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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이 밥상 엎었다면 볼턴은 엎어진 음식 메뉴 공개했다


입력 2020.06.24 09:00 수정 2020.06.24 08:06        데스크 (desk@dailian.co.kr)

김여정의 말 폭탄보다 볼턴의 글 폭탄 후유증이 더 커

文정부에게 중요한 건 그 인격과 동기 아닌 폭로 사실

존 볼턴 전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모습.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존 볼턴 전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모습.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트럼프를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을 볼턴의 회고록이 한국 집권세력에 막대한 컬래터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부수적 피해 (군사 행동으로 인한 민간인의 인적·물적 피해))를 입히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청와대를 비롯한 집권 세력은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불편한 일이 터지면 으레 침묵하다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즈음에서야 한마디 하나마나한 말을 하며 그 순간을 모면해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미국 전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튼(John Bolton)의 책 <그 일이 일어났던 방: 백악관 회고록(The Room Where It happened: The White House Memoir)에 대해서는 사전 출판본이 공개되자마자 즉각 대응에 나섰다.


청와대는 판문점 회담 등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2년여간 남북 평화 분위기 조성 추진 과정에 대해 “실질적인 내용이 아닌 위험한 연출이었다. 이 모든 외교적 판당고(Pandanggo, 스페인과 필리핀 민속 댄스에서 유래된 말로 흥겨운 춤판을 의미)는 한국의 창조물이었다”고 한 볼턴의 주장에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바탕으로 왜곡한 것이며 기본을 갖추지 못한 부적절한 행태”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또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신하고 이를 트럼프에게 전달한 문 대통령의 구상을 “정신나간 생각(Schizophrenic idea)”이라고 한 평가에 대해서는 “그건 자신이 판단해봐야 될 문제인데, 본인이 그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볼턴의 정신건강에 오히려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진보좌파 언론들도 볼턴을 인신공격하며 그를 깎아내리고 때리는 데 총공세를 펴고 있다. 반면 보수우파 언론은 볼턴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면서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나, 하는 식으로 트럼프와 문 정부 관심은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TV 이벤트, 즉 위장 평화쇼였음을 자신 있게 역설하고 있다.


참으로 흥미로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친정부 언론이 미국의 수구보수 대통령 트럼프를 편들며 볼턴을 흉보고 있고, 반정부 언론은 그가 메모광이라 틀린 말을 할 리 없다며 트럼프를 할퀴는 볼턴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볼턴은 인격적, 정치적으로 점수를 후하게 받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님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미국주의자(Americanist, 미국 국익 추구자)이자 마지막 냉전(冷戰) 외교 전문가로서 전쟁 매파(War hawks, 강경파로 비둘기파(War doves)의 반대)이다.


그는 평화보다는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 비용을 먼저 생각하는 트럼프를 보좌하는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트럼프는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언론에 농담으로 “볼턴 말을 들었다면 우리는 지금 4개의 전쟁을 치루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볼턴이 흑심이 있었는지(그는 레이건, 부시 부자 보수 대통령 행정부에서 일했으며 당시는 실업자였다.) 미국의 대표 보수언론인 폭스(Fox) TV 단골 해설자로 나와 트럼프의 마음에 드는 말을 많이 해 트럼프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1년 반쯤 후 해고됐다. 이란, 북한,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등 문제 해결에 강경책을 조언하면서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고(그는 그 전에 벌써 3명의 안보보좌관을 잘랐다.)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다른 백악관 참모들과의 불화도 크게 작용했다.


그를 다른 참모들은 개자식이라 불렀다. 전 트럼프 백악관 대변인 새라 샌더스(Sarah Huckabee Sanders)가 곧 출간할 예정인 <나 자신을 위한 대변(Speaking for Myself)>에 그런 말이 나온다고 외신이 전하고 있다. 지난해 영국 국빈 방문 당시 다른 백악관 참모진을 놔두고 자기 혼자 경호 차량을 타고 가버리자 비서실장 믹 멀베이니(Mick Mulvaney)가 나중에 볼튼에게 "넌 씨-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자식이야!(You’re a f---- self-righteous, self-centered son of a b----!)" 라고 흥분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를 대신해 그의 회고록에 맞불을 피우는 성격의 이 책에는 볼턴이 권력에 취한 (Drunk on power) 인간으로 자신이 대통령인 양 행세했다고 쓰여 있다고도 한다. 60년대 예일대 출신으로 민주당 후보 존슨에게 패배한 골수 보수우파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Barry Morris Goldwater)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원 이력이 있는 볼턴은 그의 정직성과 도덕성에 늘 의문부호가 붙는다.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월남전 징집을 피한 사실이 있고, 가장 최근엔 트럼프 탄핵 의회 청문회 출석을 거부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어떤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나서지 않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뉴욕 타임스의 한 칼럼은 그의 이 같은 인격 때문에 <책은 사지 말아야 할 것이되 폭로된 사실을 무시하진 말아야 한다>( Don’t Buy John Bolton’s Book. But Don’t Ignore Its Revelations.)라는 제목이 달려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 이 말은 문재인 정부와, 범여 집권세력, 진보좌파 언론들에게 그대로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도둑에게 “도둑이야!”라고 외친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해서 도둑이 도둑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보수 성향 국민들은 그동안 회의적(懷疑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다수 일반인들은 잘 되고 있는 것으로 믿어 온 북한의 비핵화가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어쩌면 원래부터 원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청와대는 부정할 수 있는가?


30대 초반 여성인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김여정의 말 폭탄과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가 그 가짜 밥상을 엎은 것이라면 70세 미국 전 백악관 참모 볼턴의 글 폭탄은 그 엎어진 밥상에 놓였던 메뉴들의 실체를 낱낱이 밝힌 셈이다. 그래서 그 후유증이 더 크다. 비록 그가 ‘술 취한 개자식’일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 메뉴가 소고기로 만들어졌는데, 돼지고기로 만들어졌다고 ‘왜곡’했을 수는 있다. 심지어 그 음식이 옥류관 주방에서 조리된 것임에도 청와대 키친에서 몰래 요리해 온 것이라고 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밥상은 엎어졌고, 그 만찬에 임하는 당국자들의 마음이 애당초 언론에 선전된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는 게 김여정과 볼턴에 의해 분명해짐으로써 우리 마음이 지금 매우 한탄스럽고 허망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지난 2년여를 허송한 결과가 됐고, 이렇게 한 순간에 파투(破鬪, 일이 잘못되어 흐지부지 됨)가 나버렸으니 앞으로 남은 2년여도 또 그렇게 날려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됐다. 북한에게는 핵 능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시간만이 확보돼 있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치적이 물거품 된 것은 이 ‘시간’에 비하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

글/정기수 자유기고가 (ksjung72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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