌린 씨앗도 3년 뒤 개화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조국 땅을 밟았다. 가난과 절망으로 가득한 조국 땅을 떠난 지 34년만의 귀국이었다. 이승만은 1948~1960년 조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김일성의 침략도 막아내고,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숨졌다. 그의 고향은 휴전선 이북인 황해도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5월에도 드골이 참전했던 몽코르네 전적지를 찾아 추모했다. 몽코르네 전투(Battle of Montcornet)에서 드골의 기갑부대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으나, 끝내 막아내지는 못했다. 여기서도 마크롱은 “드골 장군은 결단력 있고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으로 프랑스를 이끌었다”고 추모했다. 젊은 대통령의 어휘와 매력이 감동으로 이어진다.


50년 전인 1970년 11월 9일 드골은 판테온(Pantheon)이 아닌 고향 땅에 묻혔다. 겨울의 초입인 오는 11월 9일 마크롱은 콜롱베(Colombey) 성당 묘지에서 또 어떤 말로 그를 추모할지 궁금해진다.


오는 7월 19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한지 55년이 된다. 대한민국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어떤 말들을 준비하고 있는가?


ⓒ

글/강성주 전 포항MBC 사장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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