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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사 장기보험 '치킨게임'…고객 이탈 '사상 최대'


입력 2020.01.23 06:00 수정 2020.01.22 21:03        부광우 기자 (boo0731@dailian.co.kr)

장기해약환급금 1년 새 1조 늘어…지난해 13조 육박할 듯

규제 강화·실적 부진 속 출혈경쟁…보험료 인상 역풍 우려

장기해약환급금 상위 10개 손해보험사.ⓒ데일리안 부광우 기자 장기해약환급금 상위 10개 손해보험사.ⓒ데일리안 부광우 기자

국내 손해보험사들이 만기 이전에 장기보험 상품을 깨는 고객들에게 내준 돈이 1년 새 1조원 가까이 불어나면서 사상 최대 기록을 또 다시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규제 강화와 실적 부진의 이중고 속에서 비상구로 떠오른 장기보험을 두고 손보사들이 출혈경쟁을 벌인 역풍으로 풀이된다.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경우 보험사는 물론 고객들까지 보험료 인상 후폭풍에 직면하면서,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는 치킨게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3일 손해보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들어 3분기까지 국내 15개 일반 손보사들이 지급한 장기해약환급금은 총 9조6412억원으로 전년 동기(8조6831억원) 대비 11.0%(9581억원)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해약환급금은 보험 가입자가 상품 만기 전 계약을 해지할 때 보험사가 돌려주는 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장기해약환급금은 그 중에서도 장기보험 상품에서의 해약에 따른 비용을 일컫는 말이다.


이 같은 추세대로라면 지난해 손보업계의 연간 장기해약환급금은 13조원 안팎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역대 최고 금액이었던 2018년(11조8702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다. 그 만큼 장기보험을 해약하는 고객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주요 손보사별로 살펴보면 조사 대상 기간 삼성화재의 장기해약환급금 비용이 2조7124억원에서 10.9%(2963억원) 증가한 3조87억원으로 최대였다. 이어 현대해상 역시 1조2716억원에서 1조4360억원으로, DB손해보험은 1조2731억원에서 1조3933억원으로 각각 12.9%(1644억원)와 9.4%(1202억원)씩 장기해약환급금이 늘었다. KB손해보험의 장기해약환급금 지출도 1조61억원에서 1조1208억원으로 11.4%(1467억원) 확대되며 1조원을 넘어섰다.


손보업계에서는 이 같은 가입자 이탈의 배경으로 과열 경쟁을 지목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단기적으로 실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의 판매가 늘면서, 보험료 부담에 뒤늦게 불만을 갖는 가입자들이 늘고 있는 반증이란 지적이다. 통상 경기 불황이 깊어질수록 살림이 팍팍해진 서민들이 당장 혜택을 보기 힘든 보험 비용부터 줄이려하면서 계약 해지가 늘어나는 흐름을 보이긴 하지만, 최근의 모습은 이를 넘어선 수준이라는 평이다.


이런 비판이 나올 만큼 장기보험 시장은 최근 손보사들이 사활을 걸고 있는 주요 격전지다. 사실상 포화 상태에 다다른 국내 보험 시장 여건에서 그나마 성장을 꾀해 볼만한 영역으로 주목을 받으면서다. 실제로 지난해 1~3분기 손보사들이 장기보험 상품에서 거둔 원수보험료는 39조5808억원으로 전년 동기(37조7759억원) 대비 4.8%(1조8049억원) 증가했다. 장기보험을 제외한 나머지 상품들의 손보업계 원수보험료가 같은 기간 20조6114억원에서 21조3758억원으로 3.7%(7644억원) 늘어나는데 그친 것과 비교하면 높은 성장률이다.


이처럼 손보사들이 장기보험 영업에 적극 나서고 있는 이유는 우선 수익성이 뛰어나서다. 장기보험에는 질병보험과 상해보험, 운전자보험, 어린이보험 등이 꼽히는데 실제로 이들 대부분은 최근 손보사들의 주력 판매 상품들이다.


장기보험은 어떻게 상품을 설계하느냐에 따라 보험료 수준이 자동차보험이나 실손의료보험보다 훨씬 높아질 수 있다. 특히 고객이 한 번 가입할 경우 보험료 납입 기간이 10년 이상으로 길다는 점은 손보사 입장에서 가장 큰 장점이다. 1년 마다 갱신 기간이 돌아오는 자동차보험이나 실손보험은 고객 이탈로 인한 수입보험료 감소를 걱정해야 하지만, 장기보험은 길게 20년까지 지속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아울러 본격 시행이 다가오고 있는 새 국제회계기준(IFRS17)도 손보사들이 장기보험 판매에 열을 올리게 만드는 배경 중 하나다. 2022년 IFRS17이 적용되면 보험사의 부채 평가 기준은 현행 원가에서 시가로 바뀐다. 이렇게 되면 보험사의 보험금 부채 부담은 크게 늘어난다. 요즘 보험업계가 자본 확충과 더불어 이익 확대에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쓰고 있는 이유다.


손보업계의 핵심 상품에서 불어나고 있는 적자도 인해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한 현실도 손보사들로 하여금 장기보험 판매에 힘을 쏟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손보업계는 지난해에만 자동차보험에서 1조원, 실손의료보험에서 1조7000억원 등 2조7000억여원에 달하는 손실을 떠안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각종 보험료 인상 압박에도 불구하고 보험료를 억제하려는 금융당국의 움직임이 본격화하면서 적자를 감내하는 모양새다.


문제는 빠져나가는 고객을 잡기 보다는 새로운 가입 유치에 몰입하는 식으로 장기보험에 대한 영업이 과열되면서 손보사들의 사업비가 계속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수면 아래서 보험료 상승을 부채질하면서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소다.


손보업계의 지난해 3분기 말 장기보험 순사업비율은 평균 23.0%로 전년 동기(21.3%) 대비 1.7%포인트 상승했다. 순사업비율은 보험사가 거둔 수입보험료 대비 지출한 사업비의 규모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 수치가 높아졌다는 것은 그 만큼 보험사들이 영업 활동에 들이는 비용을 늘렸다는 의미로, 기존 가입자 입장에서는 잠재적인 보험료 상승 요인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계약 조기 해지 시 가입자가 져야하는 금전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큰 상품인 장기보험에서 해약이 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고객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위험 신호"라며 "당장의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보험사와 고객이 장기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구조를 기반에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광우 기자 (boo0731@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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