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와 영화관의 경계를 허물다…픽처하우스가 그리는 극장의 미래 [공간을 기억하다]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4.24 15:48  수정 2026.04.24 15:56

[작은영화관 탐방기㉟] 가로수길 픽처하우스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는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한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한다. <편집자주>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전시와 영화가 만나는 지점, 픽처하우스의 차별화 전략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에는 59석 규모의 작지만 강한 예술영화관이 들어섰다. 국내 최초의 갤러리 융합형 상영관을 표방하는 '픽처하우스'는 영화와 미술이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공간 구성으로 개관 직후부터 문화예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곳을 찾은 날, 화가이자 배우 서은혜 작가의 특별 기획전 ‘은혜에게’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갤러리 도슨트를 따라 걷는 듯한 로비 전시장에는 서 작가 특유의 따뜻하고 순수한 시선이 담긴 캐리커처와 회화 작품들이 관객을 맞이했다.


한편 라운지 바에서는 은은한 음료 향이 퍼지고, 전시 벽면을 비추는 핀 조명이 더해지며 공간의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감쌌다. 이곳이 단순히 상영을 기다리는 대기 공간이 아니라, 작품을 ‘음미하는 장소’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과거 헐리우드 영화 현상소 시사실 터라는 역사적 층위 위에, 이처럼 세련되고 자유로운 ‘살롱’의 감각이 덧입혀지며 픽처하우스만의 정체성이 완성된다. 이는 이 공간이 가로수길의 새로운 문화 아지트로 자리잡은 이유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픽처하우스가 신생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프로그래밍과 안정적인 운영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진두지휘하는 채희승 대표의 탄탄한 이력 덕분이다. 한국 영화계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쌓아온 그의 전문성은 픽처하우스라는 새로운 그릇을 빚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저는 원래 미로비전이라는 영화사에서 제작·배급을 오래 해왔고요. 예전에 극장 사업도 했어요. 2000년대 초반부터 2015년까지 광화문에서 ‘미로스페이스’라는 예술영화관을 꽤 오래 운영했거든요. 그러다가 그 극장을 정리하게 됐고, 이후에 새로운 공간을 계속 물색하고 있었어요. 마침 이 극장이 코로나 이후 직격탄을 맞으면서 운영이 많이 어려워진 상황이었고, 위치적으로도 굉장히 좋은 곳이라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맡게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게 됐습니다.”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갤러리 도슨트를 따라 걷는 듯한 로비를 지나 상영관으로 들어서는 동선은 픽처하우스가 추구하는 미학적 지향점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물리적 경계를 허문 이 독특한 구조는 관객들에게 입체적인 경험을 선한다.


“저희 픽처하우스의 차별점이라고 하면, 공간 구성 자체에서부터 조금 다른 방향을 가져가려고 했어요. 미술과 영화가 결합된 형태라고 보시면 되는데, 요즘은 단순히 미술이라기보다 비주얼 아트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미디어 아트까지 포함해서 시각예술과 영화 영상이 융합된 형태죠.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갤러리 융합형 영화관’이라는 모토를 걸고 출발했습니다. 실제로도 미술과 관련된 프로그래밍을 꾸준히 해왔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미술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계속 찾아오게 됐어요. 관련 행사들도 병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영화관으로서의 아이덴티티도 차근차근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전시와 상영을 결합한 기획전은 이러한 방향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픽처하우스는 문을 연 직후부터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쉼 없이 선보이며, 갤러리 융합형 상영관의 표본을 제시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개관 초기 ‘백남준 기획전’을 들 수 있어요. 전시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고, 이후에는 구본창 작가님의 ‘작은 영화관’ 프로젝트를 통해 충무로 초기 작업들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면서 그와 연관된 영화들을 함께 틀었죠. 최근에는 ‘21세기 안성기’ 기획전을 통해 안성기 배우를 조명했고요. 지금은 서은혜 작가 전시와 함께 그분의 출연작이나 애착하는 작품들을 엮어서 상영하고 있습니다. 항상 전시와 상영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픽처하우스가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기획에 매진하는 배경에는 빠르게 재편되는 문화 지형도가 자리하고 있다. 감각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한편, 가로수길이라는 입지적 특성을 살려 전 연령층과 외국인 관광객까지 포섭해 나가는 중이다.


“요즘 관객층이 많이 변했잖아요. 특히 MZ세대 같은 경우 영화관을 떠났다고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코로나 이후로 오히려 미술에 대한 관심은 굉장히 높아졌어요. 인스타그램 영향도 크고요. 이런 흐름을 활용해서, 미술을 매개로 젊은 관객들을 예술영화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고민하게 된 거죠. 다들 인스타에서 나온 장면을 찍지만, 그 안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역적인 특성도 반영하고 있어요. 강남이라는 위치, 외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서 프로그래밍을 따로 구성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작년 추석에는 ‘문라이트 필름 페스티벌’을 진행했는데, 저희는 한국 영화를 상시 영어 자막으로 상영하고 있어요. 그래서 외국인들도 편하게 와서 한국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픽처하우스가 제안하는 극장의 미래는 영화관보다는 복합 문화 아지트에 가깝다. 영화를 감상하는 행위가 술 한 잔의 여유나 깊이 있는 토론, 혹은 개인적인 작업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은 이곳에서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공간 자체도 일반적인 극장과는 조금 다르게 구성했어요. 라운지 바 같은 느낌으로, 영화 보면서 술도 마실 수 있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살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보고 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머물면서 영화를 음미하고 더 확장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요. 카공족처럼 하루 종일 머무는 분들도 있고, 영화를 보면서 공부하거나 토론하는 분들도 있어요. 작은 공간이지만 커뮤니티로 확장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공간의 미학만큼이나 내실을 기하는 것은 결국 스크린을 채우는 콘텐츠의 힘이다.


“상영 기준은 기본적으로 한국 독립영화나 해외 영화제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편성하고 있고요. 거기에 저희만의 기획전을 더하는 방식입니다. 요즘은 극장마다 색깔이 생기고 있잖아요. 저희도 자체 수입 기능이 있어서, 재개봉 작품을 발굴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영화는 GV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관객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이어가고 있어요.”


공간·콘텐츠·배급까지…픽처하우스의 확장 전략


픽처하우스가 추구하는 '복합 문화'의 완성은 결국 영화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기본기에서 완성된다.


“이 공간 자체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이에요. 과거에 ‘헐리우드 현상소’가 있던 자리인데, 지하가 시사실이었어요. 그러니까 감독이나 제작사들이 최종 후반 작업을 테스트하던 공간이죠. 그런 역사 때문에 기술적으로도 굉장히 잘 갖춰져 있습니다. 스크린도 크고, 특히 사운드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아요. 음악 영화 상영할 때는 관객들이 많이 놀라시죠. ‘시네마 팝’이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아요. 매주 금·토 심야에 음악 영화 중심으로 상영하는데, 맥주 한 잔 들고 콘서트처럼 즐길 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비긴어게인’이나 ‘어쩌면 해피엔딩’, 아카데미 기획전도 음악 영화 중심으로 구성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관객들에게 특별한 관람 경험을 선사해온 픽처하우스는 이제 창작자들의 든든한 파트너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자체 배급 레이블을 통해 가능성 있는 독립영화들이 스크린에 걸릴 기회를 직접 만들어내며, 예술영화 생태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배급도 본격적으로 확대하고 있어요. 피처하우스라는 극장 브랜드를 기반으로 독립영화 배급 레이블을 따로 만들었고, 올해만 해도 10편 이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카레’, ‘필링’ 같은 작품들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거대 플랫폼의 범람으로 극장의 위기론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지만, 픽처하우스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독립예술영화관만의 독보적인 생존법을 찾고 있다. 대중적인 물결에 휩쓸리기보다 자신들만의 뾰족한 색깔로 충성도 높은 관객을 결집시키는 것이 이 시대 극장이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다.


“OTT 시대에 극장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오히려 작은 영화관에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특화된 방향으로 가느냐, 그리고 얼마나 충성도 있는 관객층을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시점입니다. 지금은 그 기반을 다지는 과도기라고 보고 있어요.”


픽처하우스의 실험적인 운영 방식은 예술영화관을 바라보는 기존의 경직된 잣대에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의 편리함은 취하되 프로그램의 자율성은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이 정작 정책적 지원의 현장에서는 외면받고 있는 셈이다.


“메가박스 전산망을 활용하는 제휴 구조가 오히려 지원 필요성에 대한 오해를 낳고 있는 것 같아 우려가 큽니다. 저희는 예술영화의 접근성을 낮추기 위해 작년 9월부터 메가박스 전산망을 도입했고, 그 결과 일반 관객층이 예술영화로 유입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기존 예술영화관과는 다른 관객층도 형성되고 있고요. 그런데 외부에서는 이를 대형 멀티플렉스와 함께하는 극장으로 인식하면서 ‘굳이 지원이 필요하냐’는 시선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실 프로그램은 전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런 구조적인 오해가 이번 결과에도 영향을 준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픽처하우스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러닝타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크린의 여운이 갤러리로 이어지고, 다시 라운지에서의 담소로 확장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된다. 관객이 수동적인 관람객을 넘어 공간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는 운영자의 소망은 픽처하우스의 내일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그냥 편하게 와서 영화 보고 가는 곳이라기보다, 영화와 미술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관객과의 인터랙션이 활발한 공간이요. 관객들이 프로그래밍을 제안하기도 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형태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발전하는 게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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